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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신앙과 생활

영혼을 위한 10가지 비타민

by 石右 尹明相 2009. 8. 7.

   

 

영혼을 위한 10가지 비타민 - 알리스테어 벡

 

 

1. 건강의 비타민 - 그리스도인들이 운동하는 이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앞장서야 한다.

몸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고 음식을 잘 섭취하며 잘 돌봐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영역에 대한 연구는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에어로빅 비디오를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에어로빅 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즈 율동'대신 '찬양 율동'을 만들어 낸다.

결과는 어떤가?

자기에게 맞는 것을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친구들과

접촉할 기회를 등한시하게 된다.

대신 예배 찬송을 부를 때 박자에 맞춰 펄쩍 뛰는 그들만의 '거룩한 집단'을 형성해 간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세속적 운동을 피하고, 거룩한 예배를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을 알 수 있는 기회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상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빛을 그들 가운데 비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이 하늘의 영원한 처소로 떠날 때 거둬질 장막과 같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친구들은 지금 여기가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뛰고 함께 운동을 하지만,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무한한 잠재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들처럼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은 선악 간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 지나간다는 것 또한 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관을 이웃과 나눌 수 있고, 나이가 들어감에 대한

영원한 의미를 깨닫도록 도울 수도 있다.

 

우리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4:14).

우리가 친구들과 조깅을 하는 것은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분명한 차이점은 주님이 우리의 몸을 사셨다는 것이다.

육체는 건강하지만 영혼이 병들었다면 비극적인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육체가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 기도의 비타민 - ‘기도의 능력을 기억하라

 

기도는 하나님이 그의 군사들에게 주시는 무기 중 하나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6:18).

기도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통로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1:15).

 

기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문제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그러나 많은 교회의 기도회는 그 크기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든다.

 

궁극적으로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은 영적 전투의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만일 어떤 찬송가 작시자의 말처럼 "사탄은 가장 연약한 성도가 무릎 꿇는 것을 볼 때

벌벌 떤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우리로 하여금 합심 기도의 가치를

불신하게 하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사탄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필요성과 그 능력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도록 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기도 가운데 탄생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1:14; 2:1; 2:42).

피터 데이네카는 A Song in Siberia(시베리아의 노래)에서 "우리는 그날에 기도와

찬양의 제사가 우리의 무신론적 국가의 방방곡곡으로부터 하늘의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3. 헌신의 비타민 - ‘하나님 나라에 온 마음을 쏟으라

 

기죽은 상태이던 구약의 제물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가운데

그와 연합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는 산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은행에서 근무하든지 연구실에서 일하든지, 우리의 주제가는 삶의 양식에서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삶의 순간마다 예수님께 전적으로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철저하고도 확실하며 물러섬이 없는

헌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헌신을 주로 지역이나 장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헌신은 페루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어느 지역의 은행장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산제사'가 되기 위해 그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개척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인상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대에 영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일상적 활동 가운데서 선교 의식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주차를 하거나 학기 논문을 쓰거나 차에 가스나 기름을 넣거나 빨래를 널거나

주식을 팔거나 운동을 할 때, 즉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님과의 연합에서 중심이 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디트리히 본헤퍼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진다. 누구나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첫 그리스도적 고난은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라는 부름이다.

이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하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결과이다.

십자가는 경건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무서운 종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주님은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4. 관계의 비타민 -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을 하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 기다리기를 배우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요청을 인간관계보다 더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삶의 영역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영역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거절하고, 이웃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을 먼저 기쁘시게 하는 일을 좋아하기를 배우는 곳이다.

 

결혼관계는 특히 의미심장하며 거룩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혼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신부를 만드시기 원하신다.(5:27)

결혼을 생각해 볼 때 비행은 유용한 비유를 제공한다.

 

먼저, 결혼 생활의 시작은 '이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륙' 할 순간에 어떤 형태의 비극적 실패라도 그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하므로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는 예비 신랑 신부들에게 결혼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교육 과정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비행기는 이륙하기 위해 엔진의 힘을 강화하고 제동 장치를 풀어 준 다음,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이륙한다.

이륙 후 기내에서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함께 걸어감으로써 가능하다.

 

우리 여정의 많은 부분이 참으로 일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이러한 시간들로부터 유익을 얻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항공사들은 영화나 음악으로 여흥을 제공한다.

그러나 대개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제일 좋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축구를 하는 것과 축구를 보는 것과 축구 코치를 하는 것

그리고 골프를 좋아했다.

미술과 골동품과 옛 건물 그리고 식물원에 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방금 열거한 모든 것은 오늘날 내 세계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아내가 그것들을 좋아했고 따라서 나는 그것들을 좋아하는 법을 배웠다.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한 아내의 관심과 능력은 나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무심결에 레스토랑의 벽을 어떻게 꾸몄는지 다가가서 살피거나

어떤 가구나 어디 제품인지를 알아맞힌다.

 

모든 부부는 보조를 맞춰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화요일 아침 함께 외식을 하는 규칙을 세워 놓았다. 내가 비번인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날을 이용해 지난 주간에 우리가 놓친 것들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유쾌한 만족을 진정으로 즐긴다.

수년 동안 우리는 특별한 산책으로 서로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여가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함이 최상임을 경험을 통해 알았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대방에 대해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나와 나의 아내는 20년이 지나 십대인 아이들을 보면서

성숙이 참다운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행복한 결혼이 쉽지는 않지만 정직하다는 것을 발견해 왔다.

그 결혼은 즐겁다. 당신이 즐거움을 누릴 때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5. 소명의 비타민 - ‘섬김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자리를 찾으라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독특한 재능과 역할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삶이라는 시장에서 예술가, 의사, 기술자, 교육자, 사업가, 정치가가 된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와 업무를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영적인' 활동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속적인' 추구로 행하려고 분주하지 않아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일생을 목회나 선교 사역에 드리겠다고 헌신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 모두 그렇게 한 적은 결코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성경적 근거 없이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 때문에 더 복잡해져 왔다.

그들은 유능하고 박식한 젊은이가 복음 사역에 헌신하지 않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복음 사역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이에게는 사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 그 누구도 그가 목사가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목사가 되어야 하는 바로 그 이유를 보여 주어야 한다.

 

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은 주방 싱크대 위에 이런 글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신적(神的)인 봉사가 하루 세 번씩 여기서 이루어진다."

세일즈맨이 이 성경적 원리를 붙잡는다면, 그가 소명을 이루는 방식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인 세일즈맨이 모든 판매 상품을 내놓을 때

기독교 문학의 일부를 제공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상품 소개를 할 때 성실성과 감수성과 합리성을 보여 주는 기회로,

따라서 이렇게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주님을 소개하는 기회로 보는 것이다.

 

분명히 이 원리는 빨래에 널려 있고 끊임없이 보채는 어린 자녀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젊은 어머니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젊은 어머니에게, 만일 그녀가 진정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녀가 중국에 관한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현재 그녀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란 어머니로서의 고상한 특권 가운데

자신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있다고 믿으면서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6. 역경의 비타민 - ‘힘들수록 하나님을 기뻐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여기서 베드로는 현실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그들의 삶의 죄 문제나 신앙적 문제의

관점에서 말하려 고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그렇게 시도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그들 자신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하며, 계속 선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기 원하고 있다.

 

베드로는 실패와 눈물을 통하여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난날, 만일 모든 다른 제자가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그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뿐 아니라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귀에 거슬리는 그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부인하고 나서 심한 자책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린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성품이 선한 일을 위해 형성된 것은 그 후의 자아성찰과

반성의 기간 중에 일어났다.

베드로가 해변에서 예수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고통스런 경험 가운데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21:15-25). 그는 점점 주님께 유익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주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누릴 수 있었던 기회가, 만일 베드로가 견뎌야 한 고통과 눈물과 실패

그리고 실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는 일들로부터 도망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고난을 불러오지도 말고 고난에 대해 불평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고난을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께 점점 더 쓸모 있게 만드시려고

선택하신 방법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고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지나간 일을 뒤돌아볼 때만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종종 우리가 실패하고 실망할 때 느끼는 감정은 아주 압도적이어서

우리는 고난의 유익을 손에 넣을 수 없다.

폭풍의 눈 가운데 있는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에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몇 마디 말이 아니라 그들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침묵은 우리의 달변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7. 거룩함의 비타민 - “항상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흠정역 성경에서 그 구절은 "너희 마음의 허리를 허리띠로 졸라매라"고 되어 있다.

'허리띠로 졸라맨다'는 표현은 중동지역에서 여행을 위해 급히 서두르거나 출발을 할 때,

허리띠로 느슨한 겉옷을 신속하게 졸라매는 관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허리띠로 겉옷의 활동을 방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젊은이들에게, 만일 그들이 시험(유혹)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마음을 지키는 전투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온갖 종류의 시험은 현실이다. 특히 성에 미쳐 버린 오늘의 문화에서 아마 혼전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의 정절을 지키며 사는 것보다 더 큰 도전은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 영역에 있어서 특별한 예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다.

국사가 다 잘 돌아가고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자 다윗은 무적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았고 그 순간 하나의 결정을 하였다.

 

그 후 뒤따르는 간음과 살인의 슬픈 이야기는 유혹의 싹이 돋아날 때

잘라 버리기를 주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야고보는 그 과정이 전개되는 방식을 이렇게 나타낸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소년이었을 때 나는 여러 곳에서 본 다음 구절에서 배웠다. 이것은 암송할 가치가 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며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며

   성품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

 

나의 선생님들은 종종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쓴 말씀을 덧붙이셨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8. 가치관의 비타민 - ‘진짜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라

 

종이 몇 장으로 총탄을 막아 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단 한 번 만에 실제로 행해질 수 있는 테스트이다.

그러나 '세상의 제물'을 쌓음으로써 궁색함과 공허함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똑같이 헛되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진정한 가치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현대 광고의 유혹에 굴복당하고

사물의 겉모양에 매혹 당한다.

새로운 것들을 잘 아는 것이 불만족을 없애 주리라고 희망한다.

 

시편기자는 모든 일에 대해, 그리고 언제나 그가 주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121:2)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죄이다.

앨리스터 맥그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놓도록 유혹한다. 따라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

 

예수님은 잘못된 보물에 투자하는 것에 관해 산상 설교에서 청중에게 경고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6:19).

 

우리는 마치 우리의 안전이 이곳에 있는 것인 양 살아가는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궁극적 투자 전략은 우리의 관심을 하늘에 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 사물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 모든 좋은 선물들 가운데, 가장 큰 인간적 유익을

가져다주면서도 잘못 사용하면 가장 큰 인간의 악을 가져다주는 두 가지는

()과 부()이다.

성과 부에 대한 중세 성인들의 반응은 독신과 청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 급진적이고 냉혹한 응답은 지혜로운 일 같았으나, 인간이 만든 규칙들은

악한 생각들을 정복할 수도 성적 방종을 억제할 수도 없었다.

대신 우리는 모세를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8:18)고 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재정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훌륭하게 행한 사람들에게 관하여

분명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들은 거드름 부리지 말아야 하고 재산을 신뢰하지도 말아야 한다.

대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딤전 6:17)

소망을 두도록 격려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움켜 쥔 주먹이 아니라

편 손바닥으로 물질적 소유와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9. 겸손의 비타민 -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하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66:2). 겸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러나 겸손은 세상에서 인기있는 처세술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겸손에 대해

단순히 잊어버렸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겸손이 우리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허락했다면 유감스러울 것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한 척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겸양의 자세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겸양은 섬김의 정신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옷과 같다.

우리는 그 옷을 놔두고 집을 나서면 안 된다.

겸손의 옷이 없을 때 우정은 깨어지고 가족은 상처 입으며 동료 의식은 파괴된다.

 

겸손의 자세는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을 때 하신 것처럼

섬김(serving)과 드림(giving)을 생각한다. 겸손의 중요성을 배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에게 겸손의 덕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우리는 좋은 교육의 본질적 위치를 거부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또한 일종의 신비적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대신 부지런히 우리의 지성을 적용하기 바라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어떤 사람이 토마스 아 켐피스에게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는지

물어 보았다. 그 질문에 대한 토마스의 대답은 유명하다.

 

"저는 하나님이 가장 작고 무가치한 피조물을 찾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다 보셨는데,

나를 보셨으며 나를 취하여 사용하셨다고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부족과 실패와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권능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이 여전히 또 다른 낡은 질그릇을 들어 올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10. 전도의 비타민 - ‘당신이 먹은 비타민을 나눠주라

 

"우리 자신의 영적 경험의 빈곤만큼 우리의 입술을 다물게 하고 우리의 혀를

묶어 버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말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증거하는 것은 그것이 좋든 나쁘든 전부 우리의 삶에서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멋진 성품들을 칭찬하고 싶은 갈망이 없다면,

그 누구도 사랑의 관계를 오랜 시간 지속할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도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한 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생겨나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를 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의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20).

바울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했다.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기대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열방을 아들의 기업으로

약속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받고 싶은

갈망 때문에 우리는 기운을 복돋워야 한다.

 

목사가 복음에 열정이 없으면 성도들 역시 복음 전도에 열정이 없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권고하였다.(딤후 4:5).

목사는 그의 성도들을 복음 안에서 훈련해야 하며 스스로 복음 그 자체처럼 행해야 한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다:

"진정한 복음주의 목사라면 라헬이 '아이를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리이다'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영혼에 대한 진정한 갈망이 있을 것이다.

목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의 택한 자가 거듭나며 철저히 통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의 영혼을 두고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참으로 축복하시고 교회는 번영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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