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성경적 뿌리를 찾아서 |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
한국 교회에는 대략 1980년대 말부터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약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이야기되는 어떤 주제이든 ‘영성’이라는 말이 빠지면 흡사 그 핵심이 빠져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이 용어는 매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예배의 영성, 기도의 영성뿐 아니라 직업의 영성, 일상생활의 영성이라는 어구들도 빈번히 회자되는가 하면, 심지어 가난의 영성, 폭력의 영성 등과 같은 표현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 과거에는 영성이 기독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을 받았으나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이 활성화되면서부터, 불교의 영성, 이슬람의 영성, 힌두교의 영성, 인디언의 영성 등 다원주의적인 표현 또한 버젓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이토록 ‘영성’이 무질서하게 난무하는 현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다. 첫째,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영성’이라는 용어 사용이 제멋대로인 현금의 풍조에 대해 하등의 비판 의식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둘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유행하는 ‘영성’과 ‘영성 훈련’ 등에는 다분히 비(非)기독교적(혹은 반(反)기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과격한 제의를 시도하기도 했다.
필자는 상기한 두 가지 극단적 반응 사이에 제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선, 성경 자체가 ‘영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고(둘째 반응의 과민성을 지적함), 또 성경이 언급하는 ‘영성’은 그 안에 일정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첫째 반응의 문제점을 노출함). 그러므로 영성과 연관한 제3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자 하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그 가르침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영성’의 성경적 뿌리를 찾는 것이 이 글에서 필자가 의도하는 바이다.
‘신령한’(spiritual)의 세 가지 의미
▲ 참된 영성은 종교적 의미를 반영하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어떤 특정한 활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형용사형인 ‘신령한’이 신약 여러 곳에 등장할 따름이다. ‘신령한’은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의 번역어로서 ‘영·성령의 영역에 속하는’(belonging to the realm of spirit/Spirit) 혹은 ‘영·성령을 구현하는’(embodying or manifesting spirit/Spirit)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필자는 신약에서 ‘신령한’과 관련하여 세 가지 종류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존재론적 의미 (ontological meaning)
이 경우 ‘신령한’은 ‘영에 대한’(concerning spirit)이라는 의미로써, 영이라는 실체를 염두에 두고서 어떤 존재를 묘사할 때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영’은 어떤 종류의 ‘영’이든 상관이 없다. 우선, 이 영이 인간의 영(human spirit)일 수도 있다 (고전 2:11). 또 어떤 경우, 천사거나(히 1:14) 사단일 수도 있다 (엡 2:2). 심지어 창조주-영(Creator-Spirit)이신 하나님(요 4:24)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전기한 어떤 종류의 영과 관련해서도 ‘신령한’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의 용례를 보라.
(P1) 모든 인간은 신령하다(Every human being is spiritual).
(P2) 사단은 신령한 존재이다(Satan is a spiritual entity).
(P3) 신령성(영성)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Being spiritual is one of God's attributes).
인간은 누구나 비물질적 구성 요소인 영(혹은 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영에 관한 한 ‘신령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P1)이 바로 그런 진술이다. (P2) 역시 참된 진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사단은 천사의 하나로서 ‘영’―이는 하나님과 달리 ‘피조된 영’(creaturely spirit)이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되 천사와 달리 창조주-영(Creator-Spirit)이시고, 이러한 영적 특성 (‘영이심’ 혹은 ‘영성’)은 그 분께서 보유한 여러 가지 속성들 가운데 한 가지이므로 (P3)의 진술 역시 참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진술들((P1), (P2), (P3))은 어떤 주체자의 영적 실체―(P1)은 인간 영혼, (P2)는 피조적 영, (P3)는 창조자―영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론적’ 의미라고 말한 것이다. 이때의 ‘신령한’은 물질적(material) 혹은 신체적(physical) 이라는 개념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바울은 두 곳에서 신령한 것과 육신적인 것을 대조시키고 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15:27)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 9:11)
그런데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오늘 다루고자 하는 영성과는 의미심장할 정도의 상관성을 갖지 않는다.
(2) 기원론적 의미(etiological meaning)
이 경우 언급되는 ‘신령한’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 혹은 사태가 그 기원상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의 ‘신령한’은 주로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데, 이것을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i) ‘~은 신령하다’의 형태를 띤 경우가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4) 율법이 신령한 까닭은 그것이 성령에 의해 계시되고 영감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cf. 딤후 3:16, 벧후 1:21).
(ii) ‘신령한 것’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 때 ‘신령한 것’이 각각의 경우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확히 해야지만 해당 성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알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3~14)
상기 13절에 나오는 ‘신령한 일’과 ‘신령한 것’과 같은 단어인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의 번역어이지만, 각각이 지칭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신령한 일’은 13절 초두의 ‘이것’을 말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12절)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고전 2:2)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이므로, 이렇게 성령께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령한 일’이다.
반면 ‘신령한 것’은 ‘신령한 말들’(spiritual words)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앞에 나오는 ‘성령의 가르치신 것’을 의미하고 ‘인간의 지혜의 가르친 말’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진리를 계시하심에 있어 그 진리가 전달되는 말들(words)까지 통제하셨다는 뜻인데, 바로 이것이 축자 영감론(verbal inspiration)의 근본 사상이다.
‘영적으로라야’는 한 단어로서 프뉴마티코스(pneumatikw'")라는 부사이다. 신령한 일에 관해 듣거나 소개받는 사람이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cf. 엡 1:17). 이것을 ‘영적으로라야’라고 표현한 것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 12: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1)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해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 14:12)
고전 12~14장은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장이다. 고전 12:1, 14:1, 12에 나오는 ‘신령한 것’은 결국 ‘신령한 은사’를 말한다. 은사가 신령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부여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cf. 고전 12:9).
(iii) ‘신령한’이라는 말 다음에 어떤 명사를 대동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롬 1:11)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는 목적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분여하고자함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울이 그들로 하여금 무슨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해준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사도로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은사)을 활용해 그들에게 신앙적 유익을 끼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가 ‘신령한’ 것은 그것이 영이신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4, 46)
여기에 등장하는 대조 항목을 인간론적 구성의 각도에서 관찰하면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언급되는 두 가지 특질의 실체가 모두 ‘몸’으로 되어있어, 흔히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육’과 ‘영’의 대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대조는 현재 우리의 몸(육의 몸)과 부활하게 될 몸(신령한 몸) 사이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부활의 때에 우리의 몸이 ‘신령하게 되는’ 것은 ‘그 몸이 인간의 영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든지 그것의 비신체적 구성과 실체 때문이 아니라…성령께서 신자 속에서 일하시는 최고도의 작동 방식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부활체가 ‘신령한 몸’인 이유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기 때문인 것이다. 46절의 ‘신령한 자’는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육 있는 자’도 ‘육의 몸’이 되어야 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엡 1:3)
사람들은 흔히 복의 내용을 바라던 바의 실현, 자녀의 생산, 재물의 증식, 건강과 장수 등자연적인 것들에만 국한시키거나 그것이 표준인 듯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복은 그런 것들과 전혀 성격을 달리한다. 구원은 성부께서 창안하시고 (엡 1:3~6), 그리스도께서 역사 선상에서 실현하셨으며 (엡 1:7~12),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바(엡 1:13~14)로서, 철두철미하게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이다. 이렇듯 신적 기원의 근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신령한’ 복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 5:19)
‘신령한 노래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상술하고 그 내역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예를 들어, 계 5:9; 14:3; 15:3)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던 구약의 시편과 비슷했다.’ 이러한 노래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감을 입어야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므로 ‘신령한’ 노래라고 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 1:9)
지혜와 총명(이해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신적 기원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지혜와 총명은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주신다(엡 1:8)고 할 수 있다. 구약 시대를 보면 성전 내부 장식의 전문가였던 브살렐은 성령님으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공급 받았고(출 31:3),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부여받았다(왕상 4:29). 따라서 지혜든(약 1:5) 총명이든(딤후 2:7)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3:16)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5)
‘신령한 집’은 신앙 공동체를 집합적으로 표현하는 말인데, 구약의 성전을 기본 사상으로 깔고 있다. 신약 시대에는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며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간다.’ (엡 2:21~22) 다시 말해서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거하심으로써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셨는데, 이것이 곧 ‘신령한’ 집의 실체이다.
‘신령한 제사’ 역시 구약의 제사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드리는 제사는 몸을 바치는 일(롬 12:1),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히 13:15), 재화나 물질을 바치는 일(빌 4:18; 히 13:16), 선행의 제사를 드리는 일(히 13:16) 등이다. 이러한 제사는 영적 예배의 일환으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요 4:24) 드려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까닭에 이 모든 것을 ‘신령한’ 제사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신령한’이라는 용어를 기원론적 의미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령한’과 그 묘사 어구들은 객관적 기원상 ‘좋다’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신령한 은사, 신령한 몸, 신령한 복, 신령한 노래, 신령한 지혜와 총명,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는 모두가 좋은 것들이다. 이들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형성된 객관적 사항들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 이전에 다룬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어떤 존재의 실체론적 성격에 대한 묘사이므로 선악 간에 구별이 없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보아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항시 선하고 좋은 것이다.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한’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더러운’(unclean)(마 10:1; 막 1:23), ‘악한’(wicked)(눅 11:26), ‘육에 속한’(natural)(고전 2:14; 유 1:19)이 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눅 11:26)
(3) 판단론적 의미(axiological meaning)
이 경우의 ‘신령한’은 ‘신령한 자’로도 표기될 수 있는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상당한 정도의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고 판단될 때 붙이는 말이다. 다음의 성구를 참조하라.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미성숙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신령한 자’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무라듯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고전 14:37)
바울은 자신의 편지 내용이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하면서, 만일 어떤 이가 선지자나 혹은 선지자 정도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숙한 이라면 곧 그런 점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 6:1)
바울은 공동체 내에서 범죄하는 이들에 대한 조치를 마련함에 있어서, 올바른 판단력과 성숙한 태도가 관건임을 밝히고 있다. 바로 그런 면에서의 자격을 갖춘 이들은 ‘신령한 너희’라고 부른다.
어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판단론적 의미에서 신령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영적으로 성숙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전항에서 다룬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과 몇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이 객관적 기원상 ‘좋다’라는 것이었다면, 판단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주관적 상태상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자는 율법, 은사, 복, 지혜와 총명, 집, 제사 등과 같은 한 개인과 무관한 어떤 객관적 사항들이 영이신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인정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의 심령 상태 속에 갖추어진 영적 성숙의 면모와 같은 그가 보유한 어떤 특질이 훌륭하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둘째,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기초와 연관이 되는 반면,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은 그러한 기초에 입각해 상당한 영적 훈련을 쌓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성전이라는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인정할 수 있지만, 범죄한 형제들에 대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려면 (즉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이 있으려면) 상당한 신앙적 연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그리스도인이면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것이지만, 판단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일부 소수의 그리스도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판단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이처럼 개인의 영적 성숙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반대 개념으로는 ‘육신에 속한’(worldly: 고전 3:1), ‘어린 아이’(infant: 고전 3:1, 히 5:13) 등에서 찾을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1)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 5:12~14)
진정 참된 영성이란
필자는 지금까지 ‘영성’에 대한 정의를 뒤로 미뤄왔다. 이제 영성의 근본이 되는 단어 ‘신령한’의 의미를 자세히 고찰했으므로, 이에 기초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밝힐 계제에 이르렀다. 영성(spirituality)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견지하는 ‘신령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상태가 가능하려면 세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영성은 영(혹은 혼)이라는 비물질적 실체(invisible substance)를 가진 존재와 연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짐승의 경우에는 영성을 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과 천사가 후보자로 부상하는데, 우리의 토의상 후자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고전 2:11). 둘째, 영성은 영적 실체를 만드시고 붙드시는 하나님(히 12:9)을 고려함 없이 이야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영이셔서(요 4:24) 자신의 피조물 또한 영적 존재로 만드신 것(창 2:7)이기 때문이다.
셋째,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존재인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 및 상호 작용을 전제함 없이 논의가 불가능하다. 이 때 하나님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신령한 상태’를 지칭하는 일은 오순절 이후에나 가능한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령성’의 표현이 ‘70인역에나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상 이것은 오순절 이후에 생긴 단어(an after-Pentecost word)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오순절 이후 성령님의 보편적 사역과 연관시켜서만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배경에 깔고서 필자는 영성을 ‘영이신 하나님 (특히 성령)께서 영적 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지속적 역사를 이루심으로써 그의 심령 가운데 형성하시는 신령한 상태’라고 정의 내리고자 한다. 영성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우리는 참된 영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i) 첫째, 참된 영성의 출발점은 중생이다.
죄인인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단계는 부패하고 죄된 그의 심령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부여받는 일이다. 성경은 이 현상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5~7)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ii) 둘째, 참된 영성의 목표는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중생은 참된 영성을 이루어 가는 시작일 뿐 성숙의 목표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단 중생한 이들은 신령한 자 (고전 3:1; 14:37; 갈 6:1)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고전 3:1; 히 5:13), 장성한 자(히 5:14)로 성장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이 요구된다. 지난 분단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에만 머무르지 않고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을 추구하는 태도와 자세를 말한다.
(iii) 셋째, 참된 영성의 형성은 성령께서 부여하신 자원을 올바로 활용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는 적어도 여섯 가지 사항의 영적 자원을 허락하셨다. 이런 것들을 활용함으로 우리는 참된 영성을 형성하고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갈 수 있다.
① 우리가 신령한 집이 되도록 하셨다(벧전 2:5). :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병입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각자와 공동체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과 긴밀히 연계하여 사역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내주를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연합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고,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연합과 교제를 통해 참된 영성의 형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②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과 신령한 지혜․총명을 허락하신다. :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의 계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적 분별력(고전 2:13~14)과 신령한 지혜 및 총명(골 1:9)을 받아 누릴 수 있고, 이것이 또 우리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③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내려주셨다. :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을 향유하게 하심으로(엡 1:3)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신령한 복을 향유하면 할수록 참된 영성의 형성이 가속화된다.
④ 우리가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신다. (엡 6:19; 골 3:16) : 우리의 노래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성도 간의 교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수단을 옳게 활용할 때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형성된다.
⑤ 우리에게 각양 다양한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롬 12:5; 엡 4:12), 교회가 신앙적으로 든든히 세워지도록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고전 14:12), 서로 봉사하기 위해(벧전 4:10), 그리스도인 사이의 교제를 활성화하고 상호 간의 영적 유익을 신장하기 위해(롬 1:11~12), 우리의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은사들을 사모해야 한다(고전 12:1). 이러한 영적 은사의 활용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성을 형성하도록 돕는 좋은 방편이 된다.
⑥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제사를 드리도록 해 주셨다(벧전 2:5). : 우리가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 또한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바치든지(롬 12:1), 찬미를 하든지(히 13:15), 재물을 드리든지(빌 4:18; 히 13:16), 선행을 하든지(히 13:16)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제사로 간주된다. 이러한 제사 행위야말로 우리의 영성 형성을 이루어내는 구체적 수단이 될 것이다.
(iv) 넷째, 참된 영성의 표징은 사랑이다.
무엇이 참된 영성의 필수불가결한 표징일까? 많은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제일가는 목록으로 꼽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참된 영성의 양도할 수 없는 표징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고린도 교회만큼 풍족히 받은 예도 드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는데 (고전 1:6), 이는 그들이 결국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전 1:7)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풍족했느냐 하면 바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지경이었다(고전 1:4).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 편에서 자세히 설명을 베푼 것(고전 12:4~11) 또한 그들이 은사를 풍족히 누리고 있던 때문이었다.
자, 그러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신령한 자, 곧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웬걸!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3)요,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었다(고전 3:1).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의 풍족한 영적 은사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은,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요 (고전 3:3),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의 파당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1:11~12; 3:4). 그들 사이에 이러한 시기와 분쟁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풍족히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신령한 자)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후에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더 밝히고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열등의식에 빠진 이도 있었고(고전 12:15~16), 반대로 우월의식에 휩싸인 이도 있었다(고전 12:21). 이러한 그릇된 태도를 시정하기 위하여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한다 (고전 12:31 하반). 사실 우리가 사랑 장(章)이라고 이야기하는 고전 13장은 철두철미하게 성령의 은사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바이다.
사랑의 특성으로 제시된 구절들 (고전 13:4~7)은 실상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특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영성의 표징을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 5:22~23)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으로 하면 그것을 통해 참된 영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이 없이 은사를 활용하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요 영적 어린아이임을 노정하는 것이다.
(v) 다섯째, 참된 영성의 원동력은 성령 충만으로부터 생긴다.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인이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성령께 장악되어 그 분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영적 활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간구하지 않아도 될 사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영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님의 소원이실진대,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우리 편에서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나 성령 충만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한 것이다.
(vi) 여섯째, 참된 영성의 실상은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삶, 곧 하나의 삶이라는 데에 존재한다.
참된 영성은 종교적 의미를 반영하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어떤 특정한 활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이러한 삶은 성령님과의 동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는 ①종교적 영역과 일상생활을 망라한 총체적 삶, ②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과정 전체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성경 몇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성령을 언급하는 권면에 있어 함께 등장하는 동사들을 보아 알 수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너희가 만일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8)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상기 구절에서 성령과 연계되어 나타나는 동사는 세 가지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롬 8:4; 갈 5:16)는 ‘성령의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생활하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다’(롬 8:14; 갈 5:18)는 ‘성령의 통제와 주관 하에서 이끌림을 받다’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는 갈 5:16의 경우와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규칙에 맞추어 걷다’이다.
그래서 신국제역(NIV)은 이 동사를 ‘성령과 지속적으로 보조를 맞추다’(to keep in step with the Spirit)라고 번역했다. 이 세 가지 동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주관 하에서 그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그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으로 사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내면적 싸움이 포함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투쟁,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영적 씨름이 없이는 ‘성령으로 사는 삶’을 운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참된 영성을 위한 길로서 참된 영성의 출발점, 목표, 형성, 표징, 원동력, 실상의 여섯 가지 주장을 펼쳤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걸어갈 때, 오늘날 영성과 관련한 혼란한 풍조를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영성이 흡사 성경의 교훈과 무관한 것처럼 이교도시(視)하는 순수주의적 오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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