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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천주교)의 기원과 성장과정

by 石右 尹明相 2009. 9. 4.

 

 

로마카톨릭(천주교)의 기원

 

 

1. 5세기, 로마카톨릭교회(천주교)의 출현

 

천주교는 로마의 막강한 권력의 비호 아래 기독교를 잠식하여

모든 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 강제 전환시켰다.

이후 기독교는 1천년여의 잠복기를 맞게 됨과 동시에

천주교의 확장과 권력에 기반한 극한 타락의 시대가 이를 대신했다.

 

'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교부시대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종종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를 거치면서

권력야욕에 눈이 먼 로마의 주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로마카톨릭'이라는

명칭으로 천주교를 출범시킨 것이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을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천주교는 기독교에서 이탈한 로마의 지역교회,

혹은 지역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로마카톨릭이 기독교와 판이하게 다른 이유가 로마 다신교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들의 교리와 의식, 그리고 전통을 광범위하게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의 정통 신앙과는 전혀 다른 범신론적이고

주술적인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66권과 외경 12권을 혼합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모세5경을 경전으로 삼지만

그들을 기독교라고 부르지는 않듯이, 천주교가 성경을 사용한다 해서

그들을 기독교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A.D 445년에 야심적이며 활동력이 강한 레오(Leo) 로마주교(bishop)

교회의 지도권을 장악할 것을 시도했다.

레오 주교는 자기 스스로를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왕국의 열쇠" 즉 그리스도 왕국의 열쇠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지상의 전 그리스도인들의 "교황" "아버지"라고 선언했다.

 

레오 주교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교회의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로마의 그레고리(Grogory) 주교가 교황의 위치를 확고히 이룬

590년도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중심으로 한 동방지교회의 저명한 지도자들은

그레고리 주교의 교권에 계속 도전했으며 그 후 수세기를 통하여

그레고리 주교를 계승한 기타 교황들에게도 계속 도전을 해왔다.

 

분열은 1054년 동방지교회의 대사교인 콘스탄티노플 사교가

로마의 교황 레오 9세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때부터 동방교회(동방정교)와 서방교회(로마카톨릭)

각기 별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서방교회, 곧 천주교는 세력 확장과 더불어 교권 확립,

그리고 부의 축적과 쾌락을 위해 성경에 없는 교리를 추가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 판매다.

극에 달한 교권의 부패에 맞서 마침내 1517,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나섰다.

 

루터는 타락한 교권을 근절시키며 성서의 참된 교리를 재강조했다.

루터는 성서만을 참된 권위로 삼았다.

그가 여기에서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이고 개인적 관계를 맺는 데에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루터의 견해를 배격하여 그를 강제 추방했다.

결과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카톨릭은 더 이상 신성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교회를 품을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이방 종교에 불과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서 기독교는 카톨릭에 짓눌려 있던 그 지긋지긋한 1천년의 역사를

벗어버리고 비로소 광명을 되찾은 것이다.

혹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빌미로 기독교를 '신교'라거나

'개신교'라고 부르지만 결코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간 애급에 노예로 있다가 해방됐지만 '신애굽'이라든지

'신민족'이라 부르지 않고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것처럼,

기독교가 카톨릭에 잠식되었다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황에 대하여

'구교', '신교'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교회 이후 기독교는 끝까지 기독교일 뿐이다.

기독교가 로마카톨릭이 되고, 다시 기독교가 되는 변신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기독교와 천주교는 서로 같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종교이다.

 

 

2. 로마카톨릭의 성장과정

 

3세기까지도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기를 장악한 로마카톨릭이 되고,

지방교회의 장로에 지나지 않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되어 중세기를 호령한 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 후의 신성 로마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콘스탄틴 황제(AD 306-337)와 유스티니안 황제(AD 527-565)

교황권을 양육하여 중세기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사람들이다.

3121027일 콘스탄틴 황제가 꿈과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적수였던 막센티우스황제를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이긴 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3133월에는 밀란의 칙령이 반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고(AD 313),

사법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로 성직제도는 졸지에 타락하여 성직매매가 성행했고,

민중의 호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의 문지방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

세속과 이교(異敎)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다.

 

예배는 극도로 이교화 됐고, 32137일에는 아직도 콘스탄틴황제가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페르샤의 태양신 미드라(Mithras)의 예배일인 일요일에

휴업하라는 포고가 내려졌다.

이러한 틈새에서 국가의 비위를 맞추며 꾸준히 정치적 기반을 굳혀 온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기에 안간 힘을 썼다.

 

326년 콘스탄틴 황제는 선동죄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 황후 파우스타 (Fausta)

라 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다.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권을 확장하게 됐다.

 

375년 이제까지 로마황제들이 공식명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안(Gracian) 황제가 비로소 포기하자,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고 있는 것이다.

 

476년 서로마가 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다.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양자로 삼음으로써 중세기 동안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했다.

특별히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교회 감독으로 하여금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로마의 잃어버린 통치권을 되찾고, 이전의 통일된 대제국을 이룩해 보려는

목적으로 황제는 로마교회의 영항력을 십분 이용하려 했다.

유스티니안은 493년 아리안주의(Arianism) 게르만 민족으로 하여금

이태리 반도와 로마교회를 위협해 온 헤루리를 정복하고, 534년에는 같은 이유로

반달족을 정복했다.

 

533년에는 로마교회 감독을 "세계교회 머리"로 공식 인정하고

이 사실을 534년에 편찬한 그의 법전에 기록했다.

538년에는 아직도 이탤리 반도와 로마교회 감독의 지상권에 도전하는

마지막 아리안주의 게르만족인 동고드를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마침내 교황권을 중세기의 권좌(權座)에 앉혀 놓았다.

 

그 뒤를 이어, 서유럽의 실력자가 된 프랑크왕 피핀(Pepin 741-768)

왕위를 찬탈한 자신에게 왕관을 씌워준 데 대한 감사로, 로마교황을 적극 후원하여,

754년에는 롬바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제국의 영지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이 되게 함으로써, 로마교회는 이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피핀 왕의 아들 촬스 대제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곤경에 빠진 로마교황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원한 뒤,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성 베드로 사원에서

교황 레오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역사적인 신성 로마제국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

1,000여 년간 교황권의 성실한 보호자 구실을 했다.

 

십자군을 일으켜 알비젠스, 왈덴스등 개혁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허스와 제롬을 불사르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편의와 힘을 제공한 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이었다.

따라서 카톨릭은 초대교회를 계승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초대교회를 핍박하고,

이방종교를 흡수한 혼합종교이고, 정치적 후원으로 성장하였으며,

권력과 금력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세상적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