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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과 삼위일체

by 石右 尹明相 2010. 9. 5.

 

 

 양태론과 삼위일체


혹간 사람들은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가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시절에 성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들에 맞서 만들어진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 양태론이 무엇인가?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목회자들도 이러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태론은 물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기본적인 양태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되어진다든지, 동질의 물이 얼음과 수증기의 형태를 가진다는 예를 말한다.

또 수박과 수박즙과 수박조각으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비유는 한 실존적인 인격의 세가지 양태(Mode)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일반 성도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본인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던 견해로서,

물론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즉 한 인격의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곧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이다.

또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 자신이 되어지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으며,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파락세아스등이

있었는데, 양태론도 변형되어 몇가지 유형을 갖고 있다.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본질과

인격이 다른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계시다는 주장인데,

다시 말하자면 세분의 신을 믿는 이러한 주장은 삼신론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삼신론은 인격뿐 아니라 본질도 셋으로 분리시키는 주장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분의 분리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주장하므로서,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인격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하나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단일신론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곳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되고만다.

양태론도 결국은 단일신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위를 모두 한 인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론은 지방교회(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성락교회(베뢰아),

뉴예루살렘교회(스웨덴 보그)등이 주장하고 있으며,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에서도 보여진다.


또한 몰몬교와 같이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으며,

더욱이 누구나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몰몬교의 삼위일체는 성부는 엘로힘, 그리고 성자는 구약에서는 여호와이며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또 통일교와 같이, 사람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지방교회, 몰몬교 역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신인합일) 곳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안상홍의 증인은 안상홍이 하나님도 되고, 예수님도 되며,

성령도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 부인 장길자까지 하나님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완전한 사이비적인 주장을 하는 곳으로, 이런 몇몇 사이비집단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삼위일체는 자신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삼위일체 중에

한 형태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토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설명을 생략한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오랫동안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양태론적인 자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에 대한 비유 외에도,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혹간은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위의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은 줄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바람직한 설명은 결코 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물과 수증기, 얼음의 비유를 하고 있으며 그리고 수박과 수박

조각과 수박즙으로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으로 설명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일체"라는 말이 히브리서의 "본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위일체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하여 아래의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며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만든 논리가 아니며,

성경적인 정리를 체계화 시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즉 삼위의 인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 삼위의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관계가 가능한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그 삼위는 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 정통신학이 말하는 양태론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러나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서적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서 성경적인 설명도 충분히 할 것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 자신이 성자 예수로 오셨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분명한 양태론이다.

실제적으로 양태론은 동일인격의 세 과정이기 때문에,

그 세 양태는 서로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기독교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153-154)


#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관 중 삼위일체의 문제,

 특히 성부와 성자의 내적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단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다고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바로 성부 자신이었기에 성부수난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의 단일성과 조화시키고자한 단일신론자들

이었다.(교육목회협의회, TBC 성서연구. 546 쪽)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과서적인 신학서적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 즉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그 하나님이 직접 예수로 오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그 예수가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정통삼위일체는 인격에서는

상호교류가 가능하도록 구별되지만,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 양태론자의 실제 주장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양태론자이며,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여보자.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52)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위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이다, 워치만 니와 함께 위트니스 리를 지방교회는 사도라고 부른다. 지방교회의 교리는 위트니스 리와 100% 동일하다. 더욱더 위트니스 리의 견해를 살펴보자.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 우리는 왜 양태론을 조심하고 유의하여야 하는가?


1) 성부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성자하나님으로 오셨다고 주장하면,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되고만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사이신 하나님이 돌아가신 시간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성자예수님이 성령이 되셨다고 한다면, 부활의 신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인격적인 재림을 부정하여야만 하고, 예수님의 영적재림을 주장하여야만 하는데, 이것 역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3) 성경에 기록된 삼위의 인격적 교류와 상호작용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예를 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신 것과 성자가 성령을 파송한 것, 성자예수가 성부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성경적 기록,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 성부하나님의 소리가 들린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4) 성부하나님이 성자예수로 되었다가 성령이 되었다고 하면, 인격적인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은 현재 어느 곳에서도 계시지 않고 성령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되고만다.     


5)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성자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므로 구속의 성취를 이루신 성부하나님의 인격이 구별되지 않고 동일시 되어진다. 즉 양태론은 십자가의 대속적인 개념이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교회의 구원론은 일반 기독교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하였듯이 예수의 인격적 재림을 부정하므로 종말론에서도 달라진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버뱅크라는 학자가 말하였듯이, 첫단추를 잘못 꿰메면, 마지막 단추는 채울 수가 없어지게 된다.


▶ 양태론의 성경적인 모순: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존재과 동시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곧 예수이시다..... 다윗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만일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윗은 세 인격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장차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를 구별하여 보았는가? 신약에서 예수님은 그 문장을 유대인들에게 친히 직접 말씀하셨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다시 말하면, 양태론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 고전적 삼위일체: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으므로 정통삼위일체인가?


양태론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양태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 초대교회 교부들도 자신들과 같은 하였으므로, 자신들은 정통삼위일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발전해갔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위일체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양태론이란 논리는 항상 등장했으며, 그 양태론은 2000년 교회사동안 언제나 위험하고 이단적인 주장이었으며, 양태론이 정통삼위일체가 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그 고전적 삼위일체가 전개, 발전되어지는 과정에서 정통삼위일체는 양태론과 언제나 투쟁하게 되면서 발전되어진다. 물론 그 당시의 초대교회 교부들의 견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정통교회사를 살펴 보자.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스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은 인격들(persons), 얼굴들(faces), 가면들(masks)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빌어서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후 같은 세기의 사벨리우스는 터툴리언의 개념으로부터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론(이는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신고난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과 같은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 그는 세 개의 구별된 실체들이 한 신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의 형태, 성자의 형태, 성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조: 물, 얼음, 수증기와 같이 유사성을 갖는 세 인격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가폐 성경사전 779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로마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헬라어 "프로소폰"이 라틴어의 "페르소나"라는 단어로 번역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의 어원이 얼굴, 모양, 또는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어원적으로 한 배우가 세가지의 가면(세가지의 배역)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대에서 한명의 배우가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다른 역을 맡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인격의 하나님이 세 역할, 즉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의 삼중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가르칠 위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즉 용어적으로 볼 때에 한 인격적 존재가 경륜적(사역적)으로 세 역할을 하였다고 오해될 수 있었으므로, 실제로 그러한 견해가 곧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위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 수세기에 걸쳐 많은 훌륭한 교사들이 삼일하나님의 두 면을 일치시켜 보려했다. 그렇게 하는데서 그들은 어떤 용어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인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한 하나님의 세 인격이라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삼일성을 설명하기 편리하므로 우리도 이 용어를 임시로 빌어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한 하나님의 세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어거스틴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자. 어거스틴은 삼일하나님의 비밀을 적절하게 표현할 인간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삼위양식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위트니스 리의 신약의 결론. 성령51쪽)


위트니스 리는 어거스틴이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거스틴과 초대교회 교부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는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모순인가를 알 수 있다. 정통신학 역시 어거스틴의 이러한 오해적인 비난에 대해서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 당시는 삼위일체가 발전, 전개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이 좀 달라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 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 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정통삼위일체는 곧 어거스틴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의 용어적인 개념은 어거스틴이 죽은 후 500년 후에 공식적으로 동의어라고 선언되었던 것이다. 즉 초대교회 교부들의 삼위일체와 유사점이 있으므로, 자신들도 정통삼위일체라는 양태론자들의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주장이다. 그들은 분명히 양태론을 주장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양태론이 아니라고 숨기며 위장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 자신이 스스로 양태론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함이며, 둘째, 초신자가 자신들의 교회에 입교할 때에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을 숨기고 위장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경륜주의는 양태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륜주의는 4세기 이후로는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었던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삼위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기록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상호 인격적인 교류를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은 비둘기처럼 머리 위로 임하셨으며, 하늘로서는 성부의 소리가 들려왔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어느 때라도 기독교의 성부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거나,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시며 전능하신 불사의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즉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이 돌아가셨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 주장은 양태론이며 서 성부고난설이며, 결코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며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성경에서 "예수의 영" 혹은 "하나님이 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다?


특히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읽어보면 명백한 양태론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위가 한 위 안에 내재되어있다는 이상한 변명을 한다. 즉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대로 보자면,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을 한다.....(앞에 올린 위트니스 리의 글을 참조하시요)


그렇다면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지므로 명백한 양태론이다. 즉 성부의 시대에 예수라는 신약시대의 과정은 아직 거치지 않은 장래의 과정이 되어지며, 성령이라는 과정은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거쳐야 할 미래적인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세 양태는 시간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시간적인 차이를 두는 세 양태가 내재적으로 볼 때에, 동시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지 궤변과 모순이 될 뿐이다. 양태론이라고 하는 비난을 대외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 황당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즉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동시존재하는 요소일 수도 있으며, 혹은 서로 시간적 차이를 갖는 과정과 단계가 된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본인의 사역적 직분의 구별, 즉 교회의 권사와 회사의 사장과 집안의 가장이 내 안에서 서로 상호교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변형된 양태론으로서 양태론이라고 하는 비판을 모면해 보기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본인이 전에 어느 회사에 과장이었고 그 후에 부장이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지금 사장이 되었는데, 본인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시간적인 차이를 갖는 세 단계와 과정이 한 인격에 상호내재, 동시존재될 수 있으며, 본인이라는 동일인격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과정과 단계가 서로 인격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해괴망칙한 주장이 바로 지방교회의 변형된 양태론적 주장인 것이다.

 

글쓴이 : 이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