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톨릭은 어디까지 이르렀나?
라은성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근간에 일어난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세상에 일어난 톱 이슈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로마 카톨릭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달 2일에 세상을 떠난 로마의 대주교 존 폴 2세(1920-2005)가 교황직에 있는 28년 동안 로마 카톨릭인들의 성장은 7억5천만에서 10억으로 성장했다. 지난 1529호 「기독신문」에서도 나타나듯이 미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성장하는 교파는 단연 로마 카톨릭이다. 그리고 “저는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먼 나라지만 믿음에서 보면 매우 가까운 곳이죠. . . 저는 이태리어로 저를 소개해야하는지 아니면 제 언어로 소개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 . 제가 실수한다면, 올바로 행하도록 저를 고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1978년에 첫 인사말을 수줍어하며 건넸던 존 폴 2세와는 달리 지금의 로마 대주교인 베네딕트 16세(1927-)는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라고 독일 억양이 섞인 이태리어로 시작하여 “위대한 존 폴 2세가 세상을 떠난 후, 추기경들은 주님의 포도원에서 단순하고 부족한 일꾼인 저를 선출했습니다”라고 한 후 이어서 이렇게 첫 인사말을 했다 :
주님께서 연약한 도구들을 가지고 행하시며 사역하시는 법을 아시기 때문에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들의 기도를 요청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뻐하고 그의 지속적인 도움을 확신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신 모친 마리아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세계 모든 매스컴들 가운데서 CNN를 비롯한 방송사에서는 대주교의 죽음과 선출을 대대적으로 방영했다. 왜 이렇게 한 도시의 대주교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 세상이 관심을 갖는 듯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는 중세시대 교황제와는 다르게 보이지만 나타나는 양상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우리를 ‘자매’로 취급하고 ‘교회’로 취급하지 않는 가운데 그들의 역사적 변천을 간과하면서 지금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의 모습을 볼 때 미래와 현재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시대의 로마 카톨릭 주의가 이 시점에서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살피는 것은 적절하리라 여겨진다. 몇 호에 걸쳐 다음의 질문에 대해 상고해보고자 한다.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의 현 주소, 로마 카톨릭의 구원관? 그리고 그들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참고로 나는 이 글에서 ‘교황’이라는 단어보다도 ‘로마 대주교’라는 말을 선택하기로 한다.)
먼저 교황제(papacy)는 중세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초대교회의 숭고한 사상이 어용신학과 로마제국의 등을 입고 복음을 저해시키며 등장한 것은 로마의 감독 또는 대주교가 로마 카톨릭교회의 중심 교회정치제도, 즉 교황제였다. 성경적, 역사적으로 볼 때 장로정치가 올바른 것이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등장한 교황제를 고수하는 로마 카톨릭들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굳게 믿고 있다. 1439년 플로렌스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베드로론’(petrine theory)은 1870년 1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믿음의 일’로 정의되었고, 1964년 2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확언되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베드로에게만 교회의 수장직을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를 ‘수제자’로 부르는 베드로 수위권에 대해 1차 바티칸 종교회의(1869-1870)는 요한복음 1:41, 요한복음 21:15-18, 그리고 마태복음 16:18-20을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베드로의 후계자라로 자칭했던 대주교는 계승에 의해서가 아니라 1179년 3차 라테란 종교회의부터 ‘추기경단’(College of Cardinals)이 ‘비밀회의’(conclave, ‘열쇠를 가지고’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를 통해 선출하기 시작했다. 또 1975년부터는 추기경단에 속하는 자들의 나이를 80세 이하로 정했다. 더욱이 1996년 존 폴 2세는 ‘비밀회의’를 개혁하여 추기경단이 교황 선출 기간 동안 시스틴 채플에만 머물지 말고 바티칸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약 120여명의 추기경들은 존 폴 2세가 개인적으로 선택했던 자들이다. 계승이 아닌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된 교황은 고대와 현대, 그리고 세속권과 교회권위를 소유하며, 로마의 감독,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수제자의 계승자. 우주적 교회의 최고 성직자, 서방교회의 대주교, 이태리의 대주교, 로마지역의 대주교와 대감독, 바티칸 시의 주권자, 하나님의 종들의 종 등등의 칭호를 가지면서 또 막강한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듯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베드로의 계승권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며 베드로와 로마 대주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들은 대주교직이 직접 베드로에게서 계승되었다고 억지 주장하면서 ‘교황’(아버지)으로 자칭한다. 그 근거로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18-20에서 ‘반석’이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지만, 그 ‘반석’은 3인칭 단수이고 ‘베드로’는 2인칭 단수이며, 또 ‘베드로’는 남성단수이고 ‘반석’은 여성단수이기 때문에 문법상 어울리지 않는다. 반석과 베드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이다. 더욱이 주님은 같은 장 23절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꾸중하셨다. 이러한 베드로를 근거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운다고 억지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다. 더욱이 베드로에게 주었다고 하는 신비한 ‘열쇠’(권능)는 그에게만 아니라 교회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인 것이다. 그것를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늘이 복음의 교리로 인해 우리들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열쇠들’이란 단어는 은유적 표현들이다. 비록 자신들의 불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믿음이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때와 같은 방법으로 묶여있거나 풀려 있다”고 설명한다.
4세기부터 종교의 자유, 5세부터 게르만의 대이동, 그리고 7세기부터 모슬렘의 대이동으로 인해 3개의 대주교, 즉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의 대주교는 역사상에서 사라지고, 남아있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마저도 모슬렘의 위협을 받으며 약하게 되었다. 한 편 롬바르드족의 위협을 받고 있던 로마 대주교는 프랑크족과 정치적으로 타협하므로 서방교회만 아니라 서로마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로마 대주교는 카롤링기안 제국의 후원을 받거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0세기의 ‘도색정치’(pornocracy)를 해결하기 위해 962년 독일 왕 오토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옹립하여 대주교는 로마를 벗어나 서방교회 전체의 영적 머리가 되고, 황제는 서방교회의 세속적 머리가 되었다.
로마 대주교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의 갈등의 역사는 곧 중세교회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교황제의 개혁은 15세기에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한 편으로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다른 한 편으로 ‘아비뇽 유수’(1304-1377)와 ‘대 분열’(1378-1415), 즉 세 명의 교황들이 — 아비뇽, 로마, 그리고 종교회의에서 선출한 교황들이 — 동시에 있게 되므로 교황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거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직면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을 시도했다. 이 운동은 두 가지로 이루어 나갔다. 하나는 익나티우스 로욜라가 만든 제수잇(Jesuit)이었고, 다른 하나는 트렌트 종교회의(Trent, 1545-1563)였다. 제수잇은 상실한 로마 카톨릭 지배지역을 회복하기 만들어진 특공대로서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기에 ‘반종교개혁의 기습부대’라까지 불린다.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한 것은 ‘칭의’문제였다. 그 종교회의는 칭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첫 번째 칭의에는 원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세례와 연관 있고, 두 번째 칭의는 구원을 얻게 하는 성찬과 고해와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선행으로 인해 두 번째 칭의를 받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란 찾을 수 없다. 300년 이상동안 로마 카톨릭 주의의 모든 것을 주도했다.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몽주의 영향아래 있는 근대주의(modernism)는 교황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나는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것에 대한 반발과 함께 성경의 완전 영감설을 포기한 트렌트 종교회의를 따라 1차 바티칸 종교회의에서 로마 카톨릭인들은 성경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이 구원에 관한 진리에만 있다고 제한 시켰다. 다른 하나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포기하면서 행위를 신조보다 우위에 두게 된다. 무엇을 믿는 것보다 어떻게 행하느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옥스퍼드 운동과 헨리 뉴먼(1801-1890)의 역할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들의 관심이 교황의 무류설(infallibility)에 모여 있었다. 교황이 ‘권위를 가지고’(ex cathedra) 말하거나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말할 때 “교회가 교훈을 받아야한다는 신적 구세주의 소원을 가지고 무오류하게 수행하며 우주적 교회가 준수해야 할 믿음이나 도덕의 교리를” 나타낸다고 억지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억지 주장을 강력하게 배격한다. 그 이유는 “어떤 교황의 성명이 ‘권위로부터’ 왔는지 혹은 오지 않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근대주의가 성경의 권위성과 확실성에 큰 손상을 주면서 자유주의 물결은 신학과 사회에 감당치 못할 해일로 밀려왔다. 신학에서는 해방신학으로 나타나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행운을 주는 기독교화를 재촉했다. 기독교는 세상을 향해 정의와 책임을 요구하면서 복음의 수직적(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보다는 수평적(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보다 중요성을 둬야한다고 했다. 또 급진적 여권주의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은 2차 바티칸 종교회의(1962-1965)를 개최했다. 2차 바티칸 종교회의 참여자들은 다양한 경향을 가진 자들이었다. 어려웠던 업무는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이었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 앞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성경이 성격상 오류가 없는 구원적 진리만을 가르친다고 애매모호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그들은 비기독교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 구원론을 애매모호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 2005년 4월 2일 로마 대주교 존 폴 2세가 죽고, 베네딕트 16세가 새롭게 로마 대주교직을 맡았다. 새로운 대주교의 죽음과 탄생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들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 ‘텔레그라프’(Telegraph) 신문은 4월 5일에 보수파의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4월 1일에 이미 죽었지만 보수파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망 일자를 하루 미루었다는 소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더 많은 조문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고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진보파 추기경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또 영국 ‘이브닝 스탠더드’(Evening Standard) 신문에 의하면, 요한 바울 2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비서에게 “나는 행복합니다. 울지 말고 기도합시다”란 메시지를 남기도록 지시하고 온 힘을 모아 신자들이 모여 있는 창문 쪽을 바라보며 온 힘을 다하여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멘”이란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말로 인해 온 세계를 감동과 감화의 분위기로 몰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주치의에 의하면, 요한 바울 2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말할 기력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멘”이라 하며 떠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위에서 살펴보듯이 교황제의 시작은 정치적이었지 결코 교회적이지 않았다. 교황제의 유지도 정치적이었지 결코 교회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았다. 교황제의 개혁 역시 정치적이 교회적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러한 교회사적 오류와 왜곡들을 무시하고 세계적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상징적 인물을 다시금 과거처럼 정치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다. 마치 가시적 그리스도인 것처럼. 과거에도 그럴듯한 미명 아래 교회가 지상권을 장악한 것처럼 지금도 세상의 정치인들이나 교회들은 편의적으로 생각하여 지상권을 가진 상징적 인물이 필요성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 ‘교황직’은 세간에 큰 뉴스감이 될 수밖에 없고 대스타로 전락하고 말았다. 상징적 권위를 만들므로 세계는 어떤 공통 영역을 찾으려고 한다. 로마 대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감히 대신하는 ‘대리자’로서 역할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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