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일천번제' 바로알기
일천번제 제사, 알고 보니 '한 번'
한국교회에 무지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대해 통탄하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성경이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살핌과 연구도 없이 임의로 해석하고 무리하게 적용하는 목회자와 성도를 바라볼 때 실로 한국교회의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위 '일천번제'다.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신 성경의 사건을 두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1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일천번제는 '1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1천 마리의 생축을 불태워 제사 드렸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一千番祭가 아니라 一千燔祭인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1천 마리의 생축'으로 표현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most important high place, and Solomon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 on that altar". [왕이 희생물을 드리려고 기브온으로 갔다. 이는 그곳의 산당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다](왕상3:4). 그것은 그 산당이 그 시대에 가장 컸기 때문이다. 그곳은 1천 개의 번제 헌물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천일 동안 매일 매일 바쳤다는 것은 솔로몬의 일천번제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솔로몬이 제사장도 아니고 매일 매일 3년 동안 번제 드리는 일에만 골몰했다면 어떻게 왕국을 다스렸겠는가. 그것은 왕이 되고 나서 드리게 된 한 번의 번제에 1천 개의 헌물을 드렸다는 뜻이다. 일천번제는 '1천 날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1천 개의 번제 헌물을 드렸다'는 의미다.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 곧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1천 개 (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더라"(대하1:5b,6). 역대상 29장 21절과 역대하 7장 4∼7절 등 솔로몬의 제사를 다룬 다른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1천 마리의 생축을 태워 제사 드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한 번만 봐도, 이러한 우를 범하지는 않을 텐데. 무속신앙에서 백일 기도 또는 천일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천번제를 그저 그렇게 막무가내로 이해하는 것은 뿌리 깊이 박힌 샤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일까.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면, 일천번제 헌금을 해 보라고들 말을 한다. 3년은 헌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무지하고 공부 안하는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생겨나고 있고, 거기에 회장이니 위원장이니 하는 직함들도 무슨 자랑이라도 하듯이 버젓이 내밀고 다닌다. 일반 성도들이 무슨 큰 잘못이 있을까. 잘못이 있다면 너무 분별없이 따른 무지의 잘못일 것이다. 정말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고도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이용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학도 없을 뿐더러 기복신앙에 물든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화된 신앙을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천번제 헌금의 발생은 교회가 점점 돈을 좋아하는 기복신앙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요, 목회자들의 세속화된 목회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변질을 주도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버리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배교다. 하나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가장 좋은 헌물은 우리의 물질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도 그리하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요일3:20~22).
성경은 결코 돈이나 인간적인 정(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방종교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듣기로는 한국에 일천번제를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 말만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모 목사로 알고 있다. 무리하게 성전건축을 벌려놓고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만들어 낸 것이 소위 일천번제란다. 손해 볼게 없는 장사란다. 무지한 성도들이야 복받는 일이라는데, 그것도 솔로몬이 받은 유사한 복을 받겠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희생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태도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도 계속 번제를 드렸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약의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히브리인에게 희생 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성전 제사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필요가 없느니라"(히10:18). 구약에 드려졌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온전히 드리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스스로 피를 쏟는 희생 제물이 되시므로 구약의 번제를 더는 필요 없게 만드셨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번제의 진정한 의미다. 것은 예수 그리스의 희생을 격하시키는 것이며, 그것에 견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함 받게 하시며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신다. 우리의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란 말이다. 살아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라.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 10:19-22). 즉각 중단해야 한다. 돈을 착취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지한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번제를 희석시키게 하는 행습을 속히 중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약의 번제를 계속 우리 시대에 끌어오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갈보리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먼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물질을 신뢰하게 하고, 물질을 걸고 기도하게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그것이 헛된 경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거니와 사람들의 명령을 교리로 삼아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8~9).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설교해야 한다.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교인들을 무지와 탐욕으로 이끄는 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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