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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지상주의'와 집회의 무속화

by 石右 尹明相 2015. 7. 11.

 

'예배지상주의'와 집회의 무속화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에 열심인 아름다운 관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마 전세계의 교회들 중에서

한국교회처럼 공예배가 많은 교회는 드물 것입니다.

특히 전체 교인수의 약 80%가 출석하고 있는 중대형 교회로 가면

더욱 그렇습니다.

주일 아침부터 시작해서 2부예배, 3부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금요일 철야예배, 그리고 토요일 찬양예배에 이르기까지

한주일 내내 예배가 많습니다.

매일 있는 새벽기도회도 명칭은 기도회이지만 그냥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와 찬송이 있으니 사실상 새벽예배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예배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과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우리는 자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6:6)."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제사만 열심히 드리면

그게 곧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조차 삶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주 어기면서도

희생의 제물을 잘 바치거나 화목의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즐기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사는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만 껍데기가 내용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계속 끊임없이 지적한 것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3)."고까지

말씀하셨을까요.

그런데 오늘날도 우리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절기와 주일을 지키고 예배로 모이는 데에는 아주 선수입니다.

그 덕분에 세계에서 등록 교인 출석율 1위는 분명히 한국교회일 겁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도 다른 것은 몰라도 신도들을 동원하는 데는

매우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어찌 하든 열심히 모여서 예배하고

물질을 바쳐야 할 근거를 아주 성공적으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큰 무리를 모으고, 큰 건물을 세우고,

대형 교회를 만드는 데에는 대단한 교회사적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삶이 결여된 예배

 

하지만 문제는 그게 거의 전부라는 데에 있습니다.

매주 아침부터 그리 힘들게 모였으면 거기에 합당한 거룩한 열매가

풍성하게 나와야 정상이건만 신도들의 삶은 그다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흥행하여 사람 모으기에는 큰 성공을 했지만,

오히려 종교 장사로 변질한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진리가 없고, 영혼이 없고, 그리고 실천이 없는 설교가

공예배를 종교 이벤트로 전락시키기도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를 지적하여

"한국교회의 설교 시간은 성도들의 세속주의적 욕망과 목회자들의

 성공주의적 욕망이 만나 춤을 추는 현장"이라고 극평을 합니다.

 

최근 필자는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자주 듣고 있습니다.

헌데 이건 예배가 아니라 무슨 무당 굿거리 같습니다.

도리어 평생 그런 기복적 설교를 듣고서

교인들의 삶이 변화한다면 그게 더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예배는 매주 무당 목사의 '원맨쇼'를 매우 비싸게 관람한 후

'아멘'과 '할렐루야'로 답하면 그게 끝입니다.

한국교회는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라는 말밖에 모른다는 탄식이

괜히 나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인들의 눈에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향기를 잘 느끼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모두 경건하고 독실한 신도들인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갑자기 그 향기가 실종됩니다. 과연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그리고 어쩌다가 고작 간증한다는 것이 주로 이상한 은사를 받았다던가,

병이 나았다던가, 남편이나 자식이 성공했다거나, 아니면 부자가 되었다는

'복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회자들은 그걸 믿음의 큰 축복이라고 화답하며

신도들을 그 방향으로 고무시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복이 없으셔서 평생 그리 가난하게 사셨던가요?

왜 우린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무수히 고난을 받고

지지리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잘 안 할까요.

예수님을 믿어도 사업에 망하고, 중병에 들고, 승진에 탈락하고,

시험에 낙방하고, 그리고 동네 거지 나사로처럼 가난할 수 있다는 말은

왜 안 가르치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을 그리스도의 작은 제자가 된 기쁨으로

감사하게 살고 있다는 놀라운 간증은 왜 보기 힘든지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목사는 교인의 삶이 변화하도록 성실히 노력하는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그저 예배만 열심이면 과연 만사가 형통할까요.

왜 오늘날 그 많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교회돈을 횡령하거나

교권 남용, 뇌물 수수, 성추행, 표절, 세습, 성직 매매, 황제 식사, 사치 골프,

잦은 해외 여행, 고소 남발 등 목회 만행이 그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예배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것을 상업화하고

헌금을 많이 걷어 사욕을 채우려는 사악한 세력들이

분명히 교회 내에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요즘 개신교 목사님들께서 못 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거꾸로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말로는 주의 일을 한다고 아름답게 생색을 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사익을 챙기기 위한 종교 사업에 열을 내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던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사랑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사랑의 삶'은 성실히 실행하지 않으면서 그저 예배만 뜨겁게 드리고 세속적 복을 듬뿍 받으면 되는 것으로 자족합니다.

그래서 작금의 개신교는 세상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 교회'가 되지 못 하고,

허구한 날 온실같은 예배당 속에서 응석을 부리는 '병아리 교회'가 된 것입니다.

 

공예배를 잘해도 망한 교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제사를 아주 잘 드렸어도 망했습니다.

그들보다 더 제사를 철저히 잘한 민족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외형상 바리새인들보다 더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들보다 더 십일조를 잘한 교회도 찾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과 한 세대 후에 모두 몰살을 당했습니다.

아무리 제사를 잘 드리면 뭐합니까.

그것이 종교 장사로 변질되어 종교지도자들의 배만 불리고

단지 백성을 우민화하는데 이용되었을 뿐인데요.

중세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교회당 속에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서 주일마다 엄숙하고

장엄하게 미사를 잘 드렸지만 그래도 결국 망했습니다.

겉만 화려하면 뭐합니까. 속이 썩었는데요.

겉모습은 아방궁이었지만, 속은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나는 교만하고 호화스러운 교황적 미사에 대해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고

 진리를 말하노라. 세상이 이 미사로 인해 전적으로 황폐할 것이고,

 멸망할 것이고, 상실될 것이고, 그리고 파멸될 것이다."

이는 1534년 어느 개혁자에 의해 프랑스 전역에 퍼졌던 벽보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 벽보는 성직자 중심으로 변질된 타락한 미사에 대해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어떤 교회들은 그 중세적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한국교회에 예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라리 그 많은 대형 교회들 중에 단 몇 교회만이라도

그 우아한 주일 2부 예배를 잠시 보류하고 그 시간에 소외받는 노숙인이나

이웃들을 찾아 그 기름진 십일조를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었다면

이리도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일마다 사랑과 헌신을 열심히 설교하면서 실제는 사랑을 별로

실천하지 않는 표리부동한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가 아닌지요.

매주 교회 헌금을 그토록 열심히 모아서 도대체 우린 지금껏 뭘 하고 있던 걸까요.

큰 건물을 세우고 귀족 목사님들에게 고급차와

고액 연봉을 풍성히 주자고 모이는 것인가요.

아니면 아직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보다 더 크고 중요한

다른 사역이 있다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예배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 사역'입니다.

제사의 본래 정신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도들을 통해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며,

그리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주요 문제 중 하나는 예배의 문제입니다.

예배의 겉모습은 경건한데 삶이 방자합니다.

예배는 거룩한데 삶이 저속합니다. 예배는 화려한데 삶이 공허합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는 뜨겁게 하늘을 펄펄 나는데

일상의 삶 속에서는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어떻게 하든 예배를 보암직하게 잘 포장하여

종교적 야욕을 채우려는 배역한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예배라는 신성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신도들을 모으고,

예배를 명분으로 신도들을 교회당 속에 가두고, 그리고 예배를 제사화하고

바침을 강조하여 교회와 직분자들이 부를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동네는 물론이고 가난한 서민들이 사는 빈촌에도

성채같은 예배당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교회 역사를 보십시요.

진리가 누락된 곳에는 언제나 과장과 포장과 치장이 성행하는 법입니다.

또한 진리가 어두워진 시대일수록 교회당 건물이 커지고,

예배가 화려해 지고, 성직자의 옷이 요란을 떠는 법입니다.

왜 예수를 따르기 위해 예배당을 사치하게 건축해야 합니까.

왜 소박한 예배에 목사가 제사장 가운을 입거나

치렁치렁한 영대를 두르고 법석입니까.

어떤 목회자는 "영대는 목회자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예배 집례자에게 겸손을 상기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주장을 하시지만, 마치 중세 사제를 연상케 하는 그 무당같은 복장이

정말로 겸손하게 보이십니까.

초대교회의 사도들조차 그런 불필요한 복장을 착용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지금 우린 예배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속화하고 상업화하여

직업종교인들에 의해 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은 예배 의식에 몰두하는 삶이 아니라,

성도의 삶이 직접 제물이 되고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손수 제물이 되셔서

그 모든 제사를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구약적 제사와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예배의 진정한 의미는 매주 모여 헌금이나 봉사 따위를

걷어 바치고 복을 구하는 종교 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체인 성도들의 삶이 온전히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신자 자신과 공동체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일상의 삶이 곧 '거룩한 사역'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샬롬!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12:1)."

 

신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