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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유익과 방언에 대한 이해

by 石右 尹明相 2009. 9. 7.

  

 방언의 유익

      장봉운 목사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지 않고 비료와 거름을 주었는데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면 그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거름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옆 밭에도 같은 비료와 거름을 뿌렸는데 풍성한 소득을 얻었습니다. 거름의 효과를 본 것이지요. 그러나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은 밭에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 아무리 좋은 거름을 뿌렸다고 해도 소용이 없듯이 영의 일에도 마찬가지 경우가 있는데 방언이 그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별로 유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방언에 대한 이해가 교회 안에서 아직 정확하게 가르쳐지고 있지 못하는 것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아직 활발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름은 아무 쓸모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방언은 각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주시는 은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얻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방언은 모든 신령한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윤활유와 같고 한약에서 감초와 같습니다. 방언 없이 능력을 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방언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영이 강건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비밀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방언은 필수입니다. 이런 방언을 우리는 언어로 기도할 것이 없을 때 더 많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또는 기도할 내용이 없을 때 하는 보조적인 기도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서 방언기도는 필수입니다. 영이 강건해진다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지혜가 생기고 믿음이 생겨 시험이나 고난이 올 때 말씀으로 극복하고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영적 힘을 의미합니다. 이 힘은 우리 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얻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 힘이 생겨 영이 강건해지면 영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힘이 있어야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직무인 은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기도를 통해서 우리 영안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축적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육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기도가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수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체력을 단련해도 경기를 치러보지 않으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알 수 없듯이 방언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실제적인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이 얼마나 강건해졌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인도하시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우선 영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의 신호를 자신의 지각이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신호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 집회에서 불같이 뜨거운 기운이 밖에서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면 누구나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환상이 보인다면 계시가 임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경우는 성령께서 강력하게 예외적으로 역사하신 것이기 때문에 영이 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놓치지 않고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방법은 아니며 보편적으로 일상에서는 우리 영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 지성과 감성에 전달해 줌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 전달 신호가 미약하면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마치 위성방송이 신호를 보내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신호가 미약해서 수상기가 제대로 영상으로 띄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경우 더 큰 안테나를 세워야 하듯이 우리 영이 강하지 못하면 성령의 신호를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는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방언기도이며, 말씀을 묵상하는 묵상기도와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관상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은 성장하고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는 영의 호흡이며, 따라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이 자라납니다. 그 가운데 방언기도는 매우 쉬운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이 기도하며, 천사가 기도하며, 성령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영을 강건하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계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방언기도는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같은 방언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방언기도는 자신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주로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정결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이성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 밖의 내용들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우리의 영이 하는 기도이므로 우리의 뜻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한계 가운데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언기도는 별다른 느낌을 얻지 못하며, 마치 매일 하는 육성기도처럼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방언기도는 습관적이며 늘 같은 톤의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별로 유익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또는 성령께서 하시는 방언기도는 자신의 영이 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 기도는 분위기조차 다르고 방언의 음색이나 단어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영, 천사의 영, 성령, 그리고 심지어는 악령까지 방언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 주체에 따라서 영적 분위기가 다르며 영이 주도하는 내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든 방언은 통역되는 것이 아니며,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통역이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통역을 위한 방언이 따로 있는데 이는 회중이 모인 집회에서 주어지는 통역을 위한 방언 즉 예언적 계시를 담은 방언은 예언의 한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예언의 영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방언은 주로 천사의 음성인데 ‘대언의 영’인 천사가 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과 귀신을 쫓기 위한 방언 역시 다릅니다. 이런 방언은 그 은사를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일상적으로 개인기도 때 하는 방언과 다릅니다. 치유를 위한 방언은 지식의 말씀을 얻는 수단으로 주어지며, 통역이 자동적으로 되거나 성경말씀이 떠오르거나(illumined scriptures), 병든 곳에 대한 환상이 나타납니다. 귀신을 쫓는 방언은 강력한 권능이 담긴 명령이며, 방언을 듣는 순간 귀신들린 사람은 힘을 쓰지 못하고 그 앞에 굴복하고 나뒹굴기도 합니다. 방언은 주어진 은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특별히 사역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특수한 방언들이 있는데 이는 평소에는 전혀 할 수 없는 방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방언은 우리의 영을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그리고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별 유익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기도하는 무지함이 있지 않은가?
기도할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이나 목적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는 경우라면 그 기도는 생명이 없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라새인의 기도인데 이런 기도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고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방언으로 몇 마디 기도하고 시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경우에 깊은 기도로 들어갈 시간이 없으며, 기도주체가 바뀔 여유도 없습니다. 기도형태는 방언이지만 여전히 육에 속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방언을 기도의 보조수단이라고 여기는가?
방언기도는 육성기도를 돕는 수단정도로 생각하고 편하게 기도하기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며, 별로 할 말이 없을 때 기도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세는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말로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런 부담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 방언기도는 신비한 체험을 하는 수단으로 아는가?
방언기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이므로 이 은사를 통해서 환상을 보고 신비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방언통역이 되지 않으면 별로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통역을 못하니까 의미가 없다고 여기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혼자 하는 방언은 스스로 통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역하기를 구해야 하며, 이 통역 역시 술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단편적으로 부분적으로 미약하고 별로 의미 없는 것 같은 단순한 느낌으로 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도 대부분 자신을 바로잡고 세우는 것이 가장 많습니다. 예배에서 일어나는 통역은 통역을 위한 방언으로 개인 방언과는 다릅니다.

넷째, 영적 지식을 거의 모르는 유아수준인가.
영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으며, 성경지식도 별로 없이 무작정 남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니까 자신도 그냥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저 단순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면 유익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의 일은 모르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런 구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 지식이 필요하며 지식이 없으면 깨닫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영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다음 단계의 태도를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은 자라나야 하고 상승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 상태로 굳어져 버리고 맙니다.

다섯째, 방언기도는 다 같은 것인 줄 아는가.
방언기도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그 주체도 다르며, 따라서 목적도 다른데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다 같은 방언인줄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목적으로 구분하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개인 방언, 표적을 위한 방언, 능력을 행하기 위한 방언, 통역을 위한 방언 등이 있으며, 주체로 구분하면 자기 영의 방언, 천사의 방언, 성령의 방언, 악령의 방언 등이 있습니다. 이런 방언의 다양한 구분으로 인해서 성경은 ‘각종 방언’이라는 말씀으로 그 차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언이 단 하나로 같다고 생각하면 다양한 방언에서 오는 다양한 기능과 유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섯째, 방언을 은사로만 알고 있는가.
방언의 은사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이지만 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른 은사를 돕는 보조기능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능력을 행할 수도 없고 다 기적을 행할 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다 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신령한 은사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이 방언의 은사도 없습니다. 바울은 사도와 선지자, 교사, 기적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돕는 자, 관리하는 자, 여러 가지 방언 말하는 자 등과 같은 직무와 연관되어 각 사람이 고유한 직임에 의해서 그 직무를 감당하듯이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방언 역시 그러함을 지적합니다. 각종 방언을 말하는 자는 여기서 은사로 보기 보다는 직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은사를 위해서 각종 방언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다양한 직무를 다 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방언을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은사가 아닌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한 방언은 누구나 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을 돕는 은사는 일부 사람에게만 주어지지만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은사로서 돕는 것과 성도로서 돕는 것과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로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막연하게 알고 유익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착각했던 방언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은사를 개발하는 일에 너무도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방언은 기도생활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얻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것입니다.

 

방언에 대한 이해

우리는 방언을 비롯해서 모든 은사에 대해서 심각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영적인 지식이 부족하고 이것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없어도 교회는 제도와 틀에 의해서 잘 유지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근래에 와서 다루어지기 시작했으며,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인해서 은사를 받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은사는 주어진 것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할 때 더욱 강력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받았다고 해도 개발하지 않으면 곧 소멸되고 맙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생 시절에 또는 평신도 시절에 은사를 받았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세월동안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고 묵혀 두었기 때문에 위축되고 소멸되어 버렸지만 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으로 무장되었으며, 은사는 보조적이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오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말합니다.

따라서 은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은사란 일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거나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령한 은사와 능력을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는 주신 분의 뜻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은사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등이 있습니다. 이 아홉 가지 은사는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지 못해도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으며, 병이 고침을 받습니다. 신유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병자를 위한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시련도 이기며,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믿고 행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없다고 해서 마귀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아니지요. 이 아홉 가지 은사가 지니는 속성들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은사는 그것이 증대되어 그 일에 전념하는 직임으로 자라나고 그것을 통해서 교회에 유익을 끼칠 정도로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는 위치로 나갈 수 있는 바탕으로 장차 직임을 가지고 그 일에 전념하게 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 29~30절에서 “다 ~~이겠느냐”고 반문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기능을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직임으로까지 성장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직무를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병을 고치는 기도를 할 수 있고 실제로 병이 고침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병 고치는 사역을 전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해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까지 하지 않고 ‘내게는 그런 은사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언에 대한 오해입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은사가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방언을 하려고 하지 않고 기대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방언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하는 중요한 수단을 제공하는 기능으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의 영이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기도하는 수단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방언기도입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수단 역시 방언기도입니다. 물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수단들이 있습니다. 묵상과 관상인데 이 기도는 방언기도만큼 강력하지 못합니다. 방언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던 시대에는 이 기도 방법으로 주님의 깊은 기도로 들어가고 성령께서 기도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여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고 쉽지 않습니다.

묵상과 관상은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기도방법이며, 소수의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진 수도사들에게만 알려졌던 기도 방식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성도들은 오랜 세월동안 영의 기도를 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에 생소하며, 오직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전부이며, 제도화된 교회의 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 구약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은 모두가 방언기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까닭이며, 방언을 은사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방언 역시 다른 은사들처럼 은사의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기능으로 광범위하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로서의 방언과 다른 성격을 지니는데 믿음의 은사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주를 시인할 수도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구원의 요소로서의 믿음과 은사로서의 믿음과 일상적인 영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주어지는 믿음은 다릅니다. 이것을 자로 긋듯이 구분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며, 명쾌한 설명 역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믿음은 다른 은사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한쪽 다리가 짧아서 고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기도할 때 믿음의 은사가 부족하면 환부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다리를 고쳐주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다리를 고쳐주셔서 건강하게 다닐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대퇴골에 이상이 있어서 짧아진 것을 환상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퇴골이 정상으로 자리를 잡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은사가 있으면 그는 다리를 잡아당기면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을 선포합니다. 집고 다니던 목발을 부셔버리면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며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선포합니다.

믿음의 은사가 없으면 이런 과감해 보이는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팔이 오그라든 환자의 팔을 잡고 강제로 펴면 관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환자는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전혀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팔을 찢습니다. 그러자 팔이 펴지고 오그라든 팔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지며 통증도 사라집니다. 이런 치유는 믿음의 은사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예언자에게 믿음의 은사가 있으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을 과감하게 진행시킵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을 추진하고 이루어냅니다.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는 배경에는 믿음의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은사로서의 방언은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방언은 단조롭고 한 가지 톤으로 오랫동안 계속하지만 은사로서의 방언은 각종 방언을 수시로 말하게 됩니다.

방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은사에 따라서 직임에 따라서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방언은 일반적인 성도들이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지적해서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기본적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듯이 모든 성도들은 방언을 함으로써 주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영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며, 성령의 탄식하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방언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과 천사와 성령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이 기도를 이해할 수 있으며, 풍성한 영의 작용을 느끼고 받아들여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언을 단순히 은사로만 생각하고 하지 못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냥 얻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구원의 계획이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고백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방언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며, 그 가운데에서 방언으로 말하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위하여 기도하고 기름부음이 임하도록 서로 간구해줄 때 더욱 잘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사모하면서 위하여 서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물론 방언을 말하지 않고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주님과 친밀함을 누리고 각종 계시를 받을 수 있다면 그 방법도 좋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데 가장 쉬운 길을 제공해줍니다. 우리의 영이 직접적으로 기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며, 효과적이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기도하면 다른 방법 보다 더 간단하고 쉽게 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방언을 비롯해서 모든 은사들은 은사로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는 그 일에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닫고 주님의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불러내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전문 분야의 사역자로 주를 섬기게 되는 직임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의무와 권세와는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구제할 수 있고, 누구나 가르칠 수 있으며, 누구나 상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은사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 일을 취미 정도로 합니다. 은사는 취미를 벗어나 전문가가 되는 길을 여는 수단이 되며, 은사가 없으면 아무도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으로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제의 은사가 있을 때 그 사람에게는 많은 물질이 부어지게 되며, 그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 일부를 드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지만 그 일이 본업이 되다시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일은 누구나 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전도의 은사가 없으면 일시적으로 끝나고 맙니다.

방언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영의 기도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으면, 각종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각종 방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방언 말하기를 힘쓰십시오.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더 많이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방언에 대해서 유익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방언을 많이 함으로써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영이 강건해져야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방언은 우리 영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방언은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영의 기도 수단으로서의 방언이라는 점도 알아두어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 은사로서의 방언과 일반적인 기도수단으로서의 방언의 차이를 설명할 것입니다.

 

 

 습관적 방언에서 벗어납시다

불교신자들이 요즘 법회에서 방언을 많이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방언이 하나님의 말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지요. 자신들도 방언을 말하는데 그 방언은 부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바로 앞에서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자 이집트 술사들도 자신들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뱀이 술사들의 뱀을 잡아먹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겪게 될 영적 싸움의 모형으로 행하신 기적입니다.

불교신자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본다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명상원에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황홀경(무아경)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영이 강력하게 우리 몸에 임할 때 육체가 느끼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이나 악령이나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신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참선을 통해서 영적 감흥을 맛보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할 때도 그런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그 곳에 말려들어갑니다. 불교신자들이 말하는 방언을 통해서 그들은 갖가지 환상과 이상을 경험합니다. 이것도 우리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모든 영적 증상들은 동일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의 영이 이 모든 것을 제압한다는 것입니다.

이집트 술사들도 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행함으로써 바로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로의 얼굴은 일그러졌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서도 이런 증거들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방언을 유창하게 말하면서 기도하는 불교신자가 이 점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일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 일을 계속하면 우리 몸은 그 일에 익숙해져서 영의 힘이 아닌 육신의 힘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방언을 계속하게 되면 우리 혀는 그 말에 익숙해져서 자동으로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이 습관이 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가 하는 방언은 영의 일이 아니라 육체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방언으로는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습관 되어진 방언에는 영적 능력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강력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지요. 영적 싸움에서도 이런 습관된 방언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게 되고 그런 방언은 지루해서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방언이 영으로 하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도움을 얻지 못하며 우리의 영은 강해지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불교신자들도 육체의 방언을 합니다. 이런 경우 그들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삭막하지요. 그러나 영으로 방언을 하는 경우 본인이 그 점을 즉각 느낍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 앞에서 불교신자가 아무리 영으로 하는 방언을 말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상하다면서 오늘 기도발이 받지 않는 것 같다고 변명합니다.

불교신자들이 자신들만 모인 곳에서는 기도도 잘 되고 황홀경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가면 그런 분위기가 사라집니다. 그들은 이곳에 부정한 사람이 들어와 있다면서 사방을 살펴 그리스도인을 지적해냅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들만이 있을 때는 마귀는 달콤함을 주어 그들을 사로잡지만 그리스도인이 있으면 그 평화가 깨어지고 맙니다. 자신들을 이길 강력한 예수의 영이 그 자리에 임하므로 마귀는 힘을 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 강한 마귀의 영을 지닌 사람이 들어오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썰렁해집니다. 이 경우 그들의 영이 마귀의 영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지요.

영의 실체가 실린 방언은 그 효과가 나타납니다. 성령은 능력으로, 천사는 예언으로, 자신의 영은 회개라는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습관이 되어서 하는 방언은 아무런 증거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언을 많이 하게 되지요.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나 영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지하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경우 습관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이 그런 습관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중언부언의 기도라고 하듯이 방언으로 하는 기도에도 역시 이런 중언부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로는 영적 싸움을 할 수 없지요. 우리가 영으로 예민하고 늘 성령의 흐름을 민감하게 느끼려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신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맹목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좇아가는 어리석은 기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들이 그들이 모이는 선집회에서 느끼는 감각적인 즐거움이 거짓이라는 것이 참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접할 때 들어납니다. 홀로 기도할 때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그것이 잘 되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증거이지요. 우리는 거짓 평안과 즐거움을 몰아내고 참되신 주님의 평안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영의 흐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를 감싸는 세 가지 종류의 영의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직접 경험할 수 있을 때 구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감각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은 이 기능을 스스로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평안이나 마귀가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황홀경을 경계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근심된 일이 없을 때 우리는 평안한 기분을 느낍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그것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 평안을 맛보아야만 육체적 평안과 구분할 수 있지요. 성령이 주시는 평안의 실체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극한의 고난과 갈등이 주어지고 그런 환경에서 부여되는 실체적 평안을 우리는 맛보게 됩니다. 이럴 경우 그 평안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합니다. 그 평안과 육체적 평안이 어떻게 다른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모조품이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방언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영의 흐름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무기력하고 습관적인 방언만 하고 있다면 죄의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방해하는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새로운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로 기도만 한다면 그것은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만 한다면 이는 괴로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작은 자신의 힘으로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영의 힘이 실리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 힘이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선한 영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아주 유치하거나 이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영안에 흘러들어오는 다양한 능력과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예민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런 의식 없이 하는 습관에 젖은 기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 영을 환영하고 모셔드릴 때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들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서로 충돌할 때에는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짝퉁은 그것 자체로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진품이 곁에 있으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물건이 되듯이 거짓 즐거움과 방언은 그것만을 가지고 행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다가도 하나님의 것이 들어오면 그것은 엄청나게 사람을 괴롭게 하는 악한 존재의 본성을 들어냅니다.

마귀의 방언을 하면서도, 타성에 젖은 습관적 방언을 말하면서도 평안하고 기쁠 수 있는 것은 영적 싸움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대항할 때 물러나고 그 본성을 들어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 마귀를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는 방언에는 분명히 다른 요소들이 스며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것은 배척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는 무지한 상태를 마귀는 제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