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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은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복음서(a social spel)로 알려져 왔다. 이는 누가복음 안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횡적인 성격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누가신학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은 횡적(橫的)인 대인(對人) 관계만이 아니라 종적(縱的)인 대신(對神) 관계를 또한 매우 중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성령에 대한 강조는 누가신학의 특별한 강조점 중 하나로서, 누가신학의 종적인 성격에 대한 매우 좋은 증거라고 생각된다.
성령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특별히 그의 두 번째 저작이자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수도 없이 많이 그리고 자주 등장한다. '성령'이란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만 49회, 원문으로는 프뉴마(pneu/ma)가 71회 등장하는데, 이 중 '더러운 영'(pneu,mata avka,qarta)의 뜻으로 쓰인 두 곳(5:16; 8:7)을 제외하면 모두 69회가 된다. 이 69회 중 관사와 함께 쓰인 것은 20회이고, 관사 없이 쓰인 것은 18회이다; 또한 10회는 형용사 '거룩한'(a[gion)과 함께 쓰였고, 2회는 '나의 영'(to. pneu/ma evmou), 2회는 '주의 영'(to. pneu/ma kuri,ou), 그리고 '예수의 영'(to. pneu/ma vIhsou/)으로는 1회 사용되었다.
성령에 대한 이처럼 잦은 언급 가운데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령이 독립적인 위격(位格)으로 언급되고 있는 구절들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명하시고'(1:2), '성령(이)으로 충만하여(4:8, 31; 6:5)', '성령 받기를'(8:15, 17, 19) 등과 같이 마치 수단적 도구로서 사용되지 않고, 예수님처럼 독립적 위격으로 등장하는 부분을 말한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8:29),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10:19), '성령이 듣는 모든 사람에게 … 내려오시니'(10:44), '성령이 내게 명하사'(11:12),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11:15), '성령이 가라사대'(13:2), '성령과 우리는'(15:28), '성령이 아시아에서 … 못하게 하시거늘'(16:6),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19:6), '성령이 저들 가운데 … 감독자를 삼고'(20:28), '성령이 말씀하시되'(21:11), '성령이 … 말씀하신 것이'(28:25). 성령에 대한 이런 언급은 누가복음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조력자 혹은 협력자로서 도움을 주었던 성령이 이제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사도들과 교회를 통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시며 사도들을 포함하여 제자들의 사역에 직접 간여(干與)함을 보게 된다.
이런 현상으로 인하여 노만 페린(Norman Perrin)은 누가-행전을 성령의 사역(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으로 간주하면서, 누가저작의 제 1권인 누가복음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활동'으로, 제 2권인 사도행전을 '교회를 통한 성령의 활동'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즉 두 권의 책의 중심 인물을 성령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페린의 주장은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킴으로서 누가의 본연의 사상을 축소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렇게 표현될 정도로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가 두드러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음의 목록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를 정리해 본 것이다;
①오순절 성령 강림(2:1 이하);
② 사도들의 성령 충만(4:23-31);
③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성령 거역으로 인한 죽음(5:1-11);
④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음(8:14-17);
⑤ 성령이 빌립을 인도함(8:29);
⑥ 고넬료와 그 권속이 성령을 받음(10:44-48);
⑦ 바나바와 바울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음(13:1-4);
⑧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의 성령의 인도(15:28);
⑨ 성령이 사도 바울의 활동을 도우심(16:6-7);
⑩ 에베소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19:1-6);
⑪ 성령이 바울의 운명을 예고함(20:22f.; 21:11);
⑫ 성령이 교회에 감독을 세움(20:28) 등등.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사실상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전도와 선교사역의 전면(前面)에 나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실질적으로 인도하고 이끈 것은 성령이었다고 우리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그 능력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 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도왔던 성령은 이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을 직접 인도하고 지시하며 충만케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도행전(pra,xeij avposto,lwn)은 곧 성령행전(pra,xeij pneu,matoj)이라고 불려지곤 하는 것이다.
이제 아래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성령과 관련된 사건 및 기사들 가운데 중요한 네 개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신학의 성령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행 2:1-4)
승천할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명령(1:4-5)에 순종하여 사도들을 비롯하여 제자들은 오순절 날까지 약 열흘 동안 지속적으로 기도하다가(1:14), 역사적인 오순절 날 드디어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도록 복음,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i) 오순절 날 발생한 이 성령강림 사건은 역사적으로, 구속사적으로, 신학적으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우선 이 사건은 멀게는 누가복음 11장 13절과 24장 49절, 가까이는 사도행전 1장 5절과 8절의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이다.
예언의 성취로서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성령을 통한 교회시대의 공식적인 시작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넓은 의미에서 교회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아직 '교회'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거의 줄곧 메시아로서의 주님의 사명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고, 더욱이 예수님이 체포될 때 모두 도망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비록 주님과 함께 생활하며 교훈과 교육을 받았지만, 이처럼 성령을 통한 깨달음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못하였던 까닭에 그들에게는 교회로서의 성도다운 모습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중생(重生)의 문제와 연계하여, 주님의 지상사역 동안 제자들이 아직 중생 받지 못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의 대변인격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놓고 볼 때(마 16:16; 눅 9:20)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실 메시아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단지 그들이 아직 깨닫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구원을 예수님이 어떻게 이루시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그 구원을 주님은 제자들이 기대한 것처럼 그리스도로서의 권능을 통하여 이루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짊으로써 이루셨기에 제자들은 오해와 무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러한 오해와 무지는 결코 중생하지 못하였으므로 야기된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성령을 통한 깨달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던(J. Dunn)의 주장처럼, 복음서에서 성령을 받으므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원형(archtype)이 되었던 것처럼,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으므로 제자들이 새 시대에 들어가고 새 언약의 축복을 경험함으로써, 원리(原理)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런 이해는 성령이 사람의 중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바울 신학적 사고를 갖고 누가-행전을 바라보는 것이다. 누가-행전에서, 누가는 성령을 사람의 중생과 연계 짓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복음서의 제자들을 중생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고, 이들이 오순절 사건에서 성령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중생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누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ii)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전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했던 것과 같은 성격을 띤 병행적 사건으로 이해된다(눅 3:21-22). 새로운 시대가 시작할 즈음에 예수님과 사도들을 비롯하여 제자들에게 똑같이 성령이 강림한 것은 일종의 '신적 확증'(divine confirmation)으로 보여진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시작될 즈음인 수세(受洗) 시에 성령이 강림한 것은 향후 전개되는 메시아 사역에 대한 승인(承認)일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베풀어주고자 함이었다(empowerment). 마찬가지로, 교회시대가 시작될 즈음에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것은 이후에 전개되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전도사역에 대한 승인일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베풀어주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사도들에 대한 성령 강림의 이러한 대칭(對稱)을 통하여 저자 누가는 성령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통로의 역할을 함과 아울러 그 새로운 시대를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단회성과 연속성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요엘서의 예언의 성취로서 종말론적인 역사적 사건이며, 또한 '급하고 강한 바람'이나 '불의 혀같이 갈라짐'(2:2-3) 등 동반된 특별한 현상으로 인하여 사도행전에 기록된 여타의 성령강림 사건들과 구별되는 까닭에, 유일무이한 독특한 사건, 즉 반복이 불가능한 단회적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강림이 오순절에 사도들에게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8, 10, 19장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발생하였고, 아울러 이런 시청각적 현상 외의 것, 즉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을 말하는 것(2:4)은 여타의 성령강림 사건에서도 발견되는 까닭에 여전히 반복적인 사건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일부 학자들이 비판하는 오순절 신학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선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바르게 제시하고자 한다. 사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해서 성령강림의 연속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사도들에게 임한 성령은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과는 받는 사람의 신분이 다름으로 하여 구별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말한 방언과 이방인인 고넬료가 성령을 받아 말한 방언이 다르지 않음을 놓고 볼 때, 분명히 두 사건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차후에도 여전히 같은 속성의 사건은 발생할 수 있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19장의 에베소 교회에서도 성령이 강림할 때 역시 사도들과 고넬료에게 임했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따라서 오순절에 강림하시어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구원역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케 한 성령은, 그 한 번의 강림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성도들에게 새로운 은혜와 능력을 베풀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찾아오시고 또 내려오시는 것이다.
이런 교훈은 성령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면서 협조자로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위한 능력을 공급함으로써 그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고,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들에게 임하여 증인으로서의 능력을 공급함으로써 복음전파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사실에서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해석과 관련하여, 최갑종 교수는, 이 사건의 연속성을 지지하며 '중생 후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오순절신학과, 이 사건의 단회성을 지지하며 '중생=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장로교신학 모두 비판하면서, 양쪽 다 누가신학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리를 기본 전제로 하여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쪽의 주장을 논박함으로써, 최 교수는 "교리적, 교파적, 신학적, 경험적 전(前) 이해의 패러다임"을 극복한 새로운 누가의 성령론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런 그의 시도는 양쪽의 주장의 약점을 지적함으로써 누가의 성령론 이해의 지평을 어느 정도 열어주었다고 인정된다.
최 교수는, 먼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오순절신학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그들의 모토인 '중생 후 성령세례'를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① 오순절 사건은 누가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약속과 성취'의 구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세례 요한(눅 3:16)과 예수님(눅 24:49), 더 나아가 요엘 선지자(욜 2:28-29)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참고, 행 2:33).
② 이러한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누가는 성령의 사역이 곧 주님의 사역임을 강조한다.
③ 오순절 사건은 성령세례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과 연결되었고, 묵시문학에서 종말론적 현상으로 제시된 바람, 불 등이 나타났으며, 베드로가 요엘의 '이 후에'를 '말세에(evn tai/j evsca,taij h`me,raij; 이 마지막 날들에)'로 변경시켰으므로, 종말론적 사건이다.
④ 오순절의 성령은 행 1:8을 근거로 할 때 선교와 예언의 능력을 말한다.
⑤ 오순절의 성령은 눅 24:47-49, 행 2:21, 38, 40 등을 고려할 때 구원역사와 연관되어 있다.
⑥ 오순절의 성령은 열두 사도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120 명의 성도 전체에게 임하였으므로, 또한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요엘서의 예언의 성취를 놓고 볼 때, 교회를 위한 영(靈)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최 교수는, 누가가 오순절의 성령을 약속과 성취라는 구원 역사적 관점, 기독론적, 종말론적, 선교론적, 교회론적, 구원론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누가신학을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최 교수가 제기하는 이러한 다양한 관점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다음은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논박(論駁)이다.
i)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 사역 이전에 성령의 활동에 대한 언급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 요한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 사역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마리아에게는 성령이 임하여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예언하였고, 시므온 역시 성령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 혹은 입을 것이다'(evplh,sqh( plhsqh,setai)는 표현은 최 교수가 말한 대로 소위 '신적(神的)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전에, 요엘서의 예언의 성취와 무관한 상태에서,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똑같이 이미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활동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 이전의 인물들의 이러한 활동을 놓고 볼 때 성령은 구원론적으로보다는 사역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증거들을 고려할 때 '약속과 성취'의 구도를 누가신학의 성령론의 특징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ii) 오순절의 성령을 교회의 영(靈)으로 보는 문제와 관련하여, 최 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예루살렘 교회를 최초의 신약교회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지상사역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 받고 나아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열두 사도들과 칠십 인의 제자들에 대하여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중생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성령의 능력이 없이 제자들이 귀신들을 내어쫓을 수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고(눅 4:14), 그 능력을 받아 나간 사도들 역시 성령의 능력을 받았으므로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눅 9:1-6; 10:1, 17-18).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비록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열두 사도와 칠십인 제자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 주장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교회의 영인 오순절의 성령은 이미 예수님 사역 때부터 활동하였던 것이지, 오순절 사건 이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iii) 최 교수는 바람을 동반한 소리와 불 그리고 방언의 현상으로 인하여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예수님에게의 성령강림 사건(눅 3:22)과 사도행전의 여타의 성령강림 사건과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 현상적인 이유로 이 사건이 독특하다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던 예수님의 성령체험 자체도 독특하며(눅 3:22), 성령 충만과 함께 땅이 진동했던 사건(행 4:31) 역시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넬료 사건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을 우리는 참조해야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행 10:47). 비록 바람, 불과 같은 자연적 현상은 없다 할지라도 그들의 성령체험이 동일하다면, 결국 같은 성격의 사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iv) 최 교수는 누가가 성령을 약속과 성취라는 구원 역사적 관점, 기독론적, 종말론적, 선교론적, 교회론적, 구원론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선 중생, 후 성령세례'라는 도식을 주장하는 오순절신학도 잘못된 것이고, 또한 '중생 =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장로교신학도 누가신학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오순절 사건 이전의 제자들을 중생하지 못한 자들로, 즉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장로교의 신학적 입장에 선 제임스 던의 견해를 추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성령론 논의에서 최 교수와 오순절 신학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최 교수는 자신도 인정하듯이, 누가의 성령론을 다분히 존재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반면에, 그가 비판하는 멘지스(Menzies), 차영배 교수와 같은 오순절신학자들은 사역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두 견해 사이의 이런 차이는 접근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 근본적인 내용의 차이는 아닌 것이다.
사역론적으로 성령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구원 역사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선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를 토대로 하여 성령이 어떻게 사역하는가에 보다 깊은 관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접근 방식의 차이를 문제를 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양쪽의 접근방식을 종합하여 총체적인 성령론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시도는 오히려 최 교수 자신이 부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단회성과 연속성의 문제에 있어서, 양쪽의 견해가 나름대로 적절한 근거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성령강림 사건들과 바울서신의 내용들과 비교할 때, 필자의 시각으로는, 후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공식적인 교회 설립과 복음 전도의 시작이란 견지에서 볼 때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써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성령의 활동 내역을 놓고 볼 때 오고 오는 세대에 계속하여 발생할 수 있는 반복적 성격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4. 사마리아 성령강림 사건(8:14-24)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주님의 명령을 따라 오순절 날 성령강림을 통하여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이후, 전도사역에 열중하였고(4:31, 33; 5:21, 42), 그 결과 수많은 사람(유대인)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다(4:4; 5:14; 6:7). 그러나 초대교회는 여전히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여 예루살렘에서만 전도하고 있었다.
즉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방인을 포함하여)에게로 나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초대교회 헬라 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나자 비로소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8.1ff.). 그 흩어진 교인들 가운데는 사마리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헬라 파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빌립이 포함되어 있었다.
빌립의 권능 있는 사역을 통하여 귀신들이 추방되고 병자들이 치유되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세례까지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이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도는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이 사실을 확인함과 아울러 그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사마리아 성도들이 전도자 빌립을 통하여 주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8:12),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안수하기 전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8:14-16).
일부 학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이 사건을 구실 삼아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한다고 비난하지만, 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례와 성령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예수님을 믿었기에 세례를 받았다면 그 믿음은 성령을 통하여 왔을 터이므로, 세례 후 다시 성령을 받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반박이다. 이 문제는 여전히 누가를 바울의 안목에서 보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누가는 성령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사마리아 사건에서 보듯이, 누가는 성령을 사역적 혹은 선교(전도)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성도들이 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아울러 세례 후 주어진 성령이 그들에게 성도답게 살며 성도답게 사역할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주었을 것이란 사실 역시 당연한 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본격적인 이방인 전도에 앞서 반(半)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림한 이 사건의 의미를 구속사적 견지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승천 시의 명령을 통하여 밝혔듯이(행 1:8), 사마리아 전도는 땅끝까지 이르는 전도에 앞서 거쳐야 될 필수적 과정으로써,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과정의 과도기적 위치에 놓여있었다.
구속사적으로, 선교사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인 까닭에, 교회시대가 시작될 때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했던 것처럼, 복음이 이방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위치에 있는 사마리아에서의 성령강림 역시 또다른 신적 확증(divine confirmation)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사도들인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교회의 통일성 및 일치성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라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을 통한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 동안 나누어져 있던 사마리아 교회와 예루살렘 모교회가 하나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통일성을 통하여 누가는 사마리아 교회가 교회의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5.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강림 사건(행 10:44-48)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 전까지 아직 완전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이방인으로서 회당에 출입하는 '경건한 이방인'(God-fearer)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비록 온전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고넬료의 경건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를 그에게 보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이르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는 동안에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하게 되었다(10:44-45; 11:15). 그런데 이 때 임한 성령은, 이 사건을 목격한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본질적으로 사도들이 받았던 성령과 동일한 성령이었다(10:47, "…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 11:15, "…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또한 이들 이방인들도 사도들처럼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였다(10:46).
고넬료의 회심과 성령 받음 사건 역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전도는 빌립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에 의해 사마리아,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에까지 확장되었고, 그리하여 안디옥에는 최초로 이방인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11:19-26). 이후로 기독교회는 서서히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옮겨지면서, 이방인의 교회로의 영입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다(15:1). 그런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전에, 고넬료의 회심 및 성령충만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넬료 사건은 기독교회의 이방인 문제 해결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방인 고넬료 가족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주 예수를 믿게 되자 성령이 강림하게 되었고 그 결과 방언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신적 확증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을 언약 밖의 사람들로 간주하며 이방인의 구원을 부인하였던 유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에게 사도들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동일한 성령을 허락하심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화적, 종교적 장벽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확증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사마리아에서의 성령강림 사건처럼,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ii) 여기서 일부 학자들은 고넬료 가족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세례를 받은 것을 근거로 하여 '先 중생, 後 성령세례' 논리를 주장하는 오순절주의 신학을 비판한다. 오순절주의 신학자들은 사도행전 10장 1절과 22절을 근거로 하여 베드로를 만나기 전 이미 고넬료는 중생과 칭의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의 신분에 들어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사도행전 10장 1절과 22절은 고넬료가 아직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듣기 전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므로, 아직 그는 구원받은 자의 신분이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고넬료 사건을 근거로 하여 '先 중생, 後 성령세례'란 도식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들은 주장하기를, 고넬료 가족은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물세례를 통하여 중생 하였기 때문에 성령을 이차적 혹은 부가적 은혜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할 때 물세례가 곧 중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세례란 이미 갖고 있는 믿음을 공식적으로 교회 혹은 다른 증인들 앞에서 확증하는 표징(表徵)인 것이다.
따라서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물세례를 받을 때 중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주어진 문맥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베드로를 불러 청했던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음이 분명하고, 성령강림은 그 증거로써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성령이 강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고넬료 사건에서도 우리는 성령이 이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여 그들에게 방언과도 같은 특별한 은사를 주심으로써, 성도답게 살고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분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누가의 성령이해가 구원론적이라기보다는 (전도)사역론적임을 확인하게 된다.
6. 에베소 교회에서의 성령강림 사건(행 19:1-7)
이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누가의 저작에서 자주 발견되는 문학적 특징 중 하나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누가는 종종 유사한 종류의 두 개의 기사나 비유 등을 나란히 연속적으로 배열하여 한 쌍(a pair)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곤 한다. 여기서도 에베소 사건은 이 기사 바로 앞에 소개된 아볼로 사건(18:24-28)과 연계되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에베소 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은 아볼로의 변화사건과 연계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 중 하나는 아볼로와 에베소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단지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18:25; 19:3). 물론 여기서 일부 학자들은 에베소의 '제자들'이 단지 요한의 세례만 알았고, 다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였음을 근거로 하여 그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를 본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누가가 누가-행전에서 제자(maqhtai,)라는 용어를 쓸 때 그것은 대부분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인 사도(avpo,stoloi)와는 구별하여, 일반 회중(會衆)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는 용어였다(눅 6:17; 19:37; 행 6:1, 7; 9:1, 10, 19, 25, 26, 28 등등). 이러한 저자의 용어 사용을 참작할 때 우리는 누가-행전에서 '제자'란 비(非)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 교인들을 누가가 제자라고 호칭했을 때 그들은, 비록 아직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의존하지 않았던 까닭에 약간의 부족한 면이 있다 할지라도, 누가는 그들을 충분히 그리스도인들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 '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둘째, 에베소 제자들이 바울을 통하여 처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사실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눅 3:16).
그렇다면 이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들어 알기는 하였으나 세례 요한을 통하여 들었기에 이런 점에서 부족함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음을 기억할 때(마 3:13-17; 막 1:9-11), 오실 그리스도를 선포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을 무효(無效)라고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주장인 것이다.
셋째, 이 기사 앞에 소개된 아볼로 사건을 놓고 볼 때, 에베소의 제자들과 유사한 위치에 놓여 있던 아볼로 역시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만, 그는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가르쳤다"(18:25). 만일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면,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아볼로가 어떻게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즉 요한의 세례 안에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면, 아볼로와 동일한 형편에 놓여 있었던 에베소 제자들 역시 바울에게서 예수님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바울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그들은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 사역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았고, 그리하여 새로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할 때, 에베소 제자들의 성령 받음 사건 역시 이제까지 우리가 누가의 성령론에 대하여 주장하여 오던 견해를 지지해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성령은 이미 주 예수를 믿은 성도였던 에베소 제자들에게 사도 바울의 안수(按手)를 통하여 부어졌고, 그 결과 그들은 사도들과 고넬료 가족들이 그러했듯이, 방언을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예언까지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누가-행전에서 성령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임하면서 성령의 은사를 베풀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도답게 살며 성도답게 사역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7.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신학의 성령론의 특징
(가) 부가적 은혜로서의 성령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세 번의 성령강림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물세례와 함께 성령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8장의 경우 사마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빌립의 전도를 통해 세례를 받고, 그 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게 된다(8:17).
19장의 경우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기는 하였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하게 알지 못한 까닭에 바울의 전도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난 후 성령을 받았다(19:5-6). 이 두 사건에서는 먼저 물세례가 있은 후에 성령의 강림이 있었다. 그러나 10장의 경우 고넬료 가정의 사건에서는 성령이 강림한 후에 베드로에 의해 물세례가 베풀어졌다(10:44-48).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마친 후에 놀라워하는 유대인 무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2:38)는 말씀을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베드로는 물세례와 성령을 연계하여 말하였던 것이고, 사실 이에 따라 이후의 사건에서 물세례와 성령강림은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하였음을 보게 된다.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일부 오순절 파에 속한 신자들은 물세례를 전후하여 모든 성도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며, 따라서 성령 체험의 결과인 방언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물세례를 받은 신자들 모두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방언과 예언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b)는 사도 바울의 구원론적 진술을 근거로 하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되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기록된 물세례와 성령강림을 동일시하면서, 물세례와 함께 언급된 성령 강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특히 이들은 물세례를 받기 이전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고넬료 사건을 예로 들면서, 결국 성령강림과 물세례는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함께 성도 됨(being a christian)을 가리키는 표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들을 근거로 할 때, 분명히 물세례와 성령강림은 별개의 사건으로써, 동일시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장과 19장의 경우 물세례가 있은 후 성령강림과 함께 방언과 예언과도 같은 특별한 은사가 나타났고, 10장의 경우에는 성령강림과 함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난 후 물세례가 베풀어졌다.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되는 8장에서도 사실 문맥을 놓고 볼 때, 물세례 후 발생한 성령의 강림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능력을 수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행 8:19; cf. 고전 12:10). 이렇게 볼 때, 분명히 물세례와 성령강림 및 성령의 은사는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결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여기서 성령론에 있어서 바울신학과 구별되는 누가신학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신학의 입장에서는 (물)세례와 성령강림을 동일시하면서, 예수를 주로 시인(是認)한 자들의 믿음을 담보로 하여 세례를 베푼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예수를 주로 시인함에 있어서 이미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으로 세례 전후의 성령의 강림은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은 단지 세례를 지지해주는 정도의 의미를 지녔고, 따라서 세례와 성령강림 모두 성도 됨의 표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양자는 구별되면서 각기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세례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고 난 후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성도들은 방언, 예언 및 능력과도 같은 특별한 은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넬료의 사건에서 보듯이, 이 순서가 바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강림은 어떤 상태의 표징이 아니라 특별한 은사를 수반함으로써 성도의 삶과 사역에 능력을 제공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령이 강림할 때 지혜, 믿음, 권능, 기쁨, 방언 및 예언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는 물세례의 조건이 될 수 없고, 구원의 조건은 결코 아니지만, 성도를 성도답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제공하는 '부가적 은혜'(donum superadditum; additional grace)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에 모든 성도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공적인 성도의 삶에 긴요하다는 견지에서 볼 때, 사실상 성령의 충만에서 비롯되는 부가적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은혜라고 생각된다.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을 비롯하여 성령으로 충만했던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발견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장을 더욱 지지해준다고 하겠다.
(나) 성령 충만과 결부된 다른 은사들
i)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이 종종 다른 은사들과 결부되어 등장함을 보게 된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6:3),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6:5), '성령과 능력을'(10:38),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11:24),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13:52).
이와 함께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일어난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방언(2:4; 10:46; 19:6), 예언(19:6; cf. 11:28 - 아가보의 예언). 이처럼 성령과 함께 등장하는 은사들은 지혜, 믿음, 능력, 기쁨, 그리고 방언과 예언 등인데, 이것들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에 의해 성령의 은사들로 제시되고 있다(고전 12:8-10).
누가와 바울이 성령 충만의 현상으로 언급하는 은사들이 이처럼 유사한 것은 이런 은사들이 바울의 교회들뿐만 아니라 누가공동체와 1세기 여러 초대교회에서도 보편적으로 발생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이 결코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 자체가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의 자연적 결과로서 복음증거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주어졌음을 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임할 때 성령은 이런 다양한 은사들을 사람들에게 베푸시어, 하나님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원활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심으로써, 교회를 굳게 서게 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ii)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성령의 은사 중 사도행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방언의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강림한 사건은 모두 네 차례이다; 2:1-4, 8:14-17; 10:44-48; 19:1-7.
그런데 이 네 번의 경우에서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를 기술한 8장의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령이 임할 때에 방언도 함께 발생하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에베소의 제자들의 성령 체험을 묘사한 19장의 경우에는 예언도 함께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9:6).
이처럼 성령 강림과 방언이 자주 함께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의 일부 교단에서는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매우 천박한 사람처럼 취급당하며, 극단적으로 구원까지도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첫째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되어야 할 것은, 소위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성령세례는, 앞에서도 잠시 지적했듯이, 사도행전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간주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상 누가는 성령세례보다는 성령충만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같은 정도의 비중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필수과정으로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일부 오순절 교회에서는 오순절 사건, 에베소 사건, 그리고 고넬료 사건에서 성령이 강림할 때에 방언도 함께 발생하였음을 근거로 하여 성령 강림과 방언은 필수적으로 함께 발생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히 사마리아 사건의 경우에서는 방언은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한 번의 예외이기는 하지만, 만약 성령 강림과 방언이 반드시 동시적 발생해야 함을 누가가 의도하고자 하였다면, 이 한 번의 예외조차 없었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와 함께 여기서 방언의 유효성을 잠시 한 번 짚어 보고자 한다. 비록 사도행전에서 네 번의 성령강림 사건 시(時) 세 번에 걸쳐 방언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사실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한데, 과연 무슨 목적으로 그 방언이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냥 단순히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신비감을 제공하는 전시용인지, 아니면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목적이 있는 것인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질문과 관계하여, 우리는 세 번의 방언사건 중 두 번의 경우에서(2장, 10장) 방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표현에 유의하고자 한다. 먼저 2장 오순절 사건에서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다른 방언을 말하였는데, 11절에서 그 방언의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도들의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ta. megalei/a tou/ qeou/)이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10장의 고넬료 사건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6절: h;kouon ga.r auvtw/n lalou,ntwn glw,ssaij kai. megaluno,ntwn to.n qeo,n). 즉 방언을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0장 46절의 '하나님 높임'과 2장 11절의 '하나님의 큰 일'에 사용된 단어, megalei/a와 megaluno,ntwn이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결국 '하나님의 큰 일'과 '하나님 높임'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방언의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방언을 하는 주요한 목적과 동기는 결국 하나님을 높이는 일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
다음으로 우리는 성령론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는 주제 중 하나인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의 관계에 대하여 누가 신학적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누가-행전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했음을 보게 된다; 요한(눅 1:15), 엘리사벳(눅 1:41), 사가랴(눅 1:67), 시므온(눅 2:25), 예수님(눅 4:1); 베드로(행 4:8), 스데반(행 7:55), 바울(행 9:17; 13:9), 바나바(행 11:24); 일곱 지도자(행 6:3). 그리하여 캐드버리(H. J. Cadbury)는 말하기를 "누가-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령 안에, 성령 아래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며, 성령으로 세례 혹은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말하고 있으며 또는 성령이 그들을 통해 말하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은 모두 두 곳인데(1:5; 11:16), 이 두 경우의 공통점은 누가복음에서 이미 소개된 바, 예수님의 장래 사역에 대한 요한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점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의 예언이 이미 성취된 사도행전에서 성령 세례는 크게 강조되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충만은 훨씬 더 많이 등장한다; 2:4; 4:8, 31; 6:3, 5; 7:55; 9:17; 11:24; 13:9, 52. 물론 성령의 충만은 이미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을 비롯하여, 세례 요한, 사가랴, 시므온 등이 경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누가의 두 권의 책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성령의 충만이며, 아울러 여기서 비롯되는 기본 전제 하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필수적 요건이자 근본적 토대 및 원동력이 바로 성령의 충만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逆)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결코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8. 결 론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성령을 믿는 성도들에게 성도답게 살고 성도답게 활동할 수 있도록 능력을 제공하는 부가적 은혜로 제시하는 것이 누가의 성령론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은혜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일부 엘리트 신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의 예언이나(행 2:17-18), 베드로 자신의 권면처럼(행 2:38) 회심한 모든 성도들에게 제한 없이 허락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전에도 분명히 성령은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는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서는 보조자 혹은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나, 이제 오순절 사건 이후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한 없이 허락되면서 주도자로서 활동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나는 누가의 성령론을 사역론적 성령론이라 부르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사역이란 특별히 누가-행전에서는 그 주요한 기록목적 중 하나인 복음전도(evangelism), 즉 선교를 가리킴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는 [선교사역론적 성령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성령은 종말론적이고,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적인 속성을 애초부터 지닌, 삼위일체 하나님 중 독립적 위격이다. 성령은 이러한 본질적인 속성을 지닌 채,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구속사역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및 제자들과 함께 하여 그들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그리스도 대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을 통한 초대교회의 사역에 나타난 성령의 역할을 소개함으로써, 현재 진행 중에 있는 누가 공동체의 선교사역에 신학적, 방법론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함께 하여 그들을 돕고 인도하였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함께 하여 능력을 주심으로써 맡은 바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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