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시인 1913년~1975년. 광주
등단 1934년 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경력 1960~ 숭전대학교 문리대교수
수상 1973 서울특별시문화상
김현승 시 모음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감사
감사는
곧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곧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 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寶石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納辯의 詩로.
◈ 절대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는.
◈ 행복의 얼굴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불완전
더욱 분명을 듣기 위하여
우리는 눈을 감아야 하고,
더욱 또렷이 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숨을 죽인다
밤을 위하여
낮은 저 바다에서 설탕과 같이 밀물에 녹고,
아침을 맞기 위하여
밤은 그 아름다운 보석들을
아낌없이 바다에 던진다
죽은 사자의 가슴에다
사막의 벌떼는 단 꿈을 치고,
가장 약한 해골은
승리의 허리춤에서 패자의 이름을 빛낸다
모든 빛과 어둠은
모든 사랑과 미움은
그리고 친척과 원수까지도,
조각과 조각들은 서로이 부딪치며
커다란 하나의 음악이 되어,
우리의 불완전을 오히려 아름답게
노래하여 준다.
◈ 창
창을 사랑한다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창을 잃으면
창공으로 나아가는 해협을 잃고,
명랑은 우리에게
오늘의 뉴우스다.
창을 닦는 시간은
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
별들은 십이월의 머나먼 타국이라고.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맑은 눈은 우리들
내일을 기다리는
빛나는 마음이게.
◈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이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오늘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플라타너스
나는 너를 지켜 오직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아버지의 마음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견고한 고독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 파도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 꿈을 생각하며
목적은 한꺼번에 오려면 오지만
꿈은 조금씩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목적은 산마루 위 바위와 같지만
꿈은 산마루 위의 구름과 같아
어디론가 날아가 빈 하늘이 되기도 한다.
목적이 연을 날리면
가지에도 걸리기 쉽만
꿈은 가지에 앉았다가도 더 높은 하늘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러기에 목적엔 아름다운 담장을 두르지만
꿈의 세계엔 감옥이 없다.
이것은 뚜렷하고 저것은 아득하지만
목적의 산마루 어디엔가 다 오르면
이것은 가로막고 저것은 너를 부른다.
우리의 가는 길은 아 ㅡ 끝 없어
둥글고 둥글기만 하다.
◈ 새해 인사
오늘은
오늘에만 서 있지 말고,
오늘은
내일과 또 오늘 사이를 발굴러라.
건너 뛰듯
건너 뛰듯
오늘과 또 내일 사이를 뛰어라.
새옷 입고
아니, 헌옷이라도 빨아 입고,
널뛰듯
널뛰듯
이쪽과 저쪽
오늘과 내일의 리듬 사이를
발굴러라 발굴러라.
춤추어라 춤추어라.
◈ 일요일의 미학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 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音符에다 부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만에 편히 쉬던 신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르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워 한다.
◈ 지각
내게 행복이 온다면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내게 불행이 와도
나는 또 그에게 감사한다.
한 번은 밖에서 오고
한 번은 안에서 오는 행복이다.
우리의 행복의 문은
밖에서도 열리지만
안에서도 열리게 되어 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오늘의 햇빛을 따스히 사랑하고
내가 불행할 때
나는 내일의 별들을 사랑한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숨결은
밖에서도 들이쉬고
안에서도 내어쉬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내 생명의 바다는
밀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 희망이라는 것
김현승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상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거리의 노을을 벗기지만 않으면….
희망.
그것은 너의 보석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으면….
희망.
희망은 스스로 네가 될 수도 있다.
다함없는 너의 사랑이
흙 속에 묻혀,
눈물 어린 눈으로 너의 꿈을
먼 나라의 별과 같이 우리가 바라볼 때…
희망.
그것은 너다.
너의 생명이 닿는 곳에 가없이 놓인
내일의 가교(架橋)를 끝없이 걸어가는,
별과 바람에도 그것은 꽃잎처럼 불리는
네 마음의 머나먼 모습이다.
◈ 가을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 겨우살이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의 단어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틈으로 새어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
그러나 구약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 겨울 까마귀
영혼의 새.
매우 뛰어난 너와
깊이 겪어 본 너는
또 다른,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호올로 남은 것은
가까워질 수도 있는,
언어는 본래
침묵으로부터 고귀하게 탄생한,
열매는
꽃이었던,
너와 네 조상들의 빛깔을 두르고,
내가 십이월의 빈 들에 가늘게 서면,
나의 마른 나뭇가지에 앉아
굳은 책임에 뿌리박힌
나의 나뭇가지에 호올로 앉아,
저무는 하늘이라도 하늘이라도
멀뚱거리다가,
벽에 부딪쳐
아, 네 영혼의 흙벽이라도 덤북 울고 있는 소리로,
까아욱∼
깍∼
◈ 겨울 나그네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너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 길을 떠나리라.
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장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
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
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 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해의 낙엽들같이
낯설고 친절한 처음 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
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解凍)의 기적 소리 기적처럼 울려와
땅 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 고독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어 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쉬이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 고독의 끝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도 알게 된다.
신은 무한히 넘치어
내 작은 눈에는 들일 수 없고,
나는 너무 잘아서
신의 눈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무덤에 잠깐 들렀다가,
내게 숨막혀
바람도 따르지 않는
곳으로 떠나면서 떠나면서,
내가 할 일은
거기서 영혼의 옷마저 벗어 버린다.
◈ 다형(茶兄)
빈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 동체시대(胴體時代)
우리는 짧아졌다.
우리는 통나무가 되었다.
우리는 배와 배꼽 아래께서
한여름의 생선처럼
토막 나버렸다.
배는 먹고 또 씨앗을 보존하면서
우리는 마른 통나무로
쌓여 가고 있다.
넝쿨 장미가 그 가슴에서 순 돋아
아름다운 어깨 위로 저 구름에까지
자라가기는 틀렸다.
깊이 생각할 뿌리는 말라,
우리와 우리의 어린것들에게도
남아도는 유희가 없다.
우리는 지금
도끼 옆에 놓여 있다
통나무가 부르는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도끼다.
손바닥에 침 뱉는
든든한 도끼다.
◈ 떠남
떠남 너의 뒷모양은 언제나 쓸쓸하더라.
너는 젊음을 미워하고 사랑을 시기한다.
너는 어머니와 아들같이 친한 사이를
간섭하기를 유달리 좋아하더라.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산을 헐어 길을 닦고
물 위에 배를 띄운다.
너는 왜 아득한 모래 위에 혼자 앉아
로렐라이의 노래만을 부르고 있느냐.
나는 너를 잘 안다.
너는 나의 검은 머리털의 힘을 빼앗고
네가 사랑하는 보석은 진주나 낙엽보다 눈물이다.
네게 만일 세월의 친절이 없었던들
이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떠남 너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더라.
네 앞에 자연은 빛을 잃고 기적은 사라지며
원수도 뉘우친다.
◈ 마음의 집
네 마음은
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다.
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
나의 피를 뿌리고
살을 찢던
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늑한 품속에선
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
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도 같이.
내 작은 손바닥처럼
내 조그만 마음은
이 세상 모든 榮光을 가리울 수도 있고,
누룩을 넣은 빵과 같이
아, 때로는 향기롭게 스스로 부풀기도 한다!
東洋의 智慧로 말하면
가장 큰 것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 가없음을
내 그릇에 알맞게 줄여 넣은 듯,
바래움의 입김을 불면 한없이 커진다.
그러나 나의 지혜는 또한
風船처럼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그것을…
네 마음은
네 안에 있으나
나는 내 마음 안에 살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제 가시와 살보다
제 뿌리 안에 더 풍성하게 피어나듯…
◈ 마지막 지상에서
산 까마귀
긴 울음을 남기고
지평선을 넘어갔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평안한가.
◈ 만추의 시
먼저 웃고
먼저 울던
시인이여
끝까지 웃고
끝내 울고 갈
시인이여
한 세대에 하나밖에 없는
언어를 잃은 시인이여
역사의 애인인 그대여
그대 영혼에게
까마귀와 더불어 울게 하라.
마지막 빈 가지에 호올로 남아
울게 하라
울게 하라
길고∼ 또 깊이∼
◈ 무등차(茶)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십일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 보석
사랑은 마음의
보석은 눈의 술.
어느 것은 타오르는 불꽃과 밤의 숨소리가
그 절정에서 눈을 감고.
어느 것은 영혼의 의미마저 온전히 빼어 버린
깨끗한 입술
그것은 탄소(炭素)빛 탄식들이 쌓이고 또 쌓이어
오랜 기억의 바닥에 단단한 무늬를 짓고.
그것은 그 차거운 결정(結晶) 속에
변함 없이 빛나는 애련한 이마아쥬.
그리하여 탄환보다도 맹렬한 사모침으로
그것은 원만한 가슴 한복판에서 터진다.
나는 이것들을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단단한
하나의 취(醉)함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붙는 태양을 향하여 어느 날
이것들을 던졌다.
그러나 이 눈의 눈동자, 입을 여는 혀의 첫마디,
이 적과 같이 완강한 빛의 맹세는
더 무너질 것이 없어,
날마다 날마다 그 빛의 뜨거운 품안에서
더욱 더 새롭게 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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