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계시록 18장 4절) >
박옥수 이단 연구
- 박기영 -
1. 박옥수 그는 누구인가? 2. 교리상의 오류 3. 박옥수 "기독교 대한 침례회"의 특징 4. 박옥수의 설교 내용 종합 5. 그들의 전도 전략 6. 그들은 어떻게 접근하는가?
박옥수, 그는 누구인가?
세칭 구원파의 아류로 알려진 박옥수의 '대한 예수교 침례회'는
그 본류인 '기독교 복음 침례회(교주 권신찬)'보다도 훨씬 더 맹렬한 속도로
교세를 넓혀 가고 있어 교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자칭 목사인 박옥수는 1944년 6월 경북 선산에서 부친 박재들과 모친 최수만의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외지에 나간 박옥수는 화란인 선교사 림욕이 주관하는
금오산 집회에서 감화를 받은 후 구원파 권신찬의 집회에도 참석하여 권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권씨의 사위 유병언등 과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목사가 되려면 정규 신학 과정을 정식으로 이수하고 목사 고시에 합격하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박옥수는 이런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목사를 자처하고 있다.
박옥수의 고향 교회에서는 박옥수와 같은 이단을 배출하여 전국 교계를 혼란시키고 있는
점에 대해 한탄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정규 과정도 거치지 않은 박옥수가 목사를 자처하면서
성서의 편협적이고도 아전인수격인 해석과 식견도 없는 제멋대로의 해석으로 선량한 신도들을
비롯 기성 교회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인간 박옥수의 모습이 별로 밝혀진바 없다.
그 자신이 밝힌 바에 의하면, 1962년 거듭난 후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20여 년 간 교파를
초월하여 말씀의 종으로 전국 각지에서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고 있으며,
현재는 서울 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박옥수 저,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7.5)
언제 신학을 했는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어떻게 대한 예수교 침례회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설교 속에서 보니 그는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에서 땅콩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들이었다는 점(p.23), 1962년에 예수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p.34)과
첫 목회를 대구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김태호씨가 하고 있는 대구 중앙 교회
(남구 대명 7동 213-26, ☎621-6251)가 박옥수씨가 이단교회로 시작했던 곳이라 한다.
교리상의 오류
1. 구원관의 오류
박옥수가 펴낸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 1권과 2권,'두 부류의 신앙'은 그의 설교를 모아
출간한 것으로서 그 내용의 대부분이 구원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책에서 박옥수는 창세기로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죄사함에 대한 방법을 다 알아보았다고
하면서 '죄사함'과 '구원'을 거의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가 '죄사함'과 '구원'이다.
예컨대 눅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해석하는데 그 초점을 구원의 문제와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강도 만난 자는 잘못한 율법사를 가리키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문맥이나 중심 진리는 파악하지 않고 억지 해석을 하는데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그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중생 즉 거듭남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는 좁은 의미의 구원도 있고 거듭난 이후
성화의 단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구원도 있다.
그런데 박옥수는 좁은 의미의 구원에만 모든 관심의 초점을 모아 마치 그것이 기독교 교리의
전부 인양 편협설에 치중되고 있다. 그래서 성경 전부를 좁은 의미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어 억지로 풀게 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과 자비이지
박옥수처럼 억지로 구원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참된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비유인 것이다.
물론 구원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성경에는 중생을 체험한
이후의 과정인 성화 등 신앙생활 전반에 걸친 교훈도 골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맥에 따라서, 성경이 의도하고 있는 올바른 해석이 어떤 것인가를
바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옥수는 성경 전체를 좁은 의미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다 보니까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과 사견을 억지로 성경 속에 집어넣고 해석하게 되고
제대로 된 구원관을 정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죄관의 오류
박옥수는 죄와 범죄를 구별하여 해석함으로써 억지로 성경을 풀고 있다.
그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 1:9)를 인용하여 죄와 범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이것은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는 현상이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그 자체는 아닌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기가 콧물과 기침을 하게 하는 것처럼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도둑질을 했고 거짓말을 했고 살인을 했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고 범죄라는 것입니다.
죄와 범죄는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에서 죄를 자백하는 것은
"내가 도둑질을 했습니다"라고 범죄한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박옥수는 구약 성경에서 다윗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짓고 또한 우리아를 죽게 한 후 괴로운 심정으로
시편 51편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묵상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자체를 고백한 것입니다."
박옥수의 죄관은 바로 이런 점이 주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박옥수는 새벽마다 울고불고 통곡하면서 통회자복하는 기성 교회 교인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범죄 문제만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아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박옥수의 주장대로 라면 죄와 범죄를 구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박옥수는 자신의 생각과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죄와 범죄로 구별하여
해석한 것이다. 마치 대성 교회의 박윤식이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여 억지 해석하는 것과 꼭 같다.
박옥수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증거를 들어보자.
시편 51편에서 박씨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5절 한 절만을 인용했다.
그러나 14절의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박씨가 주장하는 논리를 14절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피흘린 죄'가 아니라
'피흘린 범죄'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박씨는 성경에서 죄와 범죄를 명백히 구별한다고 했으나 그가 즐겨 인용하는 시편51편에 보아도
그런 구별은 없다.
삼하24:10에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다윗의 이 고백은 박옥수의 주장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박씨의 주장대로 한다면 죄가 있기 때문에 인구조사의 범죄를 행했다고 해야 할텐데
다윗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했다고 했으며 그 죄는 큰 범죄라고 하지 않고 다만
큰 죄라고 했으며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지 '종의 범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는 않았다.
또 박옥수는 요한1서1장을 제시하면서 죄와 범죄를 구별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했다면,
우리말 개역성경은 9절에서는 '죄'로, 10절에서는 '범죄'로 번역했기 때문에 성서 원어에 무식한
박옥수는 한글 성경만 보고 죄와 범죄를 구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헬라어 성경에서 이 두 단어는 9절에서는 명사로, 10절에서는 동사로 쓰여졌을 뿐
같은 단어인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auaptina(하마르티나) 즉 '죄'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이와 관련하여
auaptanv(하마르타누) 즉 '죄짓다'는 동사로 되어 있는데 '범죄 하다'라고 바꾼 것이다.
한글 성경 요한1서에서 죄와 범죄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원서 성경과 대조해서 읽어보면
대부분 명사는 '죄'로 동사는 '범죄'로 번역된 것을 알 수 있고 번역 과정에서 문장의 구성상
적절한 단어를 골라 사용하다 보니까 죄와 범죄라고 한 것을 원어를 모르는 박옥수는
이를 억지로 구별하여 해석함으로써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3. 사죄 문제
박옥수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녁 저는 여러분들의 어떤 의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오늘 저녁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
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시고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술을 끊으려고, 담배를 끊으려고 방탕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속에서 그 모든 죄악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박옥수가 주장하는 대로한다면 예수를 영접한 후에는 죄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고 죄를 안 짓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를 안 짓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면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 되고 죄를 지었다면 마음속에
죄가 남아 있으므로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에 대해서 박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들의 논리대로 한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 문제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양심의 가책이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들은 율법 폐기론 적인 입장이 되고 양심에 화인 맞아
마비되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표현하면서 괴로워했으며 딤전 1:13에서 자신이
훼방 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음을 원어 성경에서 과거 시제로,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할 때는 현재 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에서는 현재 시제가 반복적인 행동의 표시라는 것이라고 볼 때 이 말은
박옥수의 주장대로 과거에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는 고백이다.
사람이란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었고 또한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되었으며 죄를 짓고 나서
더욱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박옥수처럼 어떤 이유를 내세워서라도 죄인임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박옥수는 요한 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모세의 율법에 의해 정죄 받았던 여인을 사랑의 법으로 무죄하다는 부분까지만 거론을 하고
그 후반부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예수의 당부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음으로서
성경에서 자신의 교회에 적합한 부분만 주장하고 그 외에는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구원의 마지막 목표는 죄사함만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영생을 체험한 뒤 성화 되어
가는 것이다.
구원도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복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이미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구원을 받았고 지금 현재도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 가고 있으며 장차 구원을 받을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박옥수의 구원관은 초대 교회사에 나타났던 율법 폐기론 자들이나
영지 주의자들과 같은 류의 주장이다.
교묘하고 교활한 여론으로 기성 교회를 공격 비판하고 구원받고 성화 되어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단지 율법적인 열심이라 매도하여 눈물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있는 것을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은 기성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 그 약점을 공격하고 나선다.
박옥수는 기성 교회(침례교회 제외하고)가 구원에 대해 교인들에게 확실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지 못하는 약점과 빈틈을 이용하여 침투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비책이 요청된다.
박옥수 ‘대한예수교침례회’의 특징
왜곡된 구원관으로 신도 미혹 기성 교회 공격· 헌금 강요 등으로 물의 계속돼 빠른 속도로
한국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박옥수의 ‘대한 예수교 침례회’는 세칭 구원파의 아류로 알려진다.
일명 ‘기쁜소식선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단체는 목사임을 자처하는 박옥수란 사람이
전국을 순회하며 체육관 등 대규모 공간을 빌려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부흥 성회를 성황리에 치뤄 내고 있다.
목사를 자처하며 편협적이고 아전인수격인 성서 해석으로 선량한 신도들을 비롯
기성 교회를 놀라게 하는 박옥수의 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이들의 구원관에는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이 빠져 있고, 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빠져 있다. 소속 교인들은 대상자에게‘구원받으셨습니까? 라고 질문함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그들과 접촉해 본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들은 기존 교인들을 만나면 먼저 첫 단계로
①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② 당신은 완전히 중생 했습니까?
③ 당신은 지금 죄가 있습니까? 등의 질문을 던져 확신에 대한 혼란을 일으킨다.
제2단계로 기존 교회의 약점을 들추어(예를 들어, 교인들이 육체적으로 힘들게 생각할 수 있는
새벽기도, 십일조, 성전 건축, 목회자 우대 등의 부당성을 지적함) 기성 교회를 부정하게 한 다음,
제3단계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공포심과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구원 방식에 따라 해방감을 안겨 준다.
양심의 죄책감으로부터의 율법의 억압에서의 해방, 종교에서의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구원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담의 원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성경의 특정 구절에서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거듭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제한하는 편협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전도 대상자가 기존 교회의 교인인 경우 그의 구원을 의심하게 한 다음 과거의 교회 생활이
헛된 종교 생활이었음을 인정하게 하고 여러 성구를 통해 강한 죄의식을 느끼게 해 준다.
그 다음 영원한 속죄(죄사함)에 관계되는 성경 구절을 읽게 해 죄사함을 깨닫게 함으로
확신을 안겨 준다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에게 접근할 때에는 방법을 달리한다.
개인 전도와 5~7일 동안 계속되는‘성경 강연회'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둘러 싼 중동 정세와
환경오염, 인구 폭발, 기아 등 긴박한 시사문제를 거론하여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억지로 주입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3. 구원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한 속죄를 받았으니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과 관계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 은혜를 받을 때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 3:22~2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적으로, 위치상으로 의인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 여전히 죄를 짓는다.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라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을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 시제로 밝히고 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때는
현재 시제를 쓰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박씨는 반 교리적인 이단 집단의 교주이다.
그는 기성 교회와 기성 교인을 공격하는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 불신자 편보다는
신자 편에 더 많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수도 없이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 기도에 참여하는 행위 등을 공격하고, 특히 목사, 장로,
집사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 대다수 사람들이 박씨의 설교를 듣게 되면
기성 교회를 비판하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같은 상황 아래서 많은 신도들이 박씨의 집단에 미혹되어 가정이 파괴되므로써
끝내 파멸을 길을 걷는 사례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기성 교인들은 말씀 중심, 교회 중심, 교역자 중심, 성도 중심으로 개혁할 것은
개혁하고, 이어받을 것은 이어받는 신앙 안에서 더욱 확고한 믿음을 고취시켜야 할 것이다.
박옥수의 설교 내용 종합
박옥수씨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려고 많은 성경 말씀을 왜곡, 도용하고 있으며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설교 내용의 대부분이 옛날 얘기 식이다.
박옥수씨가 자신의 설교 내용을 기록해 놓은 그의 저서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Ⅰ,Ⅱ',
'염소와 양', '잃어버린 아들' 등을 종합해 보면 세 가지를 알 수 있다.
1. 율법의 모든 것을 완전 무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율법의 정의, 의무, 교리 등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
"원수된 것,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5)"라는 말씀을 도용하여
율법을 완전 부정하고 무시하고 있다.
이 말씀은 율법의 교훈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를 폐하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613개의 계명대로 산다면 우리의 목숨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생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 하사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율법의 저주를
폐하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15절은 율법의 저주를 폐했다는 말씀이지 율법 자체를 폐했다는 뜻이 아니다.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또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히 10:28)"
이라는 말씀처럼 율법은 함부로 폐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을 무시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26절∼28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있다.
분명 율법 속에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고 또한 율법을 무시해 버리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2. 죄사함과 구원받는 데에 있어 회개, 기도, 열심, 봉사 등이 필요 없다고 주장.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느니라(엡 2:8)"는 말씀을 왜곡 해석하여, 회개나 기도와는 상관없이 구원받고 죄사함 받는 것이라고 억지 해석하여 자기 주장을 펴고 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서는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도 또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인데 그들은 구원과 죄사함 받는 데에 기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여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가 중요치 않은 것처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또 그들은 훼방하고 있다. 회개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신자의 믿음의 기본이거늘 박옥수씨는 회개하지 못하게 성령을 훼방하고 있다. 마가복음 3장 29절에서는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했다. 또 박옥수씨는 간음한 여자와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단번에 구원받았다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데 간음한 여자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에서 구함 받은 것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라는 말씀 중의 '정죄'라는 것은 율법의 저주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죄되는 것은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정죄되는 것을 폐하신 것이다. 또 정죄된 것을 폐했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도 영원히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한 여자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고 영생의 길을 얻은 것이다. 누가복음 23장 40∼43절 말씀을 보면 강도가 구원받았는데 그것을 두고 박옥수씨가 주장하기를 강도는 단번에 구원받은 것이다. "강도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하고 있다. 물론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 때 강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위해 여러 사람 앞에서 변론도 했고 예수를 믿으면서 분명히 회개도 하였다. 우리가 만약 그 강도처럼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별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예수를 위해 과연 우리가 변론하고 회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항상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 2:17)",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강도는 그 분명한 행함이 있었고 강도의 곁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강도의 행한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의 곁에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3.'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다'라고 의인 행세를 하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회개하여야 한다고 주장. '믿기만 하면'과 '믿음'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왜곡 해석하여 박옥수씨는 자칭 의인으로 행세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특히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를 싫어하는 것을 욥기에서 볼 수 있다. 욥기 1장 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욥을 칭찬하였다. 욥은 두 번째 시험을 만나 결국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다고 한탄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 하니라(욥 3: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6)"라고 탄식하였다. 욥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시험에는 사단에게 손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욥의 문제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신 것은 욥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욥 40:8)",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욥 32:1∼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낄이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욥 32:2)." 이렇듯 욥은 스스로 의롭다 고 교만했으며 더군다나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주장했으므로 교만 중의 교만이 아닐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 주어야 의로운 것인데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이상 세 가지는 박옥수씨의 설교책 모두를 종합하여 세 가지로 분리하여 풀이해 낸 것이다. 박옥수씨의 행위에 대하여 몇 자 적어 본다면, 박옥수 씨는 무조건 자기가 깨달은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아무 곳에서나 말씀을 꿰어 맞추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교만 주의자라고 확실하게 볼 수 있다. 특히 박옥수씨는 설교를 통해 기성 교회의 십일조에 대하여 마구 비난하고 있는데 5분 설교하고 십일조 얘기, 또 5분 설교하고 십일조 얘기를 반복하면서 기성 교회를 비난하고 있다.
구원파의 창시자 유병언씨 계열에서는 많은 파가 분파되어 있다. 박옥수파를 빼놓고 유병언씨의 계열에 큰 말썽을 일으켰던 송채화의 통용파가 있고 또 하나는 강석을의 이꼬르파가 있다. 이 두 파는 간증을 주무기로 하여 아파트를 아지트로 정하고 간증 모임을 열어 왔다. 그냥 간증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간증을 통해 엄청난 금액의 기업 자금을 거두어들인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십일조를 개발비라고 정하고 헌금을 자루에 담아 봉고차에 실어 나를 정도였다. 더군다나 상습 사기 혐의로 구속된 유병언씨 때문에 구원 파의 가면은 벗겨졌고 각종 매스컴, 신문, 잡지 등에 보도되었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파는 사기 집단이고 이단'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인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박옥수씨는 십일조 부분에서 크게 물의를 일으킨 것을 감안하고 기성 교회의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비난하고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무척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직접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요구한다는 것을 탈퇴 신도의 체험 수기에서 볼 수 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의인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아랫사람을 시켜 구타까지 시키는 등의 악행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가.
구원파인 박옥수씨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니골라당에 비유된다. 계시록 2장 5절에서 니골라당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종한 이단으로 표현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율법을 무시하는 박옥수파가 니골라당에 비유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또한 현대의 니골라당, 율법을 무시하고 성경을 억지 해석하는 구원파가 이 시대의 마지막 이단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 1서 4:1)."
위 말씀처럼 어리석고 단순하게 판단하여 시험에 들지 말고 과연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지 한 번쯤 시험해 본 후에 건전한 복음 적인 교회의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같이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억지로 해석해서 자칭 '의인'이라는 자들을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들의 전도 전략
가을이 한층 제 빛을 발하여 깊어 가는 지난 94년10월10일. 서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장충 체육관에는 아침 일찍부터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작은 손가방이나 성경책 등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아 단순하게 운동경기를 관람하려는 인파는 아님이 분명했는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체육관 앞 도로 주변과 입구에서 그 날 집회를 알리는 전단이 돌려지고 있었다.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오전 10시와 오후 7시에 하루 2차례씩 부흥 대 성회를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강사는 자칭 목사 박옥수 씨로 드러났다. 박옥수 씨는 그 동안 그릇된 구원관의 신봉자로 알려졌으며 ‘대한 예수교 침례회’(일명 기쁜 소식 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많은 교인들에게 신앙관의 혼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가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게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야기시킨 인물이다. 그는 주로 지방을 순회하며 집회를 가져 왔는데, 서울에서도 집회를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교세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다수 선량한 성도들이 집회 장소 규모나 ‘대한 예수교 침례회’라는 명칭만 보고 참석, 박옥수 씨의 잘못된 교리에 오염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가운데 일단은 집회 내용을 분석해야 될 필요성을 느꼈다.
10월 11일 오전 10시. ‘박옥수 초청 부흥 대 성회’가 이틀째 열리고 있는 장충 체육관 앞에는 교회별로 같은 차량을 이용한 시도들이 속속 도착했다. 체육관의 로비에서는 박옥수 씨의 설교집 등을 주로 출판해 온 ‘기쁜 소식사’ 간행 서적들이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10시 30분. 처음 5백여 명이던 참석자 1천여 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찬양 인도자의 진행으로 이날의 집회는 막이 올랐다. 박옥수 씨가 단상에 오르자 같이 나온 목사 한 명이 기도를 하고, 이어진 여신도의 찬양까지는 여느 부흥 대 성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찬송과 기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마침내 박옥수 씨의 설교시간이 되었다.
사도행전 1:1~14의 말씀을 주제로 한 박옥수 씨의 설교는 전날에 이어 “내 마음속에”란 제목으로 행해졌다. “명예를 얻기 위해 이것만하면 내가 잘될 수 있다는 욕망을 갖는 사람은 쉽게 죄를 용납한다”는 요지의 내용으로 왕하 5장의 나아만의 예화를 들어 ‘내 생각에는’이라는 생각으로 삶을 산다면 신앙생활에 가장 문제가 된다고 하고, 자기 방법대로가 아니라 신앙은 절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며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갔다. 설교 내용에 있어 특기할 만한 사항은 ○○○ 목사를 들먹이며 “돈 많고 교회가 크면 이단이었다 가도 이단이 아니라고 해주고 돈 없고 교회가 작으면 이단시하는 것이 한국 교회”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단 시비를 둘러싼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를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따라서 내 삶을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선언과 함께 나머지 사람들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것으로 주기도문이나 축도 없이 집회는 대충 끝이 났다.
그와 함께 앞으로 나간 사람들은 상담을 하기 위해 진행 위원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전체적인 집회의 형식과 분위기, 신도들의 반응은 부흥회라기 보다는 일반 강연회 같았고, 집회가 끝나자 상담하기 위해 남은 사람들을 빼고는 별 반응 없이 속속 집회장을 빠져나갔는데 상담을 원한다고 하는 이들 중에는 주최측의 요원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다는 쑥덕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접근하는가?
대한 예수교 침례회 전도자들은 주로 기성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고 우물쭈물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증거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답변하면 언제 어디서 받았느냐고 다그쳐 묻는다. 그리고 당신은 의인인가, 죄인인가 묻기도 하며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아직 의인된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정죄하여 성경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잘못된 교리로 유혹한다.
그 동안 이런 전도 수법에 많은 신앙인들이 미혹 당하였는데, 앞서의 부흥 집회 후 이루어지는 신앙 상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저들과 접하게 될텐데 그들에게 대처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소개하고자 한다.
① 그들은 “귀하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 확실히 기록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라며 접근한다. 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우리는 확실히 알고 믿는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답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
② 그들이 두 번째로 하게 되는 질문, “귀하는 거듭났습니까”하는 질문을 해 오면 “거듭났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5절에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에 따라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좋다.
③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심을 믿습니까?”라고 세 번째 질문을 받으면 “성령님이 내 마음에 계심을 믿으며 더욱 충만해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으며 사도행전 13장 5절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
④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확실합니까?”라고 물으면 “옮겨졌습니다. 요한 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⑤ “귀하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하고 물을 때는 “믿음으로는 의인이 되었으나 행위로는 죄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과 로마서 7장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⑥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회개할 것은 없지만 성화를 위해서는 날마다 회개합니다. 요한 일서 1장 8~9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⑦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은 아닙니까”라고 질문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성도의 견인을 생각할 때 사랑과 감사의 용기를 느끼며 하나님의 공으를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해야 한다.
⑧ “구원받은 것이 확신이 되어 집니다?”라고 물으면 “확실히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⑨ “재림의 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사모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더 큰 상급을 얻기 위하여 날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4장 7절 이하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대답해야 한다.
⑩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첫째,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고, 둘째, 약속의 말씀 위에 있고, 셋째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하신 말씀과 요한 일서 5장 13절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사도행전 16장 31절에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이상은 물론 예를 든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질문에 성경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다시 한번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삶의 중요성과 동시에 올바른 교회 교육의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비단 특정한 이단 집단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는 예방책으로서의 성경 공부가 아니라 진실로 주안에서 확신 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말씀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 처 : 교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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