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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운동'은 자기수양의 구원이다

by 石右 尹明相 2009. 8. 29.

 

 

'영성운동'은 자기수양의 구원이다

전광식 교수(고신대)


작금 국내의 기독교 일각에서 소위 '영성'에 대한 관심과 영성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혹 그것을 어느 정도 알고 하는 이들도 있겠고 혹 그것의 교회사적 내지 신학적 뿌리를 전혀 모르고 무관심한 가운데 그 운동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재 국외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세한 내막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성향과 신학 내지 기독교의 역사의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겠고 또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우선 경건에 대한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경건은 어쩌면 오늘날 망각된 주제이다. 그것이 신자들에게서와 교회 중에서 잊혀지게 된 것은 그 가운데에 경건에 대한 표현이 적고 또 소위 '경건함'이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경건에 대한 오해와 오류가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작금의 기독교계의 현실은 어쩌면 경건의 형식은 풍부한데 경건의 내용은 빈약하고, 경건의 언사(言辭)는 다양한데, 경건한 신앙과 인격, 그리고 삶은 희박한지 모른다.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 가운데 있는 경건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참된 경건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태도이고, 둘째는 경건의 형식과 외양(外樣)에만 주력하는 태도이며, 셋째는 경건을 심리화 내지 문화화, 그리고 사회화시킴으로 그것을 영성으로 돌려버리는 태도이다. 삶의 중심이 신앙의 세계보다 세속에 있는 자들은 첫번째 형태에 속하고, 옛날의 율법주의자들과 오늘날의 교권주의자들은 두번째 부류에 속하고, 현금의 소위 영파(靈派)들과 기독교를 문화적 내지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는 이들은 세번째 유형에 해당된다.

 

애당초 경건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하고 동떨어진 첫번째 태도 외에 나머지 세 가지 태도는 참된 경건을 오해하였거나 무시하는 자세이고, 종종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딤전 6:5) 모습을 띤다. 이 세 가지 태도 가운데 마지막의 태도인 영성운동은 오늘날 우리 교계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것에 관한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함께 반성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영성운동이 우리 기독교계 일각에서 일어나게 된 배경은 아마 한편으로는 내부적인 요인으로서 제도화되고 종교화되어 영적인 것이 희박해져가는 작금의 기독종교의 의식과 삶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적인 요인으로서 사회문화 전반의 세속화 흐름에 대한 깊은 반성과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이 운동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세속대중들이나 영적인 삶과 경건생활에 무관심한 형식적 신자와 달리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려고 하는 성도들의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요 배경에 대한 긍정적 평가 외에 우리는 이 영성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되어가는 조력적 요인으로 두 가지 부정적인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가지는 과거의 Postmodernism 운동과 비슷하게 뭔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두드러져 보려는 사이비학자 내지 어슬픈 글쟁이들의 처세(處世)와 특별한 신앙고백적인 자세가 없이 성가(聲價)를 올리고 이윤을 남기려는 기독종교 장사치들의 상술(商術)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새로운 것에 대한 우리 개인들의 지나친 호기심과 새로운 것에 쉽게 동요되는 우리 교회 내지 사회의 연약한 정신적, 영적 지반(地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영성'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모든 글들이나 모임, 또 운동이 그릇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운동이 성경적이고 따라서 옳은 것인지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기준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의 가장 좋은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부침(浮沈)을 거듭한 많은 이단들의 경우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정신적 내지 영적인 운동은 그 열매가 맺히려면 오랜 세월이 걸려야 한다. 따라서 열매를 가지고 곧장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신앙에 관한 문제들은 실험이나 연습을 미리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열매를 기다리기에 앞서 우선 기본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설령 조만간 그 열매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해석은 극단적으로 편향될 경우가 있음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선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이 현상과 운동을 봐야 할까?
영성운동의 기준은 무엇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교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령행전'이라고 불리는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에 일어난 역사와 또 이후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참된 영적 운동의 중심에는 늘 성령님이 계시고, 또 성령님으로부터 영적 운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참된 영적인 운동은 '성령님의, 성령님에 의하여, 성령님을 위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 운동과 부흥은 성령(聖靈)운동이어야 한다. 국내의 어떤 이가 '부흥.com'이라는 글을 썼다고 들었는데, 그 글을 접해 보지 못했지만 그것의 답은 오직 '성령.com'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일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영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인간적인 계기와 주도에 의해 일어나고, 그가 세운 기준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면 순전한 하나님 운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런 교훈을 잘 보여준다. 초대교회에서의 사막의 수도자들과 중세 동서방교회의 수도원이 중심이 된 영성운동이나 근세의 경건주의 운동은 순전한 성령 주도의 운동이라고 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전자에서는 영적 교만과 방탕, 그리고 종교적 부패가, 후자에서는 그릇된 낭만주의 신학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운동 외에 다른 무슨 영적 운동이 필요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진정한 영적 운동은 성령운동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성령님을 통한 부흥운동은 어떤 계기로 일어나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책인 성경(聖經)운동과 성령님의 인도인 기도(祈禱)운동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말씀과 기도는 모든 참된 영적 운동의 불씨요 주춧돌이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와 개별 성도들에게서요청되는 것은 옛적의 성도들에게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고 기도의 불이 붙는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은 기도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회개(悔改)야말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단서이기도 하고 증거이기도 함을 가르쳐 준다.

 

나아가 우리는 이 영성운동의 신학적 연원(淵源)과 배경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영성운동은 옛적에는 물론 현대교회에서도 애당초 동방정교와 천주교, 그리고 영국성공회에 속하던 것으로서 그들이 수도적 삶을 통한 영적 수양과 훈련을 내세우고 강조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들이 행한 영적 수양과 영성운동에는 성령충만은 물론 성령님이 차지하는 위치는 미미하거나 전무(全無)하다. 보다 더 직접적으로 지적해 본다면 이들의 운동에는 '은혜의 구원' 대신 '자기수양의 구원'이 목표로 있고, 성령님의 주관 대신 자기내적 충일과 영적인 신비의 경지가 이상(理想)으로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Gloroa Dei) 대신 자기영광(gloria sui)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위 영성운동은 하나님에게로 가는 영혼의 상승 내지 신과의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이 그 최종목표였다. 이러한 자기수양의 과정은 사상적으로 그 원뿌리는 Platon사상에 놓이며 구체적으로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혼의 회귀'(epistrophei) 논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말하자면 영성운동의 뿌리는 바울이나 요한이 아니라 Platon과 Plotinos, Porphyrios와 Proklos이며, 또 Pseudo-Dionysios이다. 그리고 영성운동의 고전격인 Origenes의 문헌들과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글들, 또한 Maximos의 Vita Ascetica와 Klimakos의 Scala Paradisi도 결국 그 근원을 찾아가면 이 이교적 사상에 수원(水源)을 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Gospel of St.Peter 등에 나오는 영적 무공(武功)쌓기 얘기와 영적무공겨루기 얘기(이를테면 사도 베드로와 Simon Magus와의 시합)는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하나의 호기심적 허구(虛構)에 불과하다.

나아가 우리는 일반적인 영성운동이 지니는 다음과 같은 종합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전통적인 영성운동에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믿음'(sola fidei), '오직 은혜'(sola gratia), 또한 '오직 하나님께 대한 영광'(Soli Deo Gloria)이 있을 자리가 없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인간이 수양하여 구원을 이룬다는 것과 다른사람보다 우월하기위해 시작된 것이 영성이다. 이것은 불교의 참선이나 다를바없다.

 

영성운동은 개인에게서는 지나친 내향적, 탈교회적 운동으로, 공동체로 봐서는 도피적이고, 분리주의 성향의 운동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성운동은 내적 직관과 깨달음을 기록된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신앙과 구원의 모든 것을 신비주의화, 심리주의화하는 위험성과 인간중심주의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자기의 영적 수양을 성령충만으로 대치할 수 있고, 아니면 아예 성령님이 위치할 자리가 전혀 없을 수 있다.

 

오늘의 영성운동은 교회와 사회의 세속화되고 제도화된 추세에 대한 내적 회귀를 지향하는 심령적 반동현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물론 상기한 모든 문제점에 대한 극복을 전제로 이 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겠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올바른 성령운동만 하면 되는 데, 굳이 이교적 배경에서 나온 그릇돤 운동의 명칭을 사용하여 개인과 교회를 어리둥절하게 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또 실제적으로 영적 및 교리적 위험이 있는 천주교적 배경의 운동을 굳이 성경적이고 종교개혁적인 개신교에 접목시킬 이유가 어디 있을지 의문이다.

 

그것도 성직자들의 교권주의화와 교단들의 윤리적 부패 및 영적 둔감, 교회건물에 대한 지나친 장식과 예배의 의식(儀式)주의화, 성지(聖地)로의 순례행사, 이원론적 세계관과 이중주의적 삶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천주교화 되어가는 목하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을 감안해 보면 말이다. 따라서 작금의 영성운동은 성령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기도와 말씀충만의 부흥운동, 그리고 참된 경건운동으로 전환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성도들과 신앙공동체들은 회개의 눈물과 말씀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로서의 참된 신앙과 인격, 그리고 삶으로 이루어진 성경적 경건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