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 체코, 1875~1926)
1894년 시집 '인생과 소곡'
1901년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
1902년 <형상시집> 출판
1910년 <말테의 수기> 출판
1923년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출판
1926년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
서시(序詩)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 대로 지쳐, 닳고 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Entrance
Whoever you are: in the evening step out
of your room, where you know everything;
yours is the last house before the far-off:
whoever you are.
With your eyes, which in their weariness
barely free themselves from the worn-out threshold,
you lift very slowly one black tree
and place it against the sky: slender, alone.
And you have made the world. And it is huge
and like a word which grows ripe in silence.
And as your will seizes on its meaning,
tenderly your eyes let go.
(Rainer Maria Rilke / Translated by Edward Snow)
루살로메에게 바치는 詩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십시오
나는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나의 양팔이 꺾이어 당신을 붙들 수 없다면
나의 불붙은 심장으로 당신을 붙잡을 것입니다.
나의 심장이 멈춘다면 나의 뇌수라도
그대를 향해 노래할 것입니다.
나의 뇌수마저 불태운다면
나는 당신을 내 핏속에
싣고 갈 것입니다.
고독
고독은 비처럼
바다로부터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멀리 외딴 벌판으로부터 고독은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가서는
처음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모든 골목길마다 아침을 향해 뒤척일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신들은
실망과 슬픔에 젖어 서로를 떠나 갈 때,
그리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한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그 뒤엉킨 시간에 비 되어 내리는
고독은 냇물과 더불어 흘러간다.
봄을 그대에게
갖가지의 기적을 일으키는
봄을 그대에게 보이리라.
봄은 숲에서 사는 것,
도시에는 오지 않네.
쌀쌀한 도시에서
손을 잡고서
나란히 둘이서 걷는 사람만
언젠가 한번은 봄을 볼 수 있으리
석상의 노래
소중한 목숨을 버릴 만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한 사람 바다에 익사한다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체로, 생명체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도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를 잠 깨울 수 있는 만큼
용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장 귀중한 것을 내게 주는
생명을 갖게 된다면
그때 나는 혼자 울리라.
내가 버린 나의 돌을 생각하며 울리라.
나의 피가 포도주처럼 익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던 사람 하나를
바다 속에서 불러낼 수도 없는 것을
엄숙한 시간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우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슬퍼 울고 있다.
지금 이 밤 어디에선가 웃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밤에 웃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가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해 걷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선가 죽어가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보고 있다.
작별
우리 이제 서로 작별을 나누자, 두 개의 별처럼,
저 엄청난 밤의 크기로 따로 떨어진,
그거야 하나의 가까움이려니, 아득함을 가늠하여
가장 먼 것에서 스스로를 알아보는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그리움이란
그리움이란 이런 것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사는 것
그러나 시간 속에 고향은 없는 것
소망이란 이런 것
매일의 순간들이
영원과 나누는 진실한 대화
그리고 산다는 것은 이런 것
모든 시간 중에서도 가장 고독한 순간이
어제 하루를 뚫고 솟아오를 때까지
다른 시간들과는 또 다른 미소를 띠고
영원 속에서 침묵하고 마는 것
사랑의 노래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에 닿지 않은 바에야
어찌 내 영혼을 간직하겠습니까?
어찌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에게로
내 영혼을 쳐 올려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어떤 것 옆,
당신의 깊은 마음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낯선 곳에
내 영혼을 가져가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은
확실히
마치 두 줄의 鉉에서 한 音을 짜내는
활 모양의 바이올린처럼 우리를 한데 묶어 놓습니다.
어떤 악기에 우리는 얽혀져 있는 것인가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건가요?
오, 달콤한 노래입니다.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데 익숙해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전개되어
마침내는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일과가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꿈의 노래
이 노란 장미꽃은
어제 그 소년이 나한테 준 것이다.
오늘 나는 이 장미꽃을
그 소년의 새 무덤으로 가지고 간다.
장미꽃잎 그늘에 조그만 물방울이
아직도 방울져 빛난다. 보게나.
오늘은 그것도 눈물이다.
어제는 아침 이슬이던 것이,
가을
나뭇잎이 떨어진다, 멀리서부터 떨어진다,
하늘 속에 먼 정원이 시들은 것처럼,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이 무거운 지구는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모든 것에 있다.
그러나 한 분이 있다,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에 받아주는
지키는 사람처럼
포도밭에 원두막을 짓고서
지키는 사람처럼
주여, 저는 당신 안에 있는 원두막입니다.
오오 주여, 저는 당신의 밤에 싸인 밤입니다.
포도밭, 목장, 오래 된 사과밭
봄의 계절을 건너뛸 줄 모르는 밭
대리석처럼 단단한 땅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
당신의 둥근 가지에서 향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지키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진액에 거침없이 녹아들어
당신의 깊은 뜻이 제 곁을 고이 타오릅니다.
이웃
낯선 바이올린이여, 너는 어찌 내 뒤를 쫓는가?
머나먼 타향의 여러 도시에서 벌써 얼마나
너의 쓸쓸한 밤은 나의 밤에게 말을 건넸던가?
수백의 사람이 너를 켜는가, 한 사람이 켜는가?
네가 아니라면 벌써 강물에 몸을 던졌을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마다 지금도 살고 있는가?
네 소리는 어찌 이리도 나의 가슴을 치는가?
나는 왜 언제나 너로 하여 불안스레
'삶은 모든 사물들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고
노래하고 말하도록 하는 사람들의
이웃이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박해받으면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려는 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
여기에는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프 속에 깃들여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 불어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가지겠습니까,
향기를 풍기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 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神)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두이노의 비가(悲歌)
내가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 주리오? 설령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해도, 나보다 사뭇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는 무서움의 시작에 다름 아니니까.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어두운 흐느낌의
유혹소리를 꿀컥 삼키는데, 아,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
부릴 수 있을까? 천사들도 아니요 인간들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어 날마다 볼 수 있을는지.
우리에게 남은 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에의 뒤틀린 맹종, 그것들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 그리고 밤, 밤, 우주로 가득한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파먹어 가면, 누구에겐들 밤만 남지 않으랴,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모든 이의 가슴 앞에 힘겹게 드리운,
약간 환멸을 느끼는 밤. 밤은 사랑하는 이들한테는 더 쉬울까?
아, 그들은 그저 몸을 합쳐 그들의 운명을 가리고 있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숨 쉬는 공간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네 공허를 던져라. 그러면 새들은
더욱 당찬 날갯짓으로 넓어진 대기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봄들은 너를 필요로 할지 모르지. 수많은 별들은
네가 저희들을 느끼기를 바랐다. 과거 속에서
파도 하나 일어나고, 혹은
열려진 창문 옆을 지나갈 때
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겠지. 그 모든 건 사명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완수했는가? 모든 것이
네게 애인을 점지해줄 듯한 기대감에
너는 언제나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는가? (네가 그녀를
어디에 숨겨도, 크고 낯선 생각들은 네 가슴속을
들락거리며 밤이면 어김없이 네 안에 머무르는데.)
그립거들랑, 사랑을 하는 자들을 노래하라, 하지만
그들의 유명한 감정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리라.
네가 시기할 지경인 그 사람들, 너는 그들이 사랑의
만족을 맛본 이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움을 알았으리라.
결코 다함이 없는 칭송을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라,
생각하라, 영웅이란 영속하는 법, 몰락까지도 그에겐
존재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을, 그의 궁극적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지친 자연은 사랑에 빠진 자들을,
두 번 다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듯이,
제 몸 속으로 거두어들인다. 너는 가스파라 스탐파를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하는 남자의 버림을 받은
한 처녀가 사랑에 빠진 스탐파의 드높은 모범에서
자기도 그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을?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 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면서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목소리, 목소리들, 들어라, 내 가슴아, 지난날 성자들만이
들었던 소리를, 엄청난 외침 소리가 그들을
땅에서 들어 올렸지만, 그들, 불가사의한 자들은
무릎 꿇은 자세 흩뜨리지 않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바로 그렇게 그들은 귀 기울이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야
더 견디기 어려우리.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를 들어라,
정적 속에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傳言을.
이제 그 젊은 주검들이 너를 향해 소곤댄다.
네가 어디로 발을 옮기든, 교회든 로마든 나폴리든
그들의 운명은 조용히 네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아니면 얼마 전의 산타 마리아 포르모자의 碑文처럼
비문 하나가 네게 엄숙히 그것을 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가? 내 그들의 영혼의
순수한 움직임에 가끔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옳지 못한 인상일랑 조용히 버려야 하리라.
이 지상에 더 이상 살지 않음은 참으로 이상하다,
겨우 익힌 관습을 다시는 행할 수 없음과,
장미들과 그 밖의 무언가 나름대로 약속하는 사물들에게
인간의 장래의 의미를 선사할 수 없음과,
한없이 걱정스런 두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이제 더 이상 아님이, 그리고 자기 이름마저도 마치
망가진 장난감처럼 버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서로
연결되어 있던 모든 것이 그처럼 허공에 흩어져 날리는 것을
보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죽어 있다는 것은
점차 조금이나마 영원을 맛보기 위한 힘겨움과 만회로
가득 차 있는 것,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은
모든 것을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하는 실수를 범한다.
천사들은 살아 있는 자들 사이를 가는지, 죽은 자들
사이를 가는지 때때로 모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영원한 흐름은 두 영역 사이로
모든 세대를 끌어가니, 두 영역의 모두를 압도한다.
끝내 그들,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니,
우리는 어느 덧 자라나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나듯, 조용히
대지의 품을 떠난다. 그러나 그토록 큰 비밀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슬픔에서 그토록 자주 복된 진보를
우려내는 우리는, 그들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젠가 리노스를 잃은 비탄 속에서 튀어나온 첫 음악이
메마른 단단함 사이를 꿰뚫었다는 전설은 헛된 것인가,
거의 신에 가까운 한 젊은이가 갑작스레 영원히
떠나버려 깜짝 놀란 공간 속에서 비로소 공허함이
우리를 매혹시키고 위로하며 돕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
시인의 죽음
그는 누워있었다. 돋아 고인 얼굴은
높은 베개에 묻혀 창백하고 거부하는 표정이었다.
세상과 이러한 세상에 대한 앎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떨어져 나가
무정한 세월을 향해 되돌아간 지금,
그의 사는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가
이 모든 것들과 하나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 계곡, 이 초원 그리고 이 호수,
모든 것은 그의 얼굴이었는데.
오! 그의 얼굴은 이 모든 광활함이었다.
지금도 그에게 달려가 매달리고픈 이 광활함,
그리고 이제 서글프게 죽어 가는 그의 면상은
공기에 닿아 썩어 가는 과일 속처럼
부드럽게 그리고 훤히 드러나 있다.
장미
1
행복한 장미여, 너의 신선함이 때로
우리를 이토록 놀라게 하는 것은,
너 자신 속에서, 그 안에서,
꽃잎들을 포개고, 네가 쉬고 있기 때문이다.
입 끝에 가 닿는 고요한 그 마음의 사랑의 말들이,
무수히, 서로 건드리는 동안,
전체는 완전히 깨어 있고,
한가운데는 잠들어 있구나.
2
너를 본다, 장미여.
사람들이 절대로 읽지 않을
세세한 행복의 수많은 페이지를 담은
살짝 펼쳐진 책이여, 마술의 책이여.
바람이 불면 열리고,
두 눈 감고도 읽을 수 있는 책이여......
똑같은 생각들을 가졌음에 당혹해하며
나비들이 거기에서 빠져나오는구나.
3
장미여, 그대, 아, 한없이 자제하며,
한없이 퍼져나가는 탁월하게 완벽한 사물이여,
아, 지나친 감미로움에 방심한 육체의 머리여.
아 그대여, 그 떠도는 머무름의 최고의 본질이여,
어떠한 것도 그대만큼의 가치는 없구나;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려운 그 사랑의 공간을
그대의 향기는 빙빙 돌고 있구나.
4
하지만 너의 꽃받침의 술잔을 채우라고
네게 권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 꼬임에 홀린
너의 풍성함이 그것을 감행하였다.
너는 아주 풍부해서, 단 한송이의 꽃으로
백 번이나 너 자신이 되었지;
그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태였어......
그래 너는 딴 생각을 하지 않더구나.
5
체념으로 둘러싸인 체념.
사랑의 말을 건드리는 애정......
끊임없이 자신을 애무하는 듯하는 것;
빛을 받아 반영된 자신의 모습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 애무하는 것,
그것은 너의 내면이다.
그렇게 너는 소원을 이룬
나르시스의 주제를 만들어낸다.
6
단 한 송이 장미, 그것은 모든 장미들이며
바로 이런 장미다:
대체할 수 없는 것, 완벽한 것,
사물들의 텍스트로 둘러싸인 유연한 단어.
우리들의 희망은 무엇이었는지,
계속되는 떠남 속에서
다정스런 멈춤들은 어떠했는지,
장미가 없다면 대체 어떻게 말할 것인가.
7
신선한 맑은 장미여,
감은 내 눈에 너를 가져다대면-,
마치 천개의 눈꺼풀이
따뜻한 내 눈꺼풀 위에
겹쳐진 것 같구나.
나의 거짓 잠 위의 천개의 잠,
나는 자는 척하며
향기로운 미궁 속을 배회한다.
8
안으로 무수히 겹쳐진 꽃이여,
마치 울고 잇는 여인처럼,
너무나 충만한 꿈으로 젖어,
아침에 너는 몸을 숙이고 있구나.
불확실한 소망 속에서,
잠들어 있는 너의 부드러운 힘들은,
뺨과 가슴 사이에서
그 연약한 형체를 펼쳐놓는구나.
9
장미여, 아주 정열적이지만 명석해서,
로즈 성녀의 성유물함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구나, 벌거벗은 성녀의
그 아찔한 향기를 퍼뜨리는 장미여.
더 이상 결코 유혹당하지도 않으면서,
그 내면의 평화로 당황하게 하는 장미여.
이브에게서, 그녀의 최초의 경고에서 아주 멀리 있는
최후의 애인이여-, 한없이 상실을 소유하는 장미여.
10
어떤 존재도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의,
모든 것이 쓰라린 마음을 거부하는 시간의 애인;
공중에 떠도는 그 많은 애무를
그 현존으로 증언하는 위안의 여인.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지라도,
있었던 일과 일어날 수 잇는 일을 부정할지라도,
우리 곁에서 요정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이 고집스런 애인을 아주 많이 생각하자.
11
완벽한 장미여, 그대의 존재를
나는 너무나 의식하고 있어서,
기꺼이 그대를
축제처럼 들뜬 나의 가슴과 혼동한다.
장미여, 나는 마치 그대가 인생의 전부인 양
그대의 향기를 들이마신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그러한 친구의
완벽한 친구라고 느낀다.
12
장미여, 누구에 맞서려고
그런 가시들을
가지게 되었는가?
너무나 예민한 그대의 기쁨이
그대로 하여 그렇게
무장한 사물이 되도록
강요했던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과장된 무기는
누구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는가?
그런 무기를 조금도 겁내지 않는
얼마나 많은 적들을
나는 당신에게서 제거해주었던가.
그런 반면, 당신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사람들이 당신에게 쏟는
보살핌에 상처를 준다.
13
장미여, 그대는 현재의 우리의 격정의
열렬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 더 좋은가?
행복이 다시 시작될 때
그대를 더욱 사로잡는 것은 추억인가?
향기 나는 상자 속에서나, 등불 심지 곁에서,
또는 우리가 홀로 다시 읽을 좋아하는 책 속에서
`꽃잎마다 수의가 되어`
행복하고 말라버린 그대를 나는 몇 번이나 보았다.
14
여름 며칠 동안은
장미들과 동시대인이 되자:
봉오리가 벌어진 장미들의 영혼 주위에
떠도는 그 무엇인가를 들이마시자.
죽어가는 장미 하나하나를
속내 친구로 삼자.
그리고 부재하는 그 누이보다도 오래 살아
다른 장미들 안에서 살아가자.
15
아 홀로 핀 풍성한 꽃이여, 그대는
그대만의 공간을 창조하는구나.
향기의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는구나.
그대의 향기는 다른 꽃잎들처럼
수없이 많은 그대의 꽃받침을 감싸는구나.
나는 그대를 다시 부여잡고, 그대는 비스듬히 눕는구나.
뛰어난 여배우여.
16
너에 대해 말하지 말자. 너의 천성에 따르면
너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다른 꽃들은 식탁을 장식할 뿐인데
너는 식탁을 변모시킨다.
소박한 꽃병에 너를 꽂으면-,
이제 모든 것들이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같은 구절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천사가 노래하는 구절이다.
17
너의 안에서, 너보다 더, 너의 궁극의 본질을
준비하는 것은 바로 너.
너로부터 나오는 것, 그 심란한 동요,
그것은 너이 춤이다.
꽃잎은 저마다 수긍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로운 몇 걸음을 바람 속에서 내딛는다.
아, 온통 여러 눈으로 둘러싸인,
눈의 음악이여.
그 한가운데서 너는
만질 수 없는 것이 되는구나.
18
우리를 감동시키는 모든 것, 너는 그것을 공유한다.
그러나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너의 페이지들을 모두 읽으려면
백 마리의 나비가 있어야 하리라.
너희들 중에는 사전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들을 따서 모으는 이들은
그 책장들을 모두 다시 묶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는 편지 같은 장미들이 좋다.
19
그대는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만들어냈던
자신의 미묘한 재료를 증가시킴으로써
우리는 장미처럼 채워질 수 있을까?
왜냐하면 한 송이 장미가 된다는 것은
큰 일이 아닌 것 같으니까.
신은, 창문으로 내다보며
집을 짓고 있다.
20
말해다오, 장미여.
그대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그대의 완만한 핵심이
이 산문으로 된 공간에 이 모든 대기의 흥분을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몇 번이나 그 대기는 사물들이
대기에 구멍을 낸다고 주장하는가,
아니면 뽀로통해져서
씁쓸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그런데 그대의 육신 둘레에서는,
장미여, 그 대기가 바퀴처럼 돌고 있다.
21
둥근 장미여, 그대를 완성하려고
그대의 꽃대 위에서 주위를 돌고 있다는 그것이
그대에게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는가?
하지만 그대 자신의 비약이 그대를 온통 적실 때,
대의 봉오리 속에서 그대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세계는 둥글게 돌고 잇다.
세계의 고요한 중심이
둥근 장미의 둥근 휴식을 감행하도록.
22
당신은 다시, 당신은
죽은 자들의 땅에서 나오는군요.
장미여, 당신은
황금빛 가득한 낮으로
이 확신에 찬 행복을 가져가네요.
그 움푹 파인 해골로는 결코
그것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했던
죽은 자들이 그것을 허락하나요?
23
장미여, 너무 늦게 왔기에, 쓰라린 밤들이
너무나 빛나는 별빛으로 그대를 가로막는구나.
장미여, 그대 여름의 자매들의
수려한 완전한 쾌락을 짐작하겠는가?
여러 날을 또 여러 날을, 너무 세게 조여진
껍질 속에서 그대가 망설이는 것을 나는 본다.
장미여, 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거꾸로
죽음의 완만함을 모방하는구나.
그대의 수없이 많은 상태는
모든 것이 뒤섞이는 혼잡 속에서,
무와 존재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일치를,
그대에게 알려주는가? 우리는 알지 못하는데.
24
장미여, 사랑스러운 우아함이여,
그대를 밖에 내버려 두어야만 했던가?
우리를 향한 운명이 다하는 곳에서
한 송이 장미는 무엇을 할 것인가?
돌아가야 하는 지점. 이제 그대는
우리와 더불어, 이 삶을,
그대의 나이와 다른 이 삶을
열광적으로 함께 나누는구나.
장미의 속
어디가 이 꽃의 속에 대한
밖인가요? 그 어떤 아픔 위에
이런 아마(亞麻) 천이 내려왔나요?
이 우울을 모르고
활짝 핀 장미의
그 호수 속에 비치는 것은
어느 하늘인가요? 보세요.
어떻게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져 있는가를, 떨리는 손길도
그것을 흩어버리지 못할 만큼
장미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네요. 그 많은 꽃들은
필 대로 피어
안에서 바깥으로 넘쳐 나지요.
갈수록 쨍쨍한 대낮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온 여름을 한 칸 방(房)으로 만듭니다.
꿈속의 방으로 말입니다.
노란 장미
여기 이 노란 장미를
어제 그 소년이 내게 주었지
오늘 나는 그 장미를 들고
파릇한 소년의 무덤으로 간다
보라! 꽃잎에는 아직
맑은 물방울이 맺혀 있다
오늘 눈물인 이것
어제는 이슬이던 것,
흰 장미
너는 죽음에 몸을 맡긴 채
잎사귀 위에 서럽게 얼굴을 누인다.
유령 같은 빛을 숨쉬며
희푸른 꿈을 띠고 있다.
하지만 노래마냥
마지막 가냘픈 빛을 띠며
아직도 하룻밤을
달콤한 네 향기 방 안에 스민다.
네 어린 영혼은 불안스럽게
이름 없는 것을 더듬거린다.
내 가슴에서 웃으며 죽는다.
내 누이인 흰 장미여
검은 고양이
불현듯 눈을 뜨고
그대의 얼굴을 쳐다보면
그대는 다시 돌처럼 굳은
둥근 눈망울이 뿜는 암브라 향기 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한 마리 곤충처럼
밀폐된 단절을 만날 것이리.
그대의 눈길이 날카롭게 닿는 곳에
유령이라도 있는 듯
그러나 거기 그 검은 피부를 보고
그대의 강렬한 시선도 수그러들고 마네
그 검은 모습으로
미친 듯 날뛸 때면 돌연
그 숨 막히는 작은 방의 의자 옆에서
증발하듯 사라지네.
고양이는 부딪치던 눈길을 슬그머니
감추려하네
매섭고도 예민한 시선을 던지다가
스스로 잠으로 빠져드네.
나의 축제
이것은 그리움이다.
큰 파도 속에 사는
시간 속엔 고향도 없다.
그것은 바람이다.
날마다의 시간 속에서
영원과 나누는 대화.
이것은 삶이다.
어제에서
모든 시간 중에서
가장 외로운 것이 솟아오를 때까지.
다른 누이들과 다른 미소를 지으며
영원에 맞서 침묵한다.
바라보는 사람
그토록 오랜 우중충한 나날 끝에
나무들이 내 시름의 유리창을 치는 것을 보며
나는 폭풍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득히 먼 들판에서 들려오는 말이여,
친구가 없이는 짐을 질 수 없고
자매가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고
만물의 모양을 바꿔 놓는 폭풍은
숲을 가로지르고 시간을 가로질러 몰려온다.
세상은 나이를 잃은 듯하고
곧 풍경은, 시편의 시 한 줄처럼
심각함과 무게가 영원 자체이다.
우리가 택하는 싸움의 대상은 극히 사소한 것!
그러나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자는 아주 크다!
우리도 만물처럼 엄청난 폭풍에
스스로 지배당할 마음만 있다면
우리도 강해지리라, 이름이 필요 없으리라
우리는 기껏 이겨 봐야 작은 것들
승리 자체가 우리를 작아지게 한다.
그러나 비범하고 영원한 것은
절대 우리에게 굽히지 않는다.
구약의 씨름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던
천사를 일컫는 말이다
씨름하는 자들의 근육이
금속 줄처럼 손가락 아래서
그윽한 음악의 현이 되었다
누구든 이 천사에게 지는 자는
(대개는 단순히 싸움을 거부한 채)
모양을 바꿔 놓을 듯 자신을 주무르던
그 거친 손을 통해 참 긍지와
힘을 얻어 큰 자가 되어 떠났다
이김은 그에게 유혹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그는 자란다. 더 큰 존재에게 항상
결정적 패배를 당함으로.
지난날 네가 나를 보았을 때
지난날 네가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아직도 철없는 어린 아이.
한 가닥 가냘픈 보리수 가지처럼
조용히 네 마음에 피어 들었다.
어린 탓으로 하여 이름도 없이
그리움 속에서 헤매었나니,
이름 지을 수 없을 만큼 자랐노라고
네가 말하는 지금 이 시간까지.
이제 느껴 아노니, 신화와 오월
바다와 나는 지금 한 몸인 것을.
또한 포도주 향기처럼 네 영혼 속에서
짙게 번져나감을,
그대 곁에서
그대 곁으로 다가가도
그대는 너무도 거대하여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 그대는 어두워
내 초라한 밝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대는 파도와도 같아
하루하루의 세상은
그 속에 빠져죽고
오직, 그리움만이
그 아래에까지 치솟아
고귀한 천사들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지난날이여 안녕
안녕
찬란한 지난날의 추억이여
장미 빛 같은 내 얼굴은
이미 간 데 없고
알프레도의 사랑도 이제는 없네.
내 마음의 위로와
내 혼의 반려는 사라졌네.
나의 가엾은 영혼을
주여! 굽어 살펴주옵소서
아,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나요.
정녕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인가요.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 왔는가
사랑이 네게로 어떻게 왔는가?
햇살처럼 왔는가, 꽃눈 발처럼 왔는가.
기도처럼 왔는가? 말해다오
행복이 하늘에서 반짝이며 내려와
커다란 모습으로 날개를 접고
피어나는 나의 영혼에 매달렸다.
하얀 국화가 핀 날이었어.
나는 그 짙은 화려함이 두려웠어.
깊은 밤중에 이윽고 네가 찾아와
나의 영혼을 네 품에 껴안았지.
정말 무서웠는데, 네가 다정히 찾아와
나는 꿈속에서도 너를 생각했어.
네가 찾아와, 동화처럼
밤의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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