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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동족상잔(同族相殘) 그 애린 잔영들

by 石右 尹明相 2010. 6. 7.

 

 

전쟁, 동족상잔(同族相殘) 그 애린 잔영들

 6,25. 미문서보관소 처음공개

 

언제보아도 가슴애린 잔영들 뿐인 6.25 동란.

동족상잔의 그 쓰라린 역사를 갖고도 남북이 여전히 대치에 대치중인 현실..

또 다시 시작되는 냉전, 그 냉전의 끝은 언제나볼수 있는 것일까?

연합뉴스가 미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낸 귀한 우리의 옛모습을 살펴본다.

<사진: 반파된 중앙청건물과 인왕산.1950. 11.1일 서울모습>

<사진: 반파된 수원성의 모습>

홍릉에서 예배를..? 조상님들 놀라셨겠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서 미군 25사단 23여단 소속 병사들이 예배를 올리는 모습. 1951.3.18.

 

 1951년 1월 27일. 지게에 가재도구와 함께 아내까지 태운 중년의 가장이 피난행렬에서

미군의 요청으로 돌아서서 포즈를 취했다. 피난의 와중 웃는 표정에서 낙천성이 느껴진다

 

 1951년 1월 4일. 1.4. 후퇴 당시 남하하는 피난민들

 

1951년 1월 16일. 부산 포로수용소의 여군 포로들.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

 1950년 전장을 순시하는 맥아더 사령관. 가운데 인물은 리지웨이 사령관.

 1950년 11월 서울의 고아원에서 보모들이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광경

 

1950년 11월 22일.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원생들이 함께 식사하는 광경

 1951년 1월 4일. 1.4 후퇴 당시 얼어붙은 한강을 앞에두고 피난민 무리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겁에 질려 울고 있다

 

1951년 1월 8일. 부서진 러시아제 T-34 탱크 옆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들.

 

우리도 배급으로 산 적이 있다.1951.3.19. 서울

 

 한 어머니가 서울 남쪽의 한 마을에서 지뢰 파편에 다쳐 우는 아들을 데리고

미군을 뒤따라가 가고 있다. 1951.2.4.

 80일간 적군에 포로로 잡혀 있다 구출된 미군 병사 3명이 자신들을 위해 전령 역할을 해준

한국 소년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경례를 하고 있다.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

 서울에서 동쪽으로 18㎞ 떨어진 양평 금곡리의 사찰 금곡사에서 미군 25사단 23여단 소속

 병사 한명이 말 모양의 석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 1951.3.18.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

 국군 신병들이 열차편으로 전선으로 떠나기 전의 모습. 비장하면서도 애띤 모습이 눈길을 끈다.

 

1951년 1월 31일 미 보병 25사단 소속의 한 장교가 이동수라는 이름의

통역관의 도움을 받아 주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곧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설명에도 아이들의 표정은 무심하기 그지없다

1950년 11월 9일. 미 보병 2사단이 발견한 한국 화폐 원판을 한 미군이 들고 있다.

뒤에는 지폐다발이 보인다. 사진에 뒷면의 설명에는 이 원판과 지폐가

진본인지 위조된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피난을 떠난 서울의 텅 빈 상가를 한국군 1명이 걸어가는 모습. 1950.12.26.

 1950년 12월 9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북한 주민 가족을

미군 헌병이 검문하고 있다.

 

 1951년 1월 14일. 늙은 아버지를 엎고 서울 한강을 건너 피난가는 주민의 모습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

 1951년 2월 26일. 전장에서 부상해 체포된 포로들이

트럭으로 부산 인근의 병원에 방금 도착해 치료를 기다리는 모습

 

 1951년 2월 26일. 전장에서 체포된 부상병 포로들이

트럭으로 부산 인근의 병원에 도착해 치료를 기다리는 모습.

 

 1951년 2월 26일. 전장에서 체포된 부상병 포로들이

트럭으로 부산 인근의 병원에 방금 도착해 치료를 기다리는 모습

 1950년 10월 28일 서울의 폐허속에 문을 연 구두수선점

  상여가 지나가는 광경을 유엔군 소속 벨기에 병사들이 신기한 듯이 지켜보고 있다.

 1951.2.23. 경북 왜관.

 1950년11월 2일. 전쟁고아들이 트럭으로 실려와 서울의 한 고아원에 내리기 직전의 모습

 1950년 11월 12일.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원생들이 수녀들의 도움으로

 뜨개질을 배우고 있다.

 

1951년 3월 22일. 3∼6세된 전쟁고아들이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보모들의 보살핌 속에

 잠자리에 든 모습이다

 1950년11월 2일. 전쟁고아들이 트럭으로 실려와 서울의 한 고아원에 내리기 직전의 모습

 1950년11월 2일. 고아원에 방금 도착한 아이들이 통조림으로 첫 식사를 하고 있다.

1950년12월 3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엄동설한에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려

평양의 대동강을 건너 피난을 떠나는 북한 주민들.

 

 1951년 1월 14일. 부산의 포로수용소에서 한 미군 병사가

송종태라는 인민군 소년병 포로와 나란히 서 있다.

  이 소년은 12살로 서울에서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1951년 2월 26일. 전장에서 부상해 체포된 포로들이

트럭으로 부산 인근의 병원에 방금 도착해 치료를 기다리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