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여, 목사의 야욕에 춤을 추지 마라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있는가,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있는가
목사의 권위와 현란한 말을 무기로 절대군주에 등극한 교역자
‘소망’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다.
‘희망’ ‘꿈’ ‘대망’ ‘욕망’ 등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말로 영어로는
wish, hope, desire, dream, aspiration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말 ‘소망’을 이와는 좀 다른 의미로 쓰는 경향이 있다.
부활과 영생을 바라거나,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을 바라거나,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거나 하는 등의 영적인 미래에 대해 바라는 것을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쓰는 ‘소망’과
기독교에서 신앙적으로 쓰는 ‘소망’의 의미는 다르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소망’이라는 말을 써선 안 된다는 건 아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무엇인가를 바란다는 것은 가슴 설레도록 아름다운 일이다.
방금 말한 영적인 미래를 의미하는 ‘소망’은 말할 것도 없고
‘꿈’이라든가 ‘비전’ 같은 것도 그렇다.
그러니 목사들이 목회에 대한 꿈이나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아니 꼭 가져야 한다.
그것을 가지지 않는, 그것이 없는 목사는 목회적 생명력을 잃고 만다.
살아 있으나 죽은 목사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를 하나님과 교인들이 아니라 목사 자신을 위해 한다는 데에 있다.
목회의 꿈이라든가 비전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교인들을 위하지도 않고
목사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루어 가려 한다는 데에 있다는 말이다.
큰 교회를 목표로 세워 놓고 그것을 목회비전이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많다.
개척 당시에는 작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
성경정신에 부합된 교회를 만들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던 얼마 안 되는 사역자들조차
교회가 커지면 좀 더 큰 교회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느라
하나님도 교인들도 관심 밖으로 밀어내고 만다.
관심이 남아 있다 해도 상대를 위한 관심이 아니라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한 관심이다.
큰 교회가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고,
큰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많이 모여 주어야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도 그랬다.
개척 당시에는 교인 한 명 한 명을 상전 모시듯 하였다.
기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성공한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살고 있는,
기도를 많이 하시는 노인 권사님 한 분을 모셔 와 등록하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기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겸손하기도 했다.
목사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자주했다.
교인수가 놀라운 속도로 늘어갔다.
상가 2층의 좁은 공간에서 창고처럼 허술한 것이지만 1층의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개발지역의 땅을 사서 교회를 지어 다시 이사했다.
그리고 또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시의 외곽지역에
넓은 땅이 하나 매물로 나오자 그 땅을 사서 교회를 짓자 했다.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자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나
큰 것은 힘이 있다’며 밀어붙였다.
주보에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큰 것은 힘이 있다’는 말을
교회의 새 표어로 등장시켰다.
목사는 교묘한 말로 교인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자신의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났는데도 말을 이어 가는 동안
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그는 목사라는 권위와 현란한 말을 무기로 하여 교회의 절대군주로 등극하였다.
결국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땅을 사고 건축은 시작되었다.
그 후의 일들이 더욱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법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지만,
이 글이 하고자 하는 말에선 사족이 되기에 이 정도로 그만둘까 한다.
교회가 커지면 좋은 건 목사뿐
그 목사뿐 아니라 개척을 시작하면 어느 목사가 됐건 거의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쥐면 깨어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하는 소중함으로 대한다.
그러나 수가 늘어 100명이 되고 200명이 되어 감에 따라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교인들은 더 이상 소중한 존재가 아니게 된다.
그러니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여 커지면 좋은 건 목사뿐이다.
개척 당시에는 교인이 상전 대접을 받았으나 교회가 커져 감에 따라 목사가 상전이 된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목사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군왕처럼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 든다.
큰 교회의 목사는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교인들은 어떤가. 교회가 커져서 무엇이 좋은가.
큰 교회의 장로나 권사, 집사라는 것, 아니면 큰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라면 몰라도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무엇 때문에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목사의 목회 야욕에 덩달아 춤을 추는가. 왜인가. 그건, 그건 말이다, 착각 때문이다.
착각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무엇인가를 실제 또는 사실과 다르게 잘못 느끼거나 지각하는 것이 착각이니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실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것이 착각이니 그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은 왜 그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강요된 착각이다.
목사들에게 강요당한 착각이다.
목사들은 교회를 크게 키우겠다는 ‘야욕’이 하나님의 뜻에 배치됨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목회의 ‘비전’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교인들에게 가르친다.
아니 주입시킨다.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들이 왜 그 같은 착각을 하게 된 것일까.
조금만 생각하면 초신자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인데,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그들이 왜 그 같은 착각을 하게 된 것일까.
욕심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도 아니고 교인들을 위하는 일도 아닌 자기를 위한 욕심 때문이다.
욕심으로 눈이 멀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딘 것이다.
욕심은 육신의 배엔 기름기를 올리게 하나 영혼엔 독약이 된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큰 교회가 아니라 바른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교회, 성경말씀에 따르는 교회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간단한 것을 목사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비전 어쩌고 하며 나대는 것은 한 번 더 강조하거니와 그 몹쓸 욕심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을 생각하니 그리된 것이다.
교인들을 위해 목사가 있는 것인데,
자기들 목사를 위해 교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다.
결국 목사들의 욕심이 교회도 망치고 교인들도 망쳐 놓았다.
목회비전이라는 탈을 쓴 그들의 야욕이 바이러스가 되어
한국교회를 중병에 걸리게 했다.
이제 교회도 살고 나를 포함한 교인들도 사는 길은 달리 없다.
교인 하나하나가, 내가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다.
비전이라는 탈을 쓴 목사들의 야욕놀이에 덩달아 춤을 춘,
춤까지는 아닐지라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긴 하지만
침묵으로 무언의 동조자가 된 나도 그들과 그리 많이는 다르지 않은
신앙파괴의 주범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가슴을 치지 않는 한 교회에도 나에게도 ‘소망’은 없다.
어중이떠중이 다 나서서 개척한 교회들
교인들은 자신이 목회의 길로 나서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한다.
물론 목회를 할 수 있는 달란트와 그에 따른 소명이 있음에도
그것을 사장하고 다른 일을 한다면 아까운 일이다.
일은 그게 무엇이 됐건 달란트에 따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달란트 없이 하는 일은 힘만 들고 성과는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달란트에 맞춰 하는 일은 즐겁고 행복할 뿐 아니라 거두는 열매 또한 풍성하다.
목회라고 다르지 않다.
달란트가 없는데 시작하여 고생만 죽도록 하며 허덕이는 목회자가 어디 한둘인가.
개척을 시작하여 몇 년이나 지났는데 교인수가 열 손가락에도 못 미치고,
십년이 가까워지는데도 스무 명도 안 되는 교회도 부지기수이다.
그런 교역자는 미련 없이 교회 문을 닫아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인데, 그럴 수 없다 하지 마라.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교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이 그 지리한 고생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설령 좋아서 스스로 동참하고 있는 이들이라 해도
그들을 매고 있는 고생의 사슬을 풀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사람을 통해 실천하는 길이다.
권하노니 그대들이여,
목회는 달란트가 있는 목회자들에게 맡겨 두고 교회를 떠나라.
고생스럽지만 참고 버티다 보면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교인수를 늘려
교회를 키워 주실 지도 모른다는, 그런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말고 떠나라.
그 같은 요행은 그대의 착각일 뿐이다.
오랜 세월을 준비하고 시작하여 목회에 써 버린 세월 때문에
세상일에 무능해졌을지라도 떠나라.
먹고 사는 게 걱정스러워 두려울지라도 용기를 내어 떠나라.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할 일이다.
달란트가 없어 가족을 포함한 교인들을 고생만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놓지 못하고 붙잡고만 있는 것은 하나님을 근심케 하시는 일이 된다.
그러니 안심하고 떠나라.
이 말에 속이 몹시 상할 목사님들도 계실 줄 안다.
농어촌 교회의 목사님들이다.
농어촌이 피폐되어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도시로 떠나다 보니
교인들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교회를 떠나고 싶어도 양들을 남겨두고 그럴 수가 없다.
사례금라고 받은 돈은 생활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문제해결의 방법은 달리 없다. 도시의 큰 교회들이 돕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큰 교회는 이를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아니 죽든 살든 불에 타든 관심 밖의 일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교회의 대형화를 향한 행진에만 있다.
내 배에 기름기 올리기에만 있다.
그런데 농어촌의 작은 교회 목사라고
다 양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나고 싶어도 도시에서 오라는 교회가 없다.
그렇다고 입에 거미줄을 치게 할 수는 없는 일,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도시의 큰 교회들에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뭐가 됐건 지나쳐선 곤란하다.
교회는 뒷전으로 물려 놓고 큰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 청하는 걸
본업처럼 여기는 목사도 없지 않다 하는데, 심히 우려되는 현상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있다.
도시로 다 떠나고 사람이 없다 하지 말 일이다.
교인 수가 그 지역 인구의 몇 퍼센트나 되는가.
100%인가. 그에는 못 미치지만 90이나 적어도 80%는 되는가.
그렇다면 그 교회의 목사는 참으로 훌륭한 사역자이다.
그러나 4, 50%에도 못 미친다면 농어촌이 피폐되었기 때문이라 해선 안 된다.
지역 사람 모두를 교회에 나오게 하겠다는 각오로 기도하며 땀을 흘린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시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씨알도 안 먹히는데 입으로 하는 전도에 열을 올리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가까이 해 보라는 것이다.
농번기에 일손이 되어 주기도 하고 농한기엔 말벗이 되어 시간을 나눈다.
그러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보여 주는 것으로 전도를 하는 것이다.
그냥 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지 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 기도하며
온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어떻게든 길이 열릴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열어 주실 것이다.
농어촌 교회뿐 아니라 도시의 미자립 교회 목사들도 이 같은 마음의 자세,
신앙의 자세로 나간다면 길은 반드시 열릴 것이다.
말이 좀 옆길로 흐른 감이 없지 않은데, 본줄기로 들어서 보자.
결단을 내려야 할 목회자가 딴전을 부리고 있으면 교인들이 떠나는 수밖에 없다.
잘못된 인정(人情)은 상대방을 파멸의 길로 이끌기도 한다.
목회자의 요행을 바라는 불신앙에 일조일망정 하지 말고 떠나는 것이
목회자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이다.
포화상태의 교회에 빈자리까지 많은데 개척은 왜 하나
말이 나온 김에 교회개척을 생각하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먼저 자기에게 목회에 대한 달란트가 있는지부터 확인해 볼 일이다.
자기에게는 목회의 소명이 있다고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달란트가 없는 사람에겐 목회를 하라는 소명 같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
옛날에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선 목사를 교역자로 모시기가 힘들었다.
목사가 부족하다 보니 전도사를 교역자로 모시고 신앙생활을 했다.
교역자 한 분이 인근의 두 교회를 맡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섬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목사안수를 받아도 교회 하나를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교단의 신학대학마다 다투어 학생 수를 늘리고,
여기저기에 신학교 간판이 내걸려 그야말로 우후죽순을 연상케 한다.
자격도 자질도 형편없이 모자라는 사람을 모아들여
몇 개월씩 교육을 시켜서는 안수를 주어 목사를 양산한다.
그리하여 목사들이 차고 넘쳐 갈 데가 없다 보니 어중이떠중이 다 나서서 교회를 개척한다.
사실 그런 것을 가리켜 개척이라 하는 것은 안 될 말이지만,
여기에서 그것까지 탓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교회라고 시작은 했으나 교인들이 와 주지 않는다.
능력(달란트)도 없고 땀도 안 흘린다. 기도도 안 한다.
기도라는 걸 하기는 하는데 ‘주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라 빌고 빈다.
그러니 교회가 될 리 없다. 그렇다고 산입에 거미줄을 치게 둘 수는 없는 일,
큰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도와 달라 구걸을 일삼는 목사들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필자는 신학교 시절 동급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졸업하면 목사안수를 받든 안 받든 개척은 하지 마라.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도와 드리는 것이다.
한 집 걸러 교회라 할 정도로, 한 건물에 교회가 두세 개나 들어 있기도 할 정도로
교회가 포화상태인데, 거기에다가 대부분의 교회는 빈자리가 많은 게 현실인데
당신들까지 개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곤란하시겠느냐.’
대충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필자의 진심이 녹아 있는 말이었다.
이래저래 교회와 교인들만 죽을 지경이 되었다.
교회들은 쇠퇴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교인들의 신앙은 병들어 가고 있다.
대형교회이든, 중간규모의 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개척교회이든,
어떤 교회이든 문제없는 교회는 거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주로 목사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교인들의 책임 또한 작지 않다.
여기에서 목사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열거하진 않겠다.
교인들의 문제도 시시콜콜 따지진 않겠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몇 마디 진언(進言)하 듯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비전이라는 미명으로 진행되고 있는 목사들의 목회야욕행진에 덩달아 춤을 추지 말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참아 묵언으로 동조하는 결과도 낳지 말고,
기도하며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라고 하는 말만은 하고 싶다.
이래도저래도 안 되면 떠나는 수밖에 없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교인들이 하나님의 교회 아닌 교회를 떠나
하나님의 교회로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엎드려 비는 마음으로 목사들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다.
교인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교회 아닌 하나님의 교회로 만들라.
그러면 교인들은 빠져 나가지 않고 오히려 모여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아닌 교회인데도 교인들이 많은가.
그것은 그대가 사기를 친 결과이고, 교인들은 사기당한 것임을 알라.
그리고 기복신앙을 역설하여 교회부흥을 꾀했다면
그대는 이단적 요소를 적잖게 지니고 있는 자이다. 이단이라는 말이다.
교회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 와 하나가 된 우리이다.
물론 목사도 우리이다.
그러나 목사가 목사 아닌 우리를 자신의 야욕에 이용하려 든다면 그는 우리가 아니다.
교사가 학생을 위해 있는 것이지 학생이 교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 듯,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 같은 관계, 목가가 교인들을 위하는 관계에서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목사가 교인들을 제 목회성공의 요소쯤으로 생각한다면
교인된 우리로선 그와 함께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목사들이여, 큰 교회를 목회의 비전이라 착각하지 마라.
비전이 아니라 비전의 탈을 쓴 야욕일 뿐이다.
그리고 교인들이여, 목사들의 야욕에 춤을 추지 마라.
목사를 추락시키고 나도 멸망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목사가 교인들을 사랑으로 섬겨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인들이 목사를 신뢰와 사랑으로 대할 때 거기에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건강하여 진정한 성장을 이루어 가고,
목사와 교인들 모두의 신앙을 살찌우게 한다.
성삼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영글어 가게 한다.
임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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