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의 구원론
가. 선행의 은총
웨슬레는 칭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은혜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칭의 받는 믿음은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거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생긴다.
그럼 인간은 칭의 받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칭의의 은혜를 주게 한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믿음을 주시지 않는가?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내린다.
즉 믿음을 받기 위해 인간이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믿음의 선물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능력을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 또는 모든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이 은총은 모든 능동적 응답의 근원이며 선한 욕망,
즉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려는 욕망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또한 이 선행의 은총은 받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모든 자연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응답의 능력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이 먼저 활동하시니 인간도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인간편의 책임인 것이다.
이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믿음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주시는 회개의 촉구를 받아들이고
회개의 합당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한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이 감각적이 되고,
둔감해 있던 마음이 민감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활동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자연인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선행적 은총을 주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웨슬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생기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 인간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회개해야 하는가?
웨슬리는 그의 인간관에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래로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한다.
웨슬레의 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죄인으로서의 상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인간의 상태는 세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이고,
둘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이고,
셋째는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진술은 인상적이다.
웨슬레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라고 진술하였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다른 말로 원죄 즉 죄의 세력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죄로 인해서 사람은 교만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며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
자기를 사랑하여 육체의 정욕대로 움직여 세상의 것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칭찬받고 싶어 한다.
또한 우상 숭배(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존중하고 필요로 하며 영광을 돌림)의
죄를 저지른다.
이로써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죄의 결과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실 그 양심으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선행의 은총을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음으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나. 확신의 은총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게 되며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즉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인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자각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확신의 은총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아담 이후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즉 아담 이후로 인간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확신의 은총으로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확신의 은총으로 죄인임을 깨달아 인정하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렇게 죄인임을 인정하고 포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는 이제 선행의 은총으로 아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믿음은 회개 이후에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죄인인 인간을 참회로 이끄시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웨슬레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참회 또는 죄의 확신을 신앙보다 앞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회는 신앙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이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회에 따르는 업적의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
기회가 없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하여 참회의 신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업적을 이루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같은 참회의 업적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로서 의인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계속적인 역사의 조건으로 참회의 신앙에 따르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의 수준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인간의 측면에서의 참회의 신앙에 따른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으로서의 열매가 갖는
성격은 다만 하나님의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을만한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로서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의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된다. 도덕적 의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의 신앙을
용납하도록 허용한다는 인간의 입장에서의 표시에 불과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다. 칭의의 은총
확신의 은총으로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때 하나님은 복음으로 역사하신다.
그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럼으로써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한마디로 고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라. 의인이 됨
1) 의인의 조건
웨슬레에 의하면 의인, 곧 칭의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웨슬레에 의하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를 인식하고 뉘우쳐 참회하게 되는데,
참회의 열매는 `믿음'을 간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참회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믿음'인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서 의인의 조건은 오로지 믿음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칭의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동시에 반드시 회개,
곧 참회의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이때의 참회를 인간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죄성,
무력감을 깨달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2) 의인의 내용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죄, 곧 죄의 용서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포로 이루어진 구원받은 상태이다.
그럼 이 믿음으로 칭의 받아 얻는 구원은 무엇인가?
첫째 현재의 구원이다.
둘째 모든 죄(원죄, 자범죄)에서의 구원이다.
셋째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현재의 구원이란 현제 이 땅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모든 죄에서 구원이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습관적인 죄나 고의적인 죄 그리고 죄된 욕망에서부터 나온 죄를 짓지 않는다.
죄책으로의 구원은 율법으로 부터의 구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고 정죄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죄책에 대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인받은 사람의 실제 생활이 사실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죄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유죄로 선고하시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마. 신생
웨슬레의 구원론에 따르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거듭남"이라고도 말하는 "신생"의 사건이 설명된다.
이 신생의 사건은 의인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굳이 순서를 논한다면 논리적인 순서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신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이 동일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뜻한다면 신생은 진정한 실제적인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심으로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인간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인간 안에서 일하신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외적인 관계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자녀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인간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킴으로서 죄인을 성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의인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은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이다.
1) 신생의 본질
사람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신생은 자연적인 출생과 흡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고,
그래서 은총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2) 신생의 증거
신생은 신생하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실 때, 혹은 인간의 영혼을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義의 생명의 삶으로 일으키실 때에 인간의 속에서 역사하여 외양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한 신생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화평"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주장(골3:15)"하는 것이며
"흑암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 상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칭의의 상태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둘째는 `소망'이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빌1:23)"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는 죽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희망은 "빛나는 형상" 즉 마지막 심판주로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이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일"
즉 신령한 것으로 다시 지음 받은 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생을 받는 것이다.
희망은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분깃"을 기다리는 것이다
셋째는 `기쁨'이다.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죄과의 용서를 받아서 기뻐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시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희망을 가지고(롬5:2) 크게 기뻐한다"
네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롬5:5)"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가 보고자 하는 대상이었고
마음의 기쁨이었으며 시간과 영원에서의 그의 분깃(영생)"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확신시키시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현제 믿는 바의
구원을 하나님이 구속하실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
바. 믿는 자의 회개
신생한 사람에게도 죄가 있는가?
아니면 이들에게는 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웨슬레는 바울의 주장을 따라서 육체의 정욕에 의한 악한 성질이
신생한 자에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의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는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믿는 자도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함을 말한다.
그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성서의 말은 무엇인가?
신자 안에 아직 싸워야 할 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면 신자는 부분적으로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바울의 말을 우리는 분명히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믿음으로 신자는 과거의 죄책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즉 과거의 죄책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이 악한 정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생한 자의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자가 성령을 따를 때에는
항상 우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웨슬레의 생각은 신자에게는 죄가 없고, 육체에 속한 정욕도 없고,
타락의 경향성도 없다는 생각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따라서 신생한 자도 그 마음 속에 남아있는 죄성 곧 교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우상숭배, 불신 등을 항상 느끼며 산다면 신자가 칭의와 신생함을
받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는 무엇인가?
고집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원하는 것을 가지려는 의지를 더 중요시한다.
자만이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구원이 자신이 책임지려고 한다.
또한 세상을 사랑한다.
이것으로 인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생긴다.
분노와 탐심도 신자 안에 있는 죄이다.
그래서 계속하여 깨어 있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때때로 자만, 고집, 분노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기도 하고 안락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와 향락을 좇게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만도 죄이다.
죄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지 않는 것도 죄이다.
태만은 내적으로 선한 생각을 품으려 하지 않고 외적으로 사랑과 경외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말하는데,
웨슬레가 이 때 말하는 회개는 신생한 자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집과 우상숭배의
경향성, 곧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죄책으로 죽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스스로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신생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신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비하여 신생한 자는 죄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생한 사람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신생한 자도 죄의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죄의 세력과 맞서서 있는데, 그 맞선 상태는 대항해서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사. 성령충만과 성화
1) 성화의 기준으로서의 십계명
신생한 자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든 성품" 즉 "격정과 교만, 육욕과 허영,
야심과 탐욕"에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서 초연하다(요일2:16)"고 한다.
신새한 자는 삶에서 말로서 죄짓는 일들
즉 "거짓말, 허위, 사기, 궤사, 정의나 자비에 어긋나는 말, 비방"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의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행위는 십계명에서 지적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자는 성화된 자이다.
2) 성령충만과 은혜의 수단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물주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물주심"은 성령충만이다.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모든 의식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정해진 수로를 계속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살 때에 성령충만을 받는다.
웨슬레는 구체적으로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미로는 예배와 찬송, 기도이며 도덕적 의미로는 선행, 구제 등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초대기독교의 구원받은 개인들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구만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초대기독교들의 영혼은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했다.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구만둔 것"은 소극적인 것 겸손, 인내 등이다.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은 적극적인 것으로 구제하는 것등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행위인 예배도 적극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3) 점진적이며 순간적인 성화
웨슬레의 이 성화론은 몇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칭의를 포함하는 초기의 성화의 단계로부터 완전한 성화의 단계로
점차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그 사람의 신앙은 계속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점진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성화의 시작은 신생이었다.
신생의 순간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내적인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초기의 성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육의 악한 성질, 악한 생각과 싸우면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성화의 발전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성화의 이 점진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하여
어느 순간에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려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성화의 과정에서의 순간적인 발전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던 것은
`성화'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 자신의 이해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그 자신의 올더스케이드街에서의 하나님 경험으로부터 얻어낸
결론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웨슬레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특징
첫째,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기독교의 진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웨슬레는 이 목표로서의 기독교인들의 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모든 내적.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특징은 동기와 사랑 안에서의 완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때에 그것은 인간 자신의 무지나 실수 등의
제약성을 탈피하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제약성으로부터 벋어나는 자유는 "영화"의 순간으로 미룬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제약성을 죄로 여긴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마음 속에 죄가 있는 상태와는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기가 되는 문제로 보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문제도 그 동기의 순수성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가진 그대로의 완전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에는 사랑과 반대되는 그릇된 性情이 전혀없고 생각과 행동의 전부가
순수한 사랑에 의하여 지배되는 상태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완전한 사람들의 생활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된다.
세 번째의 특징은 순간순간 주를 의지함으로 유지되는 완전이었다.
이것은 웨슬레의 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특징이다.
웨슬레는 죄를 이중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율법을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였다.
그리고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가운데에서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순간순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순간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가능한 완전인 것이다.
네 번째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전도와 봉사의 원동력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결은 윤리적 또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해야 되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은 사랑이어야 한다.
즉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생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론은 복음 전파와 사회 봉사의 동기와 기초를 제공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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