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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겨자씨 - 예화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09. 6. 27.


국민일보 겨자씨 - 예화 모음




본회퍼의 회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는 전쟁에 미친 히틀러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친 운전사가 차를 마구 몰며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습니다. 자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차에 올라타 그 미친 운전사를 끌어내려야 합니까?" 그는 이 유명한 비유를 암살 기도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체포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가 죽기 전 히틀러가 하늘의 심판대에서 절규하는 꿈을 꾸었다. "세상에 있는 동안 이런 심판에 대하여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어요. 너무 가혹합니다." 꿈에서 깬 본회퍼는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고 한다.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한 것보다 복음을 전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어둠을 이기는 수단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것이다. 자아실현, 가정 행복, 그리고 사회정의까지도 복음으로만 가능하다. 예수 복음을 나누는 것이 우리 인류의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
담대한 믿음으로
 
환란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병에 걸리거나 돈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가족이 아프거나 사고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유명한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는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나치가 패망하기 1주일 전에 사형장으로 끌려 갔다. 그때 그는 교도관에게 "이것이 내 인생의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시작이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누구나 겪는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의 순간을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바라보는 담대한 믿음이 아닌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세상 어떤 위기보다 주님의 능력이 더 많고, 어떤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우리 삶을 위협할지라도 죽음조차 이기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절실한 때다.




고쳐 쓰시는 하나님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장점을 이용하실 것이다. 키 큰 사람을 키 작은 사람보다 운동선수에 더 많이 사용하실 것이다. 건강한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귀하게 쓰실 것이다. IQ가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점이 불행거리와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의 죽음도 결국 그의 수려한 용모와 자랑스러운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삼손의 실패도 결국 그 힘 때문이었다. 겸손하게 여기지 않으면 장점만큼 큰 단점도 없다. 장점은 겸손할 때에만 장점이지, 때로는 엄청난 단점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고쳐 쓰는 즐거움을 아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에 있다. 겸손한 병든 사람을 고쳐서 쓰신다. 겸손한 지혜 없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사용하신다. 겸손한 실패자를 재기시켜서 사용하신다.




교회의 의미
 리처드 하버슨은 이런 말을 했다. "맨 처음 교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친밀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관계를 가졌다. 이 관계는 그들과 그들 주변의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 다음 교회는 그리스로 건너가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 나중에 교회는 로마로 넘어가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 교회는 유럽으로 퍼져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나의 기업이 되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많은 교회를, 그러나 너무나 적은 친교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한국 땅에 온 교회의 의미는 무엇일까. 철학, 제도, 문화, 기업…그리고 대기업?. 이 모든 것도, 그 중의 하나도 아니다. 세상은 바뀌고, 환경도 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교회는 교회여야 한다'는 대원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실한 청지기, 타자를 위한 존재, 희망의 공동체, 구원의 방주 등 다양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진달래 화음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일부다. 우리의 땅 영변은 진달래 대신 '핵시설' 뉴스가 오르내리는 진원지가 돼버렸다. 죽음의 핵무기 대신 온 겨레가 소망하는 생명의 꽃이 다시 심겨질 날을 기대해본다.

'영변에 약산 빈달배기 참꽃 한 보뎅이 따더 내재는 질라루 훌훌 뿌레 줄기래요(강원도)'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가득 토당 가고정헌 질에 지져밟고 정이 살페 가시우야(제주도)'

'거시기 약산에 참꽃 허벌라게 따다가 마리시롱 가는 질 가상에 뿌려줄라니께(전라도)'

'영변에 약산 참꽃 한거덕 따다 니 가는 길에 뿌려주꾸마(경상도)….'

정겨운 사투리 버전 속에 진달래의 희망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남북 강산에 피어나는 날은 언제쯤일까. 하늘은 스스로 꿈꾸는 자를 돕는다. 그 꿈은 우리 모두를 위한 평화의 꿈이다.




오바마와 창조원칙
 흑인 소녀 브라운은 1마일이나 떨어진 초등학교에서 가까운 학교로 옮기려다가 피부색 때문에 거절당했다. 1954년 5월17일은 그로 인한 소송에서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날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색깔들 중에 흰색이 검은색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64년에는 흑인의 참정권을 보장한 민권법이 제정됐다. 이후에도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인종에 대한 편견은 사라져 갔고, 마침내 2008년 11월4일,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예수 안에서 하나다(갈 3:28). 인종과 신분, 성별에 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똑같이 존중받는 것이 창조원칙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원칙을 회복하는 쪽으로 끊임없이 역사를 바꾸어 가신다. 역사의 무대에서 쓰임받는 사람들은 이러한 창조원칙 회복에 가담하는 자들이다.




선교사의 다짐
 
최근 중앙아시아 K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집을 방문했다. 그 집 화장실 벽에 붙여놓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가라/그들 가운데 살라/그들로부터 배워라/그들을 사랑하라/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그들이 갖고 있는 것들 위에 세우라/그러나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그들의 일이 성취되었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말하게 한다."(중국의 시)

이 글은 그 선교사의 다짐이었고 결단이었다. 그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땅으로 갔다.

그는 살벌한 위협과 방해 가운데서도 전도했고 그들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믿음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아낌없이 넘겼다. 오늘도 땅끝에서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교사들을 축복한다.




남북 기독인의 기도
 
반세기 전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했을까. 남북 그리스도인 400명이 평양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날을. 지난 4일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평양에서 있었다. 평양 봉수교회 담임목사가 사회를 보고 남한교단 총회장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북한 측이 준비한 포도주와 남한에서 가져온 빵으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성찬식도 갖는 감격을 누렸다. 북한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성가대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며 한마음이 됐다.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남북 관계가 많이 경색돼 있다. 하지만 남북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도가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끊임없는 기도는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리라 확신한다.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눅 18:1∼8).






수치를 굴려 버려라
 
습관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의 90%가 습관이란다. 10%의 시간만 내 의지로 통제 가능하고, 나머지는 무의식적 습관에 따라 산다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무서운 리모컨에 의해서 우리 모두는 조종당하고 있는 셈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습관적인 노예근성을 제거하는 데만 40년이란 긴 시간을 소비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던 이 근성을 해결하지 못하면 새 땅에서의 성공적인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정복전쟁을 치르기 전에 이스라엘이 했던 집단행동은 바로 할례였다(수5). 전술을 논하고 무기를 가다듬는 식의 전쟁 준비가 아닌,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는 성결의식이었다. 인생을 바꾸려면, 의도적으로 일상습관을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 '성결'이 우리의 가장 큰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돈
 
유대인은 재물을 모으는 일에 천부적이다. 유대인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유대인 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돈이 뭐예요?"

아버지는 "잘 봐라"하면서 유리 조각을 집어 창문 앞에 놓았다. 아이는 유리를 통해서 길이며 행인이며 마차를 볼 수 있었다. 이어서 아버지는 "이제 돈을 잘 봐라"하더니 "유리 조각 대신 돈을 여기에 놓겠다. 은화 때문에 거리 풍경은 하나도 안 보이고 돈만 보이지"라고 말했다.

돈 앞에서 다른 것은 하나도 볼 수 없다. 오직 돈만 보인다. 돈을 모으려는 사람들은 돈에 눈이 머는 경우가 많다. 돈에 눈이 멀게 되면 세상의 장님이 된다. 돈 빼고는 잃는 것이 너무 많다. 그 치명적인 흠으로 부터 벗어 나려면 돈 버는 것과 나눠갖는 것에 두루 눈을 돌려야 한다.




금강 알프스
 
알프스는 세계의 명산이다. 그 위용과 수려한 자태가 세계인의 심신을 빨아들인다. 우리 땅에도 알프스 못지않은 산이 있다. 바로 금강산이다. 남북의 인적 교류가 가장 먼저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알프스 못지않게 아름답다.

한때 금강산 자락에는 믿음의 조상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나라의 축복을 염원하며 기도하던 '금강산기독교수양관'이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인도로 200여명이 모여 밤새워 기도의 불꽃을 모았던 장소였다. 근방에는 현재 남북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 손을 맞잡고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만남의 집이 세워지고 있다.

남북의 신앙인들도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을 품기 바란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나아가 남북통일과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해 함께 두 손을 모으는 기도의 집이 들어서는 날을…. 그러기 위해서는 중단된 금강산 관광이 하루빨리 재개되어야겠다. 




회복되는 경제원리
 
몇몇 경제 대국들이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경제를 제창했다.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든 것이다. 그 결과, 시장은 인류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를 좌우하는 중심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무한 자유를 한손에 거머쥔 거대한 시장이 중병에 걸리게 되자 세계인들도 모두 죽게 되었다. 이 세계시장이라는 병든 우상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치유받은 중풍 병자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중풍에 걸려 스스로 이동조차 할 수 없었던 환자가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

중풍병처럼 위기에 빠진 세계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붕을 뚫고 침상을 내려준 친구들처럼 세계의 모든 나라가 협력해서 새로운 경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만 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경제원리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 길만이 인류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위기 속 희망
 
평생 심혈을 기울여 가꿔온 교회를 멋지게 제자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신 목사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함께했던 소수의 젊은 목사들에 대해 "안쓰럽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이 목회할 때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장 무드에 있었고, 성도들이 순수하고 마음이 부드러워 목회자를 믿고 잘 따랐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은 성장이 멈췄고 오히려 고속 성장 이후 여러 문제들이 드러난 상태라 성도들이 더 이상 순수하게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해야 하니 젊은 목회자들이 "안쓰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위기가 기회라 하셨다. 진실한 목회자들을 통해 교회가 정화되고 새롭게 일하실 하나님의 희망을 본다는 것이다.

당면한 위기 가운데서도 주님의 주 되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말씀으로 생기를 얻어 마른 뼈가 살아나는 기적(겔 37:1∼10)을 맛봐야 할 것이다. 




평화 지키기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일본헌법 9조 중)

일본 헌법은 9조에 전쟁 포기와 군사력 보유 금지를 규정해 '평화헌법'으로 불린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전국인 미국이 일본에 대해 전쟁과 평화 파괴의 책임을 물어 이 조항을 헌법에 포함시키고 군정을 마쳤다. 일본의 대외 침략 기도를 억제하고 동북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보유, 국가교전권까지 포기하도록 만든 것이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일본 내부에서는 군국주의 경향이 짙어지면서 이 조항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일본의 교회들은 개정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도쿄를 중심으로 평화헌법 개정 반대 기도회와 모임을 갖고 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마 5:9). 




염려는 잘못된 믿음
 
강도가 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몇 년째 잠을 편히 못 자는 여성이 있었다. 조그마한 소리만 들려도 한밤중에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는 통에 남편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드디어 어느 날 밤, 자다가 집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말로 강도가 들어와 있었다. 그 남편은 강도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시오. 만나서 반갑소. 위층에 올라가 내 아내를 좀 만나주시오. 10년째 당신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염려는 말썽이 생기기도 전에 말썽이 생길 거라고 믿는 잘못된 믿음이다. 사람들의 염려는 한도 끝도 없다. 예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날에 필요한 만큼의 힘을 주신다. 궂은 날이 올까, 맑은 오늘부터 미리 염려하지 말라. 만일 궂은 날이 오더라도 비는 피하면 되는 것이다.


희망광장
 
지난 4년 동안 출근한 광화문 사거리의 감리회관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한눈에 보는 전광판과 같은 곳이다. 아침에 출근하면 사무실에서 바라다보이는 청와대를 향해 한번쯤 두 손을 높이 든다. 그곳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하리라는 마음에서 축복을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태평로라는 길 이름에 그 의미가 담겨 있다.

광화문 광장은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승리의 함성이 울리던 곳이고, 우리 사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촛불을 들고 탄원하던 곳이며, 국가의 경사가 있을때 온 국민이 모여들던 곳이다. 나는 우리 감리교회의 본부가 있는 너른 마당을 '희망광장'으로 선포한 일이 있다. 우리의 앞마당이 희망의 산실이 되어 시민의 광장, 평화의 광장, 세계의 광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제 내일부터 이곳에 출근할 일이 없다. 그러나 여기 희망광장으로부터 상생의 함성, 희망의 함성이 울려퍼지길 늘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맘 놓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축복의 사명'은 죽는 날까지 감당할 것이다. 




종교개혁은 진행형
 
역사는 기억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샘이다.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도 있지만, 사건의 흐름 속에 담긴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의 역사가 있다. 전자는 기억하고 파악하는 것으로 족할지 모르지만, 후자는 오늘의 삶 속으로 가져와 소화하고 생수처럼 마시고 힘을 얻어 결단하고 행동하는 밑거름이 되게 한다.

종교개혁 사건은 역사적 유물도, 박물관의 전시물도 아니다. 종교개혁은 이어져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중세 기독교의 기독교답지 못한 타락과 허물이 종교개혁의 현장이었다. 개혁을 외치며 개혁의 분신으로 자처하며 태어난 '개신교'가 어느새 개혁의 대상이 된 듯하다. 이럴 때일수록 외부의 개혁 요구에 자기방어로 맞서기보다는 하나님이 준엄하게 명하시는 '항상 개혁하는'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개혁하는 교회를 먼저 선택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은총이다.





광풍을 잠재우는 리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바울은 일어나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외쳤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로마까지 안전하게 인도될 거라는 확신을 얻었던 것이다. 바울은 도망가려는 사공들을 제지했고,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며 거듭 구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 또한 바울을 믿고 따르며 안심하고 음식을 받아 먹었다. 결국 바울의 확신처럼 모두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세계적 경제 위기라는 광풍을 만났다. 이러한 때일수록 바울처럼 위기를 돌파해나갈 지도자와 지도자를 향한 국민들의 신뢰가 필요하다. 위기 속에서도 살 길을 찾아 희망을 제시하는 지도자와 그를 믿어주는 구성원들이 있는 공동체는 망하지 않음을 광풍을 만난 바울과 배에 탄 사람들을 보며 배워야 하겠다.




마음의 재벌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 부부의 아름다운 기부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결혼 후 매일 1만원씩 모아 결혼 일주년이 되던 날에 365만원을 노숙인들에게 기부하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며 섬겼다. 첫 동반 광고 수입도 전액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현재 100명의 해외 빈곤 아동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매달 한 어린이당 3만5000원씩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기부를 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재벌이라 돈이 많아서 그러겠지'하고 생각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 부부는 아직 자기 집도 없고 미래를 위해 적금도 든 게 없다고 한다.

방송 진행자의 말처럼 "재벌은 재벌이되 마음의 재벌"인 셈이다. 우리 사회에 흉흉한 소식들로 마음이 점점 얼어붙어가는 요즈음, 따뜻한 남풍같이 느껴지는 '마음의 재벌'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불안이 쌓아올린 유산
 
인류 역사상 유명한 건축물들은 불안 해소를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졌다. 만리장성은 황제의 정치적 불안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도 흩어짐에 대한 불안해소를 위해 쌓기 시작한 탑이다. 내 주변에 누군가가 모여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모아 놔야 안심할 수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 때문이다.

흩어짐은 두렵다. 외롭고, 불안하며,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강해질수록 모아 놓은 것을 지키기 위한 성벽도 비례해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불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현상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만, 제대로 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하다. 무언가 쌓아 놓을 생각 대신 하나님과 화평 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삼 세번의 미덕
 
한국인들은 수많은 숫자 가운데 특히 '삼'자를 좋아한다. 작심삼일, 삼천리, 삼척동자, 3부작, 삼총사, 삼종지도, 3등칸, 일일이 여삼추 등. 삼은 통합과 균형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한다. 석 삼, 셋, 세 번째란 수가 주는 안정감은 마치 세 개의 다리를 지닌 솥발의 균형을 연상시킨다. 압축된 요점을 손쉽게, 간단히 전달할 때도 세 가지로 요약하길 즐겨한다. 3대 과제, 3대 지표, 3대 정신, 3D 산업, 3S의 삶의 방식, 21세기 3F 특징들이 좋은 보기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잘못했을 경우에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했다. 당시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고, 외경 집회서에도 두 번까지 관용을 베풀도록 한 점으로 미루어 베드로의 물음은 파격적이다. 그런데 언감생심,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셨다.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세 번쯤 참아주는 '삼 세 번의 미덕'이 필요한 시절이다.





이름값
 
최근 교황청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여호와)'를 공식 예전이나 공공예배에서 함부로 쓰지 말도록 지침을 내렸다. 대신 '주님'이라는 표현을 쓸 방침이라고 한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하신 뜻을 히브리어로 모음 없이 자음으로만 쓴 게 'YHWH'인데 이것을 각국어로 조금씩 달리 발음하다 보니 우리말로 '여호와'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그런 발음조차 삼가며 "아도나이(주님)"라고 부르고, 헬라어로 쓰인 신약에서는 "키리오스(주님)"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 신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예배의 주인을 도구로 삼는 것은 큰 죄악이다.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대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 값을 매기게 하자. 차명과 가명을 버리고 진실하고 투명하게 '나는 나'임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화이부동
 
가정이든 나라든 구성원간에 갈등이 팽배한 사회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반면 서로를 존중하고 화합하는 모습은 성숙한 가정, 선진국의 조건이 된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남과 화합은 하지만 흔들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진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취할 태도 중 하나가 바로 이 화이부동적 삶의 자세이다. 진리를 만난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지 않다. 포용과 관용으로 상대방을 품는 여유와 깊이가 풍겨난다.

이번주 서울 성북동에서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와 길상사, 성북동성당이 연합으로 이웃돕기 바자회를 개최한다. 서로 다르지만 사랑으로 함께할 수 있는 봉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마음을 품고 온 교우들이 참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것으로 기대하며 지역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기도하고 있다.





탐욕의 무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공급을 경험하며 기적과 더불어 살았다. 하늘양식 만나를 매일 아침 공급받았고 반석에서 터져나온 생수를 마셨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며 감사하기보다 고기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과거의 애굽 종살이를 미화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광야의 메추라기를 몰아주었지만 결국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그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욕심을 내었던 자들이 그 광야에서 장사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장소를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 칭하게 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넉넉한 자들이 작은 것을 탐하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빈곤 퇴치는 사명
 
세계경제가 향후 몇 년 동안 지금보다 악화될 것이라는 보도가 연일 이어진다. 미국 집값의 거품 피해가 당사자들을 넘어서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마 25:37∼38)로 더 고통을 받게될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세계빈곤퇴치의 날이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천사의 손을 의미하는 '화이트 밴드 감기' 모임이 열린다. 국민 소득의 0.7%를 가난한 나라에 원조하자는 세계적인 합의가 있지만, 우리나라 원조수준은 0.06%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양 손을 만드신 이유는 한 손으로는 열심히 벌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베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넘치는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모든 착한 일도 넘치도록 해야 할 때이다(고후 9:8).





하나님이 쓰시는 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있다. 정말 흉측하게 생겼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진 이유를 듣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의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연습으로 발레신발 150여 켤레를 닳아 떨어뜨린 연습벌레의 발이었다. 연습과 공연 때면 그녀의 발가락은 갈라지고, 물집 잡히고, 곪는단다. 그렇게 흘러내린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2ℓ짜리 생수병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뭐가 이토록 그녀를 발레에 미치게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발 모양이 따로 있다. 먹거나 희생 제물로 쓸 수 있는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발의 모양에 있었다(레11장). 굽이 갈라진 발이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삶과 구분된 헌신의 발을 뜻한다. 여호와 앞에 갈라진 발. 갈라지고 물집 잡히도록 전적으로 헌신하며 뛰어다니는 열정이 만든 발. 그런 발을 필요로 하신다.




인생의 진화
 
인간은 갓난아기 때 단맛을 먼저 알고, 짠맛, 신맛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쓴맛을 배운다고 한다. 독성이 있는 물질에 들어있는 쓴맛을 가장 늦게 배우는 이치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가장 늦게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는 셈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잇값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기의 책임의식보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에게 잘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 그것을 남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에 기쁨과 평화,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남을 탓하는 것은 유치한 태도이다.

옛 말에 화복동문(禍福同門)이라고 했다. 화와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다는 말이다. 사실 내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바로 내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 안에 뿌린 사랑의 결실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진화한다. "믿음은 살아 있고 배우는 공동체 속에서 영속된다."(알브레히트 쉔헤르)





위기와 신앙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세계 금융시장의 산실이다. 철옹성 같고, 무소불위의 금권을 자랑하던 현대판 레비아탄(악마, 또는 괴물)이 휘청거린다. 거대 강국인 미국이 7000억달러의 금융구제안을 내놔도 정상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야단법석이다.

뉴욕의 금융위기 강풍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한국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하지만 강풍을 가라앉힐 만한 묘약이 안 보인다. 구제금융 금액이 적어서도 아니고, 돈이 없거나 물건이 없어서도 아니다. 심리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신뢰의 부족 또는 불신 탓이다. 다시 말해 신뢰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몸과 영혼을 맡길 수 있는 신뢰의 힘에서 나온다. 인간세계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동시에 역사를 초월해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확고한 신앙만이 살길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찾고, 구하고, 그 문을 두드리면 된다. 지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경제
 
성경은 물질을 배척하지 않는다. 대신 그 물질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를 중요시 여긴다. 하나님 대신 물질을 의지하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에 대해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라고 정의한다(눅 12:20). 모든 재화(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청지기일 뿐이다. 제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고, 잘나가는 듯해도 주인을 속일 수 있는 청지기는 아무도 없는 법이다.

월가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며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의 철옹성은 주저앉았다. 그들을 향한 세계인들의 '믿음' 역시 무너졌다. 분수를 넘어선 부(富)의 독점과 대다수 사람들의 가난과 굶주림을 외면한 월가와 자유방임주의 경제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이제는 모래 위에 집을 쌓는 허사를 버리고 진실과 신용의 반석 위에 새 집을 지어야 할 때다. 제3의 길을 모색할 때인 것이다.





작고 사소한 죄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 유리창도 깨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된다. 이것을 소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라 한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발표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다 보면 더 심각한 범죄가 생겨난다는 것, 사소한 실수를 제때 고치지 않으면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사소한 죄를 가볍게 여기다보면 큰 죄를 불러오게 된다. 이 원리는 미시적으로 대인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거시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통용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는 성경의 경고에 귀기울여야 할 것 같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되느냐를 두고 수정란, 배아줄기 세포 생성, 인간 형체 형성, 출산 이후라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다. 하나님의 것인 생명을 나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제 마음대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의 생명을 세상 천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셨다(막 8:36). 내 생명이든, 남의 생명이든 죽여선 안된다. 생명은 일단 훼손되면 인간 능력으로는 회복시키거나 대체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기 연예인의 자살로 지난 주간 내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아직도 세상은 테러와의 전쟁, 범죄에 의한 죽음이 여전하다. 빛도 못보고 죽는 낙태아 때문에 안타깝고, 세계 사형폐지의 날(10월10일)인 오늘도 사형수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생명이 공학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평화의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요 10:10).



감사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감사다. 감사는 한 마디로 '과분한 마음'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을 자신의 투자나 능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에서 감사의 정신은 출발한다. 그러기에 갑작스러운 횡재나 행운은 감사의 요건이 못된다. 오히려 감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간 이들에게 적절한 덕목이다.

성숙한 영적 열매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는 연습량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고 기능공은 훈련의 반복에 따라 성취 여부가 결정되듯, 그리스도인의 감사 역시 훈련이 필요하다. 특히 행복에 겨울 때보다 시험과 어려움 속에서 더 잘 연단된다. 그러기에 감사는 자기 자신의 고마움으로 그칠 수 없다. 내 가정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향해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이 감사다.





만족할 수 있는 길
 
6·25 직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70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재는 거의 2만달러로 300배 가까이 잘 살게 됐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300배의 만족을 느끼며, 마음이 풍요로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300배의 풍요는 있어도, 오히려 마음은 더 빈곤해진 것 같다.

자살로 죽는 인구가 교통사고로 죽는 인구보다 더 많다는 통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다. 자기가 필요한 정도를 적당 선에서 정해놓지 않으면 우리의 소유욕은 끝이 없이 자란다고 한다. 많이 벌어 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비천과 풍부는 절대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에 달려 있다. 고무줄같이 늘어나는 가변적인 기준이 문제다. 채워서 만족하려 들지 말라. 나만의 기준을 빨리 정하는 게 만족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죽음의 죽음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켜 '죽음을 죽이고' 이긴 것이라고 했다.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을 죽인'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의 죽음'은 강력한 부활의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은 뒤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교두보일 뿐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이 땅의 생명과 하늘의 생명을 연결하는 다리다. 그 다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땅에서 복되게 사는 웰빙(well-being)과 함께 하늘 생명을 향한 복된 죽음(well-dying)이 값진 삶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이다. 요즘에는 우울증으로 통한다. 불안이나 우울증은 홀로 살면서 걸리는 질병이 아니다. 함께 살지만 잘못 살기에 생긴다. 우울증을 죽일 수 있는 약은 기쁨의 상생이다. 신앙은 상생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우리도 함께하는 복음이다.






생명사랑 밤길 걷기 운동
 
2006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헝가리에 이어 세계 2위 자살국이 됐다. 한해 1만688명이 자살을 한다니 하루 28명, 51분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이다. 이 같은 높은 자살률은 이제 자살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자살은 우리 사회 전체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풀어야 하는 공동체적 과제가 된 것이다. 심각한 자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없다면 한국 사회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잊혀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10월10일 저녁 7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리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 운동은 좋은 캠페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밤길을 걸으며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인생의 밤길을 헤치고 희망의 새아침을 맞는 생생한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캠페인과 운동이 사회 곳곳에서 펼쳐져 자살 예방과 함께 생명존중의 문화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거룩한 투쟁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톱스타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감당했어야 할 삶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사랑하는 아이들과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펴져가고 있는 자살 문화에 분개를 느낀다. 심리사회적으로나 경제사회적 요인으로 자살의 증가를 분석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생명 경시의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영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는 자살 문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거룩한 투쟁을 해야 한다. 지치고 힘든 영혼들이 마실 수 있는 생명의 맑은 샘물을 보다 적극적으로 흘려보내는 신성한 노력을 해야 한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구세군 선교 100년
 
120여년 전, '영혼을 찾아 세상으로 가라. 그것도 가장 악한 사람에게 가라'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구원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이 뜨거운 마음은 영국 전역에 부흥회와 전도집회를 불러 일으켰고, 빈민가의 고통받는 자들을 섬기는 데로 향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구세군(Salvation Army)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구세군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선냄비'부터 떠올린다. 그래서 구세군을 복지기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교회 수보다 구세군 산하 사회봉사기관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구세군은 교회다.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고 고백하며 부흥과 봉사라는 두 바퀴로 고통받는 자들을 향한다(딤후 2:3). 우리의 신앙을 풍성하게 만들어 온 구세군대한본영의 100주년을 축하한다.





안전이라는 미신
 
인생에서 위험은 어디에든지 있다. 만일 살면서 어떠한 위험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다음의 것을 꼭 지켜라.

①자동차를 타지 마라-사망 사고 원인의 20%나 된다. ②비행기나 기차나 배로 여행하지 마라-모든 사고의 16%를 차지한다. ③거리를 걸어다니지 마라-모든 사고의 15%가 거리에서 일어난다. ④집에 있지 마라-모든 사고의 17%가 집에 있는 중에 발생한다. 인생에서 안전한 장소는 아무데도 없고 위험 부담이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미신이다. 위험을 피하는 것이 감수하는 것보다 안전하지 않다. 인생은 대담하게 모험을 하든지,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당신의 지금 목표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인가? 만약 있다면, 그 다음은 걱정하지 마라. 그냥 움직여라. 나머지는 주님께서 책임지신다.




교회의 타락
 
요즘 교회에 대한 시비가 많다. 엄격해진 잣대는 교회에 대한 기대와 책임 때문이다. 교회가 가난할 때는 우호적이지만 힘이 있어 보이는 지금 더 이상 양해받을 여지가 없어 보인다. 많은 교회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교회는 마치 부자처럼 인식되고 있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교회의 타락은 거룩함보다 물질이 평가의 기준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연약함보다 힘을 숭상하고, 가난보다 부유함을 선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홀히 여기게 된 까닭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빌 2:5)





신앙의 균형
 
독일 라이프치히의 양대 명물이 있다. 촛불기도회로 독일 통일의 초석을 이룬 니콜라이 교회와 성 토마스 교회다.

전자가 교회의 역사 참여를 보여준 대표적인 증거라면, 후자는 교회 영성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유명한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생애 마지막까지 26년 동안 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140여 편의 칸타타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내놓은 곳이다. 바하의 무덤도 교회 본당에 있을 정도다. 교회음악의 산실이다.

라이프치히에는 균형이 있다. 두 교회는 기독교 복음 선교의 양축을 대변한다. 봉사와 예배, 참여와 영성, 일과 기도,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세상 속으로'와 '하늘을 향하여', '사이'와 '넘어서' 등. 라이프치히를 찾는 이들에게 두 교회는 최고의 신앙 학습 장소다. 한국 땅에서도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고 싶다.





‘분열 50년’ 참회의 기도
 
지난 24일 저녁 7시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단지 내 컨벤션홀. 장로교 4개 교단 목사, 장로 4000여명과 현지 성도 1000여명이 연합 예배를 드렸다. 교단 간 연합뿐만 아니라 장로교단 분열 50년을 참회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은혜롭게 예배가 진행되던 가운데 사회자가 즉흥적인 제안을 했다. 4개 교단 교단장과 임원을 비롯한 연합기관 지도자, 교계 지도자 100여명을 단상에 올라오게 한 것이다. 단상에 올라온 사람들의 죄가 누구보다 크다며 무릎을 꿇을 것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무릎을 꿇은 100여명의 교계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연합 예배 장소를 뜨거운 참회의 장소로 바꾸었다. 이들은 신사참배와 교단 분열의 죄를 회개하기도 했다. 장로교 4개 교단의 참회가 갈라진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부흥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은 바로 이 같은 마음을 찢는 참회에서 시작됐다.





마음의 원칙
 
지혜로운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말합니다. "얘야, 사람 안에는 늑대 두 마리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한 놈이야. 그놈은 화를 잘 내고 늘 싸우기를 좋아하고 용서할 줄 모른단다. 다른 한 늑대는 착한 놈이지. 이 착한 늑대는 매우 친절하고 사랑스럽단다. 이 두 마리의 늑대가 네 안에도 있단다."

깜짝 놀란 손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할아버지께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럼 내 안에 있는 늑대 두 마리가 싸우면 어떤 늑대가 이기죠?"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말합니다. "그야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생각과 언어를 입력하는가가 마음의 습관을 결정하고 그 마음의 습관이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은혜받는 비결
 
옛날 집에서는 마당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부엌 물통에 채워넣곤 했다. 한 양동이가 불평을 늘어놨다. "아무리 물을 퍼 담으면 뭐 해. 열 걸음도 못 가 물통에 부어버리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러자 다른 양동이가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다. 나는 열 걸음만 옮기면 다시 가득 채워지는데…." 삶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짧은 예화다.

똑같은 인생을 사는데 한쪽은 탄식과 불평만 늘어놓고 산다. 손에 가득 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하늘에 쌓은 것이 아니면 모두 헛되고 헛되다. 반면 감사와 기쁨으로 삶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다. 주님은 그들에게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것을 모두 다 주셨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붓고 살자. 열 걸음도 안 되어 채워주신다(막 4:24).




하나님의 음성 듣기
 
빗길에 미끄러지던 트럭이 한 주택을 들이받았다. 구조대와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건현장에 도착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목격됐다. 야단법석인 와중에도 방에서 한 여성이 잠을 자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방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자, 그 여성이 벌떡 깨어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우리의 청각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들려오는 소리를 감지하는 일반적인 기능 외에, 듣고 싶은 소리만을 선별해서 듣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다.

듣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리 세미한 음성일지라도 듣고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듣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제아무리 청천벽력과 같은 큰 소리일지라도 결코 들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음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굳게 건 빗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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