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 김상옥(1920년∼2004년)
경상남도 통영.
시조시인, 서예가, 전각의 대가.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 출간
김상옥 시조 모음
◈ 어느 날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백자부白磁賦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불로초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純朴하도다
◈ 봉선화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듯 힘줄만이 서누나.
◈ 안개 낀 항구
안개 낀 항구에
등불 하나
안개에 젖어서
멀리 보이네
등불은 떡국 집
유리 램프 불
뱃사람 혼자서
떡국을 먹네
뚜…
어디서 떠나가는
뱃고동 소리
안개에 젖어서
멀리 들리네
◈ 대불大佛 ㅡ 석굴암石窟庵
가까이 보이려면 우러러 눈물겹고
나서서 뵈올사록 후광後光이 떠오르고
사르르 눈을 뜨시면 빛이 굴窟에 차도다.
어깨 드오시사 연꽃하늘 높아지고
나한羅漢도 물러서다 가슴을 펴오시니
임이여! 큰 한 그 뜻은 다시 이뤄지이다.
◈ 집오리
때 묻은 쭉지 밑에 푸른 꿈을 안아두고
나날이 욕된 삶을 개천에서 보내건만
때때로 고개 비틀고 눈을 감고 느끼도다
몸이야 더럽혀도 마음만은 아껴 가져
슬픔도 외로움도 달게 받아 겪었거니
목 메인 그 우름소리 어느 날에 그치려나
◈ 어머님
이 아닌 밤중에
홀연히 마음 어려져
잠든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보다
깨시면 나를 어찌나
손 아프게 여기실고
◈ 항아리
종일 시내로 헤갈대다 아자방(亞字房)에 돌아오면
나도 이미 장(欌)안에 한 개 백자(白瓷)로 앉는다
때 묻고 얼룩이 배인 그런 항아리 말이다.
비도 바람도 그 희끗대던 진눈개비도
누누(累累)한 마음도 담았다 비운 둘레
이제는 또 뭘로 채울건가 돌아도 아니 본다.
◈ 어무님
늙으신 어무님은 나만 보고 언정하고
안해는 그 사정을 내게 와 속삭이다
어찌누 그는 남으로 나를 따라 살거니
외로신 어무님은 글안해도 서럽거늘
안해를 가진 맘이 금 갈까 삼가로워
이 밤을 어서 새우고 그를 가서 뵈리라
◈ 측(厠)
여기는 먹고 마신 것이 오장과 육부를 거쳐
살과 피와 뼈가 되고 그 나머지를 배설하는 곳
다음 끼니 다시 먹고 땔 것을 구하여
내 어디론지 분주히 쏘대다
여기 잠시 들르면 마음 그지없이
편안히 쉬이도다.
그 지독한 식욕의 주구되어
날만 새면 거리에 나와
내 그들과 더불어 장도림 같이 떼제치고
의리를 눈 감겨 온갖 거짓을 팔고
차마 말 못할 그 모욕에도 다시 가유를 사고
날이 저물어 산 그림자
이 무거운 가슴 덮어 내리면
기다림과 주림에 겨운 파리한 가권들이
창을 내다 웅크리고 앉았을
이 게딱지같은 오두막을 향하여 돌아오다.
이미 먹은 것은 흉측한 악취와 함께
이렇게도 수월히 쏟아버릴 수 있건만
눈에 헛것이 뵈는 주린 창자를 채우기에
또한 염치없이 떨리는 헐벗은 종아리를 두르기에
나날이 저질러 지은 이 끝없는 죄고들로
저 크나큰 어두움에 짙어오는
무한한 밤을 휘두르는 한 점 반딧불처럼
아직 내 염통에 한 조각 남은 양심의 섬광에
때로 추상같이 준열한 심판을 받는 이 업보는
오오 분뇨처럼 어드메 터뜨릴 곳이 없도다.
◈ 다섯 개의 항아리
목말라 목말라 받아마신
진하고 착한 아편은
그 중독도 물밀듯이 향기롭다.
하나는 가슴을 풀어내놓고
상스럽지 않을 만큼 부끄럽다.
대추씨만큼 부끄럽다.
하나는 한쪽 볼기를 까고
남루한 예절마저 벗어놓고
고개 숙여 능청스레 앉아 있다.
하나는 나비수염 눈썹이다가
젖꼭지를 물었던 모란꽃이다가
문득 구름이 되고 싶다.
하나는 녹슨 쇠둥지
알을 까고 나오는 새가 되다가
그 녹아내린 어깨 너머
산을 뿌리 뽑아 짐지고 온다.
하나는 마지막 하나는
어느 어슴푸른 달밤
그 달무리 싸늘한 비수를 밟고
은빛 박쥐 떼로 춤추며 온다.
모두가 모두 물찬 알몸이다.
시큼하고 참한 아편은
그 중독도 눈부시게 싱그럽다.
◈ 옥적玉笛
지긋이 눈을 감고 입술을 추기시며
뚫인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즉일 때
그 소리 銀河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千年을 머금은 채
따수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하리오
◈ 大佛 - 석굴암
가까이 보이려면 우러러 눈물겹고
나서서 뵈올사록 後光이 떠오르고
사르르 눈을 뜨시면 빛이 窟에 차도다
어깨 드오시사 연꽃 하늘 높아지고
羅漢도 물러서다 가슴을 펴오시니
임이여! 큰 한 그 뜻은 다시 이뤄지이다
◈ 雅歌 其 - 아사녀의 노래
지금도 지금도 그리움 있으면 影池가로 오너라
그날 지느러미처럼 휘날린 내 치맛자락에
산산이 부서지던 구름발 山그림자 그대로 있네.
아무리 굽어봐도 이는야 못물이 아닌 것을
그날 그리움으로 하여, 그대 그리움으로 하여
내 여기 살도 뼈도 혼령도 녹아내려 질펀히 괴었네.
보곺아라, 돌을 깨워 눈띄운 신기한 증험!
十里 밖 아니라, 千里 밖 萬里 밖이라도
꽃쟁반 팔모 난간 층층이 솟아, 이제런듯 완연네.
千年 지난 오늘, 아니 더 오랜 훗날에도
내 이대론 잴수 없는 水深의 그리움이기에
塔보다 드높은 마음, 옮겨다 비추는 거울이 되네.
지금도 지금도 늦지 않네, 영지가로 나오너라
시시로 웃음살 주름잡는 山그림자 속에
내 아직 한결같이 그날 그 해질무렵 받고 있네.
◈ 백자부白磁賦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白鶴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끝에 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달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아래 비진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不老草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속에 구어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純朴하도다
◈ 홍매유곡도紅梅幽谷圖
네 몸은 뼈만 앙상, 타다 남은 쇠가치
휘틀린 등걸마다 선지피 붉은 망울
터질 듯 맺힌 상채기 향내마저 저리어라.
여기는 푸른 달빛, 희부옇던 눈보라도
감히 오지 못할 아득히 외진 골짝
저 안에 울부짖는 소리 朔風만은 아니다.
文明의 살찐 과일, 이미 익어 떨어지고
꾀벗은 푸성귀들 빈손으로 부비는 날
참혹한 難을 겪어낸 못자욱을 남기리니.
차웁고 매운 말씀, 몸소 입고 나와
죽었다 살아나는 너 異蹟의 동굴 앞에
더불어 질긴 그 목숨 새겨두고 보잔다.
◈ 포도인영가葡萄印靈歌
아픔을, 손때 절인 이 적막한 너희 아픔을,
잠자다 소스라치다 꿈에서도 뒹굴었다만
외마디 끊어진 신음, 다시 묻어오는 바람을.
풀고 풀어볼수록 가슴 누르는 찍찍한 붕대 밑
선지피 얼룩진 한송이 꾀벗은 葡萄알!
오늘이 오늘만 아닌 저 끝없는 기슭을 보랴.
◈ 비취인영가翡翠印靈歌
본디 끝없다가 또 다른 모양을 금긋던 部分
이렇게 한 結晶으로 돌아온 내 슬픈 비눌이여
깊은 밤 미친 풀무질 속에 녹아나온 혼령이여.
하늘 푸르른 거미줄에 걸려든 진사辰砂 꽃잎!
다시 어느 無限으로 잘려간 저 구름의 꼬리
무너진 너의 잠적을 찾아 구조안에 머무느냐.
◈ 백자白磁
雨氣를 머금은 달무리
市井은 까마득하다
맵시든 어떤 品位든
아예 가까이 오지 말라
이 적막寂寞 범할 수 없어
꽃도 차마 못 꽂는다.
◈ 현신現身
한자리 내쳐앉아 생각는가 조으는가
억겁도 일순으로 향기처럼 썩지 않는 말씀
돌조각 무릎을 덮은 그 無名 石手의 손에.
얼마를 머뭇거리다 얼룩 푸른 이끼를 걷고
속살 부딛는 光彩로 눈웃음 새겨낼 때
이별도 再會도 없는, 끝내 하나의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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