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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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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제주도의 모습

by 石右 尹明相 2010. 2. 14.

 

 

100년전 제주도의 모습

 

어느날의 귀가

제주에서는 어디서나 한라산의 어진 능선이 지켜보고 있다.
구름이 산허리자르면 내일은 비가온다는데..., 말 등에 제 먹을 꼴 두어 단을 싣고 가슴 헤친채 귀가하는 할아버지는 마냥 한가롭기 만하다.(1949년)

 

朴宗實 상점

제주시 칠성골에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개점한 박종실상점. 제주에서 잡화류 소매상의 영역을 벗어난 종합무역상사의 효시였다 할 것이다.
붙여온 짐들,배달용 자전거 두 대, 이것들이 당시 제주의 상거래를 짐작케 하는 바 있다. 1931년 발간의(조선실업신용대감)에서 당시 박종실상점의 연간 거래액은 43,000원으로 단연 제주 1위로 나타나 있다.


제1훈련소의 체육대회

산방산(山房山)이 멀리 보이는 것으로 보아 모슬포의 제1훈련소 자리가 틀림없다. 여기서 체육대회가 벌어져 있고 부대끼리 응원도 뜨겁다.
주위의 천막들이 여러 개 처져 있는 것도 보인다.

 

시원하게 뚫린 제1횡단도로

아스팔트가포장이 된 횡단도로를 정기로선의 마이크로버스가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다. 나즉한 돌담 너머에 보리밭 빛깔이 싱거러워지고 있으나 한라산 정상 부군엔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서귀항 어선부두에서 바라본 한라산

썰물 때의 서귀항 어선부두가 자갈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천지연 입구의 절벽을 넘어 한라산의 느긋한 능선이 나래를 펴고 있다. 전설을 이고 있는 산, 아직 초봄인 듯하다.

 

원형 그대로의 모습들

차양이 넓은 벙거지 아래 멋대로 자란 수염은 원형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한 사람은 담뱃통 한사람은 지팡이를 쥐고 무슨 이야기들이 이리도 진지 할까.
갈잠방이 적삼에 단단히 맨 대님, 주위의 자연과 완벽하게 한통속이다.

 

제주의 어린 해녀들

나이 열일곱, 여덟쯤의 어린해녀들이다. 바닷가 마을 아이들은 대개 열대여섯부터 바다에 들어 물질을 했다.
이 무렵에 잘하면<애기상군> 소리도 듣는다. 족새눈에 망시리와 호미를 든 어린 해녀의 시선이 결코 만만치 않다.


일출봉에서 내려다본 성산포

일출봉의 거의 꼭대기 부근에서 성산포 마을을 찍은 사진이다. 바다가 호수처럼 들어와 있는 건너편에 식산봉(食山峰)이 앉아 있다.
굽이져 들어온 수매밑엔 작은 배 몇척, 퍽 환상적인 분위기 이다. 가까이는 일출봉의 기암들이 보인다.

 

제주도 부인들의 풍속

돌담장과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두여인이 옆모습과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다.
한 여자는 통이 깊은 구덕을 지고 있고 한 여자는 부려놓은 채 짐질 때 받치는 누비등반이 만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물질이라도 나가던 모양새다.

 

관덕정 처마밑 심방의 도랑춤

관덕정 처마 밑에서 심방의 도랑춤이 한참 신이 나 있다.
북과 대양을 가지고 주춤앉은 소무들이 신명을 돋구고 있고 구경꾼들의 표정도 진지하다.
관덕덩 건물 아래 늘어서 있는 구경꾼들의 모자에 개화의 물결이 많이 스며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결  혼  행  차

예복을 갖추어 입고 백마를 탄 신랑이 앞장서고 새각시의 가마가 뒤따랐다. 그 뒤로 말 탄 상객들이 뒤따르는 이 결혼 행차는 막 동내로 들어서고 있는데 정황을미뤄 보아 신랑이 색시 집에 가서 색시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오는 참인 것 같다.
이런 결혼 풍습은 제주만의 독특한 것이었다.

 

산지내(산지천)의 여름

여름 한낮, 산지내(산지천)의 세답과 멱감는 터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거이벗은 모습이며 어른들도 옷을 걸쳤으나 물에 젖어도 상관없는 차림이다.
이것들의 복개가 이뤄지고, 다시 재개발이 되고 있으니 변화란 참 무상한 것이다.

 

옛 서귀포 서홍리 어귀

서귀포시 시가지로 드나들던 옛 서홍리의 남녘 어귀이다. 비석거리이기도 했던 이 길 양쪽으로 방사를 위한 둑과 소나무가 주욱 심어져 있었다.

 

화전민(火田民)의 가죽옷

개가죽 두루마기를 입고 가죽모자를 쓴 이 화전민, 짚신을 단단히 들매고 있다. 장죽 담배통을 입귀에 물고 윤노리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내는 완전군장을 한 군사 같다.

 

초가마당에서의 세콜방애

"세콜방애 고들배 지엉 저녁이나 밝은 때 허라"는 구절의 민요가락이 있는데 이 여인들이 지금 세콜방애를 찧고 있다.
 민요에 맞춰 세사람이 번갈아 방아를 찧어 나가는 것이다. 손발이 잘 맞아야 잘 찧게 된 방아이다.


1914년 관덕정 앞 광장의 시장 모습

1914년, 일제식민통치의 초기에 찍은 것이다.
맨서쪽 끝 중심에 관덕정이 자리잡았고 오른손편에 누대, 왼손편에는 오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광장남쪽의 집들은 기와와 초가가 반반이다.
"관덕정의 설텅국(설렁텅)도 먹어본놈이 먹는다"는 속담이 이 무렵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오른손편의 몇개의 간이가게, 그리고 좌판을 살필 필요가 있다. 동쪽,지금의 칠성골 입구 쪽은 나무시장이었던 듯 장작짐들이 몰려 잇는 것이 보인다. '白衣民族'을 실정하듯 위.아래 모두 흰옷, 여자들은 거의가 수건을 쓰고 있다.

 

마차끄는 아낙네

1951년 1월 -- 햇살바퀴 마차에 가마니에 담은 짐을 싣고 아낙네가 바투 소를 끌고 간다. 한손에 쥔 막대기,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울퉁불퉁 자갈투성이의 길바닥, 들길을 울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890년대 제주시 관덕정 모습

제주시 관덕정의 1890년대 모습이다. 지붕 위의 풀들, 기왓장의 흩어져있는 모습, 왕조 말기의 쇠락이 그대로 실감된다.
오른손 편에 긴 석주의 누각이 포정사(종루)이고 그 옆에 안내판인 듯한 작은 시설물이 두 개, 담벼락은 바로 전에 양희를 칠한 모습이다. 지금의 관덕정 광장은 돌을 박은 구획이 완연하다.
쇠털 벙거지에 흰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 흰 치마 적삼에 수건을 쓰고 있는 여자가 이무렵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1929년의 제주도청모습

이사진은 1929년 조선총독부 발행의<생활상태조사>보고서에 실린 제주도청의 사진이다. 정문입구 정면과 청사 모습이 보인다. 정문과 벽에, 그리고 인도의 양쪽에 백회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양쪽에 거창하게 광고판이 서 있다.


안장 지운 제주 조랑말

마부 두 사람이 안장을 갖추어 지운 두 마리의 제주 조랑말을 바투 잡고 있다. 그차림들로 보아 귀한분들을 모시고 나들이를 나갈 참인 것 같다.
산악지방에서 잘 견디고 강인하기로 유명한 제주 말, 두 마부의 차림이 대조적인 것도 흥미롭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제주시가지

삼성혈(三姓穴)서쪽편 언덕에서 내려다본 제주 시가지의 전경이다. 바다가 병풍처럼 둘려 있고 그 안에 제주시가지가 담겨 있다. 오른손편 지금의 KAL호텔 자리에 있는 건물은 제주여고 교사이다. 이 부근에 아직 시가지 조성이 안돼 있던 때이다.

 

1950년대 서귀포항

주어동 절벽위에서 서귀포 구시가지 남단과 서귀항 쪽을 향해 찍은 것이다. 서귀부두 선석에는 화객선 한척이 매어 있고 어선들 여러 척도 닻을 내리고 있다.
시가지의 건물들은 개발의 기미가 뚜렸하다.

 

산지천(山地川)의 세월

산지천(山地川)의 하류인 듯한 곳에 세월이 놓여 있고, 이 다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저쪽 냇가를 끼고 나있는길, 그 길가의 높직한 돌담이 눈길을 끈다.
산지내의 물은 풍성하고, 맑으며 그 건너 나즉나즉 엎드린 초가들이 안개에 쌓여 환상적이다

 

관덕정 마당에서의 한판 입춘굿 놀이

1910년대까지도 입춘 무렵에 도내 무당들의 우두머리, 즉<도항수>를 뽑는 입춘굿놀이는 해마다 있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항수는 춤도 잘 출 뿐더러 사설도 정확하게 읊어 모든 무당들의 수장이 되었다.
지금의 중앙파출소 옆쯤의 누대에 구경꾼들이 잔뜩 올라가 있고 가면무를 추는 남녀 무당 다섯이 춤사위가 한창 신이 나 있다.


제주읍 오일장의 그릇시장

시장에도 개화의 물결이 많이 들어와 있는 때임을 알 수 있다. 두루마기나 오바위에 도리우찌 모자가 갓 쓴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
그릇시장에 나온 물건도 사기그릇에 구리 주전자들도 보인다. 칠성로 입구쪽에서 서쪽을 향해 찍은 사진이다.


서귀포와 새섬, 문섬

천지연 내를 따라 휘돈 굽이길이 썩 운치기 있다. 그 길 끝에 동네가 잇고 포구도 있다.
소나무 새순이 돋는것으로 보아 새봄의 풍경이다.

 

초기 제주공항의 모습

어떤 귀빈이 온 것일까.(제주 관1호)차에 비행기에서 내린 귀빈이 옮겨 타 있다. 꼬리에 태극기가 섬명한 대한항공공사의 여객기, 관광호텔로 가는 버스도 아주 비행기 가까이 까지 다가가 있다.
학생과 환영객들이 박수를 치며 맞고 있다.

 

제주측우소 연덕에서 본 제주읍전경

지금의 제주측후소 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일제시 제주읍의 전경이다.
자세히 보면 큰길 가의 집들부터 기와나 함석으로 지붕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길가에 드문드문 전봇대, 멀리 끝부분에 해안과 수평선이 보인다.


눈보라 속의 新舊間

주인은 가자하고 짐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끄는 조랑말은 힘겹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속에 서둘지 않으면 안되는 신구간 이사, 집없는 것도 서러운데 날씨마저 궂어서 더 속을 상하게 한다.

 

서귀포 시가지와 문섬

일제 식민지시대인 1928년 당시의 서귀포 시가지 전경이다.
집들이 건성드뭇 있고 새섬 너머에 문섬이 스름하게 누어있다.집들은 크고 함석 지붕들이어서 신흥 시가지 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른손 편에 그 유명했던(벼락맞은 소낭)이 보인다.

 

물허벅 진 여자들

산방산 쪽 마을 여자들이 물허벅에 물을 지고 집으로 가고 있다. 부리가 좁은 허벅이라는 옹기는 그 자체가 물을 긷는 소용으로 제작된 그릇이다. 과거에 샘이 먼 물을 긷는 소용으로 제작된 그릇이다. 과거에 샘이 먼 마을은 왕복 4~5Km까지도 가서 물을 길어 왔다.


자리장수

자리를 지게에 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파는 이런 아주머니들을(자리장시) 라고 했다. 이런 일은 대개 어부의 부인들 몫이곤 했는데 자리구덕 위의 사발은 되 대용이다. "자리 삽서!"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줄지어 선 허벅, 양철허벅

여기서는 아예 물허벅을 구덕에서 빼내어 줄지어 세워 놨다. 양철이 흔해지던 시대를 반영하듯 옹기허벅 대열에 양철허벅과 양동이 까지 합세 했다. 언제나 내 차례가 올까....


강병대 교도연대(强兵臺 敎導聯隊)

모슬포 제1훈련소의 정문에 일단의 장병들이 서 있다.
양쪽 정문의 기둥에는<강병대>와 <교도연대>라는 간판이 뚜렷하다.
여기서 훈련된 병사들이 6.25이후 많이 참전 전사 하기도 했다.

 

別刀峰에서 본 禾北里

별도봉 기슭에서 현재의 화북동 일부를 조감했다. 그러나 가까이 보이는 것은 온통 돌 투성이여서 이 고장의(石多)를 실감케 한다.
작은 다랑이 들이 돌담으로 둘리고, 바닥도 온통 돌투성이다. 남녘으로 누운 두그루 소나무가 바다바람이 거셈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산천단 곰솔부근 전경

한라산 기슭 산천단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찍은 사진이다. 임시로 지은 초가가 한채 길게 누워 있고 고물을 뿌린 것처럼 눈이 내려 있다. 산천단 쪽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S자형으로 운치가 있고 수평선은 이내에 가려 흐릿하다.

 

관음사 가는길

 

억새 우거진 관음사 가는 길이다. 지프를 탄 사람들이 깃발을 펴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산길은 빗물에 씻겨 온통 자갈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