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칩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작년에 <목회와 신학> 부탁으로 썼던 글을
여기 다시 올려 여러 분들이 유익을 얻도록 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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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민주당과 오바마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건강보험개혁법이 미국 국회를 통과하고 2010년 3월 23일에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건강보험개혁법에 따라 그 동안 가난해서
건강보험에 들 수 없었던 미국시민 중 3,200만 명이
정부 보조 등을 통해 의료보험에 가입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새 법안에 미국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체에 삽입하는
기구(device that is implantable)에 대한 언급이 있다.
미국 국민이라면 유사시 병원에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개인의 의료 정보 등이 담겨 있는 베리칩(verychip=verification chip),
즉 일종의 무선식별(RFID) 장치를 몸에 이식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NBC는 “2017년까지 우리 모두 몸에
(이런) 칩(chip)을 이식하게 될 것”이라고 예보하였고,
특히 2013년부터 시행된다고 발표한 이후에 미국에서나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언급되고 있는 베리칩은 미국의 어플라이드 디지털
솔루션스(Applied Digital Solutions, www.adsx.com)사가
선보인 마이크로 칩(microchip)이다.
앞으로 이에 GPS 기능을 추가하면 이를 이용하여
개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인체 안에 이 미세한 마이크로칩을 주입해 인체 정보를
손쉽게 관리하기 위해 고안한 전자 인식 도구인 베리칩이
의료 정보 파악 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이 베리칩을 사용할 때에는
인권침해의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권 단체들은 이에 대해 끊임없는 반대를 하고 있다.
사람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인권 보호에 근거해서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는 그 사람이 동의할 때에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대한 상당한 정보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인권 침해의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논의를 위한 원칙의 설정
그러나 이것을 종말론과 연관시켜서 논의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지닌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요한계시록 13장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베리칩이 이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표인 666이라고 주장하고,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베리칩의 이식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몇 기독교 단체가 베리칩을 받지 말자는
문자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냈으며, 몇 분의 목사님들이 설교 중에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베리칩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분명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만일에 베리칩이 참으로 짐승의 표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이유에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이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짐승의 표인 666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어떤 것을 우리 사회의
어떤 현상과 1:1 대응식으로 논의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논의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기로 하자.
이런 생각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 표를 이마나 그 오른 손에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리니”(계13:17)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마이크로칩을 주입시키는 곳이 이마나
오른 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차 인간 사회가 고도의 전자 사회가 되면
이런 것이 없이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해석들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꼭 이마나 오른 손에 주입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베리칩이 짐승의 숫자인
666이라는 주장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주장이 된다.
또한 베리칩이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명확히 단언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의 기술로는 전자 장치와 인간의 정신이
상호 작용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이 이런 일에 관여하는
지금까지의 과학자들의 일반적 생각이다.
“짐승의 표”인 666의 진정한 의미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13:16-18이 말하고 있는 “짐승의 수”,
즉 “사람의 수”(계 13:18)라고 하는 666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다른 숫자들과 같이
“상징적 숫자”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 “666의 상징적 의미는
요한 계시록 해석에서 가장 많이 논쟁된 것이다.”
이 짐승의 표를 이마와 오른 손에 받는다는 것은
종들에게 주인의 표시를 하던 옛 관행을 반영하고 있는
심상(心象, image)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타락한 이 세상을
찬탈하고 있는 세력의 종노릇하면서 산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건전한 해석에 의하면,
이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것을 주와 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에게 속해 있다는 표, 즉 그런 특성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 속에서는 그런 사람들만이 사회적인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것들을 주와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나사렛 예수님과 성부와 성령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짐승의 표, 즉 이 세상 주관자들에게 속해 있는
특성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정체성과 안정감을 주는” 것이다.
666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완전수인 7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숫자로 사용된 듯하다.
“육(6)이라는 수가 하나님의 수인 7에 대해 항상 모자란다는 점에서
사람의 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헨드릭슨은 이것이 악의 “계속적인 실패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를 세 번이나 겹쳐 표현함으로써 아마도 요한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말하며,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이런 악함(즉 “짐승의 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이 세상은 지속적으로 악함이라는 짐승의 표(특성)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원칙에 의해서만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런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성격을 지니지 않고,
그런 특성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이 세상의 원리를 거슬러 나아가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속적 악함”이 “이 세상의 삶의 원리”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는 상징적 숫자”인
666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 원리에 따라 살아가지 않는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인정하면서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이 세상 가운데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베리칩을 몸속에 이식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악한 세력에게 속한 “표”(특성들)을
가지고 사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표”(특성들)을 가지고
그것을 드러내며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요한이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 가운데서 성경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데도 이 세상적 원리에 따라 살고,
이 세상적 특성을 나타내며,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자신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게 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 것인가, 성공적으로 살 것인가, 멋있게 남들이
부러워하게끔 살 것인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왕이시며
유일하신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신의 존재 전체로
섬기며 살 것인가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소위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구별된 의식과 삶의 태도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표를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들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리칩을 몸속에 이식하는가 아닌가가
짐승의 표를 가지는가 아닌가가 아니고,
진정 하나님 백성의 특성을 가지는가 아닌가가 보다
근원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베리칩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따라서 베리칩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베리칩을 사용하면, 갑작스러운 사고가 났을 때
그 사람의 모든 의료 기록에 순간적으로 바로 접속할 수 있게 하여
그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를 빨리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의
유익한 점도 있으나, 그 자신의 동의와 관련 없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를 쉽게 접속하여 잘못 이용하게 하는 위험에 노출시키는,
그리하여 인권 침해의 소지를 줄 수 있는 베리칩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종말론이나 요한계시록과 관련 없이
우리들이 흥미롭게 논의해 볼만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가운데서 명확한 기준을 주지 않기에
우리가 중생한 이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것이
최선의 것인지를 생각하며 논의하는 일반 은총 영역에서의
논의로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의 하나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각자의 지식과 판단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신속한 의료적 돌봄과
도움을 위해 이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종국적으로 분석해 보면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이를 사용하는 것이 편안하기는 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아디아포라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성경의 입장을 존중하는 사람들로서 어떤 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욱 좋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각자 신실한 의견을 제출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권 침해를 걱정하면서
베리칩의 사용을 반대하는 것도 존중받아야 할 입장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분들은 또한 다른 분들이 베리칩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을 표현한다고 해도 그런 입장의 표명이 성경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누구라도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베리칩을 이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는 토론을 할 수 있는
좋은 문제의 하나가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베리칩을 요한계시록과 연관시키거나
기독교적 종말론과 연관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성경해석자들이나 건전한 신학자들은
전혀 그렇게 연관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한 일반 은총 관점에서의
논의를 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주의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 속에서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지며, 그리하여 진정한 기독교적 증언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이승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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