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성서, 이대로 좋은가
-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우리말 표기를 보고 - 이진환
[1]
한글로 번역한 성서는 개편이나 개역을 계속하면서 좀더 현대어에 가깝고 정확한 표현으로 바뀌어 왔다. 그런 점에서 <성경전서 표준새번역>(1993년 초판)도 우리말 번역의 한 획을 그을 만한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최근에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을 구입하여 읽어 보고는 고개를 몇 번이나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책이 ‘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될 수 있었으며, 출판된 지 3년이 지나도록 미흡한 부분에 대한 반성도 없이 그대로 계속 출간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이하 <개정판>이라 부름)에 대한 필자의 불만은 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말 표기에 관한 것이다. 외국어를 번역할 때 우리말답게 표현하고 표기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번역서가 ‘성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정판>에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편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물론 기독교인이다. 신심은 두텁지 않아도 성경책을 넘길 때 책장이 더러워질까 봐 손가락에 침을 묻히지 않는다. 그리고 교육 현장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가끔 성서 구절을 인용하여 수사법이나 높임법 등을 설명하고, 성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왜 외국어를 국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성서 속의 글을 인용하여 국어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고 싶은 필자의 욕심에서 일 것이다. 흠정역 성서나 루터 번역 성서가 표준 영어나 표준 독일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처럼 우리의 한글 성서도 바르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바이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개정판>에 나타난 우리말 표기나 표현의 오류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오류의 지적은 단순히 <개정판>의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앞으로 한글 성서를 출간할 때에 보다 세심한 주의와 보다 큰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당위성을 알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본고에서 <개정판> 전체의 표현이나 표기를 다루지 않고 신구약 전체 분량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신약의 4복음서만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텍스트로는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 초판 4쇄(2002. 4. 30)을 사용했으며, 기존의 다른 한글 번역 성경과의 비교는 본고의 의도와 무관하므로 가급적 피했다.
필자의 지식이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본고에서 지적한 사항이 적절하지 않거나 미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항들은 오류를 묵인하지 않으려는 여러 용기 있는 분들의 도움으로 만족스럽게 보완되리라 믿는다.
[2]
<개정판>의 오류 지적은 책 전체를 살펴본 다음에 행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본고는 이러한 오류를 일일이 지적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한 부분만 보아도 전체를 미루어 판단할 수 있으리라 여겨져서 신약의 4복음서만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살펴본 항목 중, ‘잘못된 표기와 표현’은 다음 인쇄할 때 바로 수정되어야 할 사항들을 예시한 것이고, ‘일관성 없는 표기와 표현’은 표기나 표현을 일관성 있게 일치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필자의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의의 여지가 있는 사항들’은 <개정판>을 수정할 때 논의해 봄직한 사항들을 몇 가지 단편적으로 제시하였다.
1. 잘못된 표기와 표현
(가) 표기의 잘못
잘못된 표기란 잘못 사용한 어휘와는 달리 대부분 교정 부주의로 글자가 잘못 인쇄되어 나오는 경우를 가리킨다. 이는 어느 출판물에서든지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곧바로 수정해서 인쇄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개정판>의 4복음서 안에는 이러한 잘못된 표기는 그리 많지 않으나 4쇄에 이르도록 이런 오기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점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먼저 잘못 표기된 의문형 높임 어미 ‘-오’를 살펴보기로 한다.
○ (마태 27-4) 말하였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국어 표기에서 ‘이요’는 ‘이다’라는 조사에 연결어미 ‘-요’가 붙은 형태로 쓰이는데, 종결형에는 위의 문장에 나온 ‘문제요’처럼 ‘이오’의 축약형으로만 쓰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온 ‘상관이요?’는 연결형도 아니고 ‘이오’의 축약형도 아니므로 ‘상관이요?’로 표기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문의 ‘상관이요?’는 높임을 나타내는 의문형 종결어미가 붙어야 하므로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 (마태 27-4)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 →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요한복음에 나온 다음 표기도 위에 예와 같은 이유로 수정되어야 한다.
○ (요한 1-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
여기서 ‘엘리야요?’는 ‘엘리아이오?’의 축약형이므로 표기 규칙에 맞지만, ‘말이요?’는 의문형 어미가 ‘-오’이므로 ‘말이오?’ 또는 축약형으로 ‘말요?’라고 써야 옳다.
☞ (요한 1-21)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 →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
(나) 표현의 잘못
표현을 바르게 하지 못한 부분은 어휘 자체를 잘못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의미를 불필요하게 중복하여 표현한 경우가 많다. 의미를 중복해서 표현하는 것은 초가집이나 고목나무처럼 관용적인 중복의 경우를 제외하면 일단 잘못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 (마가 9-2~13의 소제목)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실제로 본문(마가 9-2)에서는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로 올바르게 표현했는데 이상하게도 소제목에서는 ‘모습으로 변모하시다’라는 이상한 표현으로 바꾸어 놓았다. ‘변모하다’라는 말이 이미 ‘모습이 변하다’는 의미인데 왜 이렇게 ‘모습으로 변모하시다’로 표현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위의 소제목은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 (마가 9-2~13의 소제목)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 →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시다 (○)
이와 같은 종류의 실수는 요한복음에서도 나타난다.
○ (요한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증언하다’는 ‘증거를 대어 말하다’는 의미이다. ‘증언하였다’만으로 표현해야 할 곳에 사족으로 ‘말하였다’를 덧붙여 표현 자체가 이상해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원전을 충실히 번역하기 위해 그렇게 표현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말하였다’라는 말을 꼭 넣고 싶으면 ‘증거를 대어 말하였다’라고 해야 옳다. 본문은 이렇게 수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 (요한 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 →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
다음의 예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누가 9-16)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우러르다’는 ‘위로 향해 고개를 정중히 쳐들다’는 의미인데 여기에 다시 ‘위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쳐다(치어다)-’를 쓸데없이 덧붙였다. 다행히 요한복음(11 : 41)에서는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처럼 바르게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우러러 보시고(우러러보시고)’로 바꾸어야 자연스럽다.
☞ (누가 9-16)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 →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
비슷한 발음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서 어휘를 잘못 사용한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휘를 잘못 선택한 경우라기보다 어휘의 지닌 의미의 차이를 소홀히 한 데서 빚어진 오류라 하겠다.
○ (누가 5-3~4) 예수께서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리를 잡아라.”
우리는 평소에 ‘나가다’와 ‘나아가다’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가다[出]’와 ‘나아가다[進]’는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른 말이다. 위의 예문대로라면 바다 위에 계셨던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다 깊은 데로 ‘나가’라고 하셨다는 뜻인데 이는 말이 되질 않는다. 바다에 안이 있고 밖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바다의 안에서 바다의 밖으로 나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바다의 깊은 쪽을 향해서 가라’고 하신 것이므로 이는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한다.
☞ (누가 5-4)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 →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
앞뒤의 어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어형을 잘못 선택하여 아주 부자연스러운 표현을 한 곳도 여러 군데 있다. 여기서는 두 개의 예만을 들어 본다.
○ (요한 11-57)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누구든지 그가 있는 곳을 알거든 알려 달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
위의 예에서 ‘알려 달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라는 표현과 ‘알리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라는 표현 중, 어느 것이 올바르고 자연스러운가는 국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금방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달라’는 말 다음에는 부탁이나 요구, 청원 등을 뜻하는 말이 뒤이어 나오지 ‘명령’을 뜻하는 단어가 오지 않는다.
다음의 예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잘못이다.
○ (마태 9-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다짐하셨다.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본문 속에서 ‘다짐’의 주체는 예수가 아니고 눈이 열린 ‘그들’이어야 한다. 문맥으로 보아 눈을 뜬 그들을 향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예수께서 엄중히 타이르거나 경고하셨고, 그들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예수께 ‘다짐을 하는’ 것이 내용상 이치에 들어맞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다짐을 받으실 수는 있어도 당신 스스로 다짐을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항들을 시시콜콜 지적하는 것은 자칫 편찬자의 개성이나 고유 권한을 침해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어색하고 어법에 어긋난 표현들은 개성이어서도 안 되고 권한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말다운 표현, 바르고 아름다운 표현이말로 한글로 번역하는 분들의 커다란 의무이기 때문이다.
(다) 띄어쓰기의 잘못
1988년 한글맞춤법이 개정 고시되면서 띄어쓰기 규칙은 매우 융통성을 지니게 되었다. 가장 애매했던 보조용언을 붙여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라든지 복합명사나 고유명사를 붙여쓸 수 있게 허용한 것 등이 경직된 띄어쓰기로부터 우리를 어느 정도 해방시켰다고 하겠다.
띄어쓰기를 철저히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하고 때로는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붙여 쓸 것을 띄어서 쓰거나 띄어서 쓸 것을 붙여서 써서 의미가 변질된다면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
다음의 예는 사소한 것 같지만, 띄어서 써야 할 곳을 띄지 않아서 다른 의미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 (요한 8-57)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안되다’는 ‘잘되다’의 반의어로 ‘섭섭하거나 가엾어 마음이 언짢다’든지, ‘얼굴이 많이 상하다’ 또는 ‘사람이 훌륭하게 되지 못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쉰 살이 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안 되었는데’로 바꾸어야 한다.
☞ (요한 8-57)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 →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
이런 예는 어찌 보면 ‘흠집잡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잘못된 띄어쓰기가 국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사람이나 국어 교육을 받고 있는 중고등학생들게 성서에 대한 불신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예도 위와 같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잘못이다.
○ (마가 5-6~7)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큰소리로 외쳤다. “더 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고 애원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언뜻 보기에는 위의 띄어쓰기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큰 소리’를 ‘큰소리’라고 붙여서 쓰면 이는 ‘커다란 소리’가 아닌 ‘야단치거나 뽐내거나 장담할 때 당당하게 하는 말’을 뜻하는 하나의 단어이다. 그렇다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칠 수는 있지만 감히 ‘큰소리’를 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없이’는 ‘더할 나위 없이’라는 뜻으로 ‘더없는 기쁨’이나 ‘더없이 슬프다’처럼 형태가 제약되어 쓰이는 부사이다. 이것을 ‘더 없이’로 띄어서 두 개의 부사로 사용하면, ‘이젠 돈이 더 없이도 버틸 수 있다’에서처럼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다행히도 누가복음에서는 이 두 항목을 마가복음과 정반대로 띄어쓰기를 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의 띄어쓰기가 정확하다.
(누가 8-28)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띄어쓰기 문제는 ‘단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맞물리기 때문에 그렇게 명확한 대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가령 마태복음(25-45)에 있는 ‘보잘 것 없는’은 분명히 ‘보잘것없는’으로 붙여서 써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띄어서 써도 의미에 큰 변질은 없다. 의미가 크게 변질되지 않는 한 띄어쓰기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개정판>에는 잘못 띄어쓴 곳보다도 띄어쓰기에 일관성을 읽고 있는 점이 훨씬 더 큰 문제이므로 이를 뒤에서 다루고자 한다.
(라) 어법의 오류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경우, 어법에 맞지 않거나 번역투의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한글로 성서를 번역할 경우에는 전통적인 ‘성서식 어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어법 오류는 일단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번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높임법 문제일 것이다. 서구어와 구별되는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이 높임법(공대법, 존비법, 존대법)은 그 규칙이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요즈음의 젊은 세대에서 급속도로 붕괴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 높임법의 정오표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성서 번역의 경우, 정확하게 우리말 높임법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로 보인다. 일례로 ‘예수가’라는 말을 ‘예수께서’로 바꾸면 제대로 높인 것 같지만 이름 다음에 ‘-께서’를 넣어서 높이는 법은 우리에게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높임법의 적용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높임법이 <개정판>에 올바르지 않게 적용한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오류의 지적은 <개정판> 전체의 높임법 기준과 틀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므로 이에 관한 고찰을 다른 기회에 논하기로 한다. 본고에서는 높임법에 관한 것을 ‘어법의 불일치’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문법에 맞지 않는 표기를 지적해 보겠다.
○ (요한 20-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위의 예는 능동과 피동을 구별하는 어형을 잘못 파악하여 빚은 실수로 보인다.
‘개켜’는 ‘개키어’의 축약형이다. ‘개키다’는 ‘개다’의 의미이므로 ‘개켜’는 ‘개어’의 뜻이다. 이는 ‘수건을 개켜[개어]’처럼 능동형으로 쓰이는 어형이다. 그런데 인용한 본문은,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어져[개이어] 있었다.’ 는 의미가 확실하다. 그렇다면 본문 속의 ‘개켜’가 쓰인 자리에는 ‘개어’의 의미가 아니라, ‘개어져’라는 의미의 말이 들어가야 옳다. 즉 ‘개어져 있었다’의 자리에 ‘개켜(개키어)’라는 형태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는 당연히 ‘개키다’의 피동형인 ‘개키이다’를 사용해야 한다. 즉, ‘개키이어’ 또는 ‘개키여’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표기이다.
이 표기에 관한 보충 설명을 위해 비슷한 음운 환경에 있는 ‘치다’와 ‘끼다’의 예를 들어 보자. ‘자동차가 사람을 치어’의 ‘치어’는 ‘쳐’로 축약해서 표기할 수 있지만, 이 말의 피동형인 ‘자동차에 사람이 치이어’의 ‘치이어’는 ‘쳐’로 축약할 수 없고 오직 ‘치여’로만 축약이 가능하다. ‘손에 반지를 끼어(껴)’와 ‘손이 문틈에 끼이어(끼여)’의 표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표기는 ‘개켜’ 자리에 ‘개어져’나 ‘개여(개이어)’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구태여 본문의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옳다.
☞ (요한 20 : 7)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 → 한 곳에 따로 개키여 있었다. (○)
→ 한 곳에 따로 개키이어 있었다. (○)
2. 일관성 없는 표기와 표현
<개정판>에서 지적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앞에서 지적한 ‘잘못된 표기와 표현’보다도 표기나 표현에 있어서 일관성이 크게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기와 표현의 불일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므로 ‘반드시 수정해야 할’ 사항은 아니지만, 이런 것이 성서 간행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각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다.
(가) 표기의 불일치
단순한 표기상의 불일치로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 (마태 12-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요한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위에 인용한 본문에서는 ‘ㅣ’ 모음으로 끝난 명사 다음에 ‘이다’라는 조사를 원형 그대로 적었다. 그런데 다음의 예에서는 똑같은 음운 환경 속에서 ‘이다’의 ‘ㅣ’를 축약한 형태로 표기하지 않았다.
○ (요한 6-32) 하늘에서 참빵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 (누가 16-16)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아버지시다’나 ‘때까지다’는 그 앞의 예들과 일치시킨다면 ‘아버지이시다’와 ‘때까지이다’로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는 일상적 표기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다음은 복수표준어를 사용한 예이다.
○ (마태 20-34) 예수께서 가엽게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니 그들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 (누가 7-13)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마태복음에서는 ‘가엽게’로 표기되어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가엾게’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둘 다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전혀 틀린 표기가 아니다. 둘 다 정확한 표기이므로 크게 탓할 바는 아니나 이런 이중적 표기가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 어휘의 불일치
어휘의 불일치는 위에서 인용한 표기의 불일치와는 달리 다소 문제가 된다. 물론 편찬자가 독자나 후손들에게 21세기에는 이렇게 다양한 어휘 형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의도였다면 결코 문제삼을 만한 사항이 아니다.
어휘의 불일치 중에는 편찬자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일부러 불일치를 시도한 듯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 있다. 즉 동일한 장소를 나타내는 말에 의미가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 (마태 4-18, 마가 1-16)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걸어가시다가
○ (누가 5-14)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계셨다.
누가복음( 개정판 93쪽)에서 ‘게네사렛 호숫가’를 ‘갈릴리의 바닷가’라고 주석해 놓은 것을 보면 ‘갈릴리 바닷가’와 ‘게네사렛 호숫가’는 동일한 장소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를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을 원문 번역의 충실성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번역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예는 돼지가 물 속으로 빠져 죽는 장면에서도 마가복음(5-13)에서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했는데, 누가복음(8-33)에서는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바다냐 호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바다라고 해도 좋고 호수라고 해도 좋다. 옛날의 유대인들이 ‘바다’와 ‘호수’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이를 지칭하는 명사 둘을 섞어서 사용했을 수도 있고, 마태와 누가가 각각 호수를 바다로 바다를 호수로 잘못 알고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둘이 있었다면 그 사물에 적확히 대응되는 한 개의 우리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 대화 속의 어휘를 직역한 경우라면 몰라도 일반적 사실을 서술하는 문장에서 동일한 사물을 의미가 전혀 다른 우리말 어휘 두 개로 번역하여 독자를 혼란시키는 것은 번역의 기본 상식으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다) 띄어쓰기의 불일치
국어 표기에서 띄어쓰기 규칙은 매우 복잡하지만, 의미의 혼동이 없는 한 단어를 붙여서 써도 괜찮다고 본다. 가령 ‘산토끼’와 ‘산 토끼’처럼 구별을 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구태여 띄어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한 권의 책 안에서 동일한 구절을 어느 곳에서는 띄어쓰고 어떤 곳에서는 붙여서 썼다면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 (마태 21-19~20) 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그 나무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말하였다.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말라버렸을까?”
본문에서 ‘말라 버렸다’는 단 한 문장을 건너뛰어서 ‘말라버렸을까’로 본용언과 보조 용언이 붙여서 표기하였다. 이 두 띄어쓰기는 물론 국어 표기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불규칙한 표기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까? 이것을 일관성 있게 통일시키거나 그대로 두거나 하는 것은 필자의 권한 밖이다. 다만 이런 예가 4복음서 안에만도 수십 군데 나타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가령, ‘나누어 주고 / 나누어주었다’, ‘장가 드는 / 장가드는’, ‘저녁 때 / 저녁때’, ‘눈 먼 / 눈먼’ 등등 책을 몇 장만 넘겨도 쉽게 발견되는 일관성 없는 띄어씌기의 예들이다.
(다) 존대(높임)의 불일치
<개역판>에 나타난 불일치 현상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높임의 불일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높임법이 제대로 적용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높이고 낮추는 기준이 수시로 변동하여 그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예가 <개정판>에는 허다하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 단적인 예를 우선 몇 개 지적해 보자.
○ (요한 13-23)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 (요한 21-7)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을 읽어 본 사람이면, 위에서 말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동일 인물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한 곳에는 ‘예수께서’로 다른 곳에는 ‘예수가’로 표기되어 있다. 이처럼 같은 구조의 문맥 속에서 한쪽에는 높이고 다른 쪽에는 높이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음의 경우도 위와 같은 불일치의 예이다.
○ (누가 23-9) 그래서 그는 예수께 여러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 (누가 23-11) 헤롯은 자기 호위병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였다. 그런 다음에 예수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
인용된 본문은 모두 헤롯과 예수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내용이다. 앞에서는 ‘예수께’라고 높이고 뒤에서는 ‘예수에게’로 표현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뒤의 예문에서는 헤롯이 예수를 조롱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수에게’라고 한 것일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예수를 높이고 낮추는 것은 이 성서를 기술한 누가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헤롯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예에서는 분명히 편찬자의 어떤 이유 있는 ‘의도’가 있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높임의 불일치를 보인다.
○ (마태 27-29)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그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고 말하면서 그를 희롱하였다.
○ (요한 16-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어째서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예수를 가리키는 네 개의 대명사 중, 단 하나만 ‘그분’이라고 높였을까? 모두 예수를 조롱하는 행위인데 왜 하필 한 곳에서만 예수를 높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요한복음의 본문도 진리의 영을 ‘그분’이라고 높였다가 그 다음에 바로 ‘그’라고 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유사한 예를 더 들어 본다.
○ (마태 25-37~39)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본문에서 주님을 높이기 위해 ‘잡수실’이라고 표현했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마실, 입을’이라는 말도 당연히 ‘마시실, 입으실’로 해야 일관성 있는 높임이 된다.
금방 보아서는 알기 어려운 섬세한 부분의 불일치도 있다.
(마태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누가 3-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같은 장면을 묘사한 부분인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높이지 않았고 누가복음에서는 높였다. 물론 ‘하나님의 영’이 예수보다 하위자라면 마태복음의 표현이 정확하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인정한다면 마태복음에서와 같은 표현은 옳지 않다. 국어의 정확한 높임법에 따르면 본문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은 예수보다 하위자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인정한다면 누가복음의 표현이 정확하다.
<개정판>에서 높임법을 적용함에 일정한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다른 예를 들어 보자.
○ (마태 17-7)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 (마태 26-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앞의 예문에는 모든 동사에 접미사 ‘-시-’를 넣어서 예수를 높였고, 뒤의 예문에서는 마지막 동사에만 ‘-시-’를 넣어서 예수를 높였다. 필자가 알기로는 위의 두 문장은 모두 높임법 표기 규칙에 들어맞는다. 문제는 높임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것을 일관성 있게 기술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라) 문장부호의 불일치
문장부호란 문맥을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기 위해 글자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는 기호이다. 그런데 이 문장 부호가 일관성 있게 찍히지 않으면 독자들이 읽을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독자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다.
○ (마태 17-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 (마가 9 :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 (누가 9 : 4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위의 예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같은 내용의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배열해서 비교해 보면 문장부호의 사용이 얼마나 일관성을 잃고 있는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이런 일관성 없는 문장부호의 사용은 4복음에서 한두 군데 타나나는 것이 아니므오 어떤 확고한 원칙을 정해서 일관성 있게 부호를 찍어야 할 것이다.
(바) 문체의 불일치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의 기도’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그 일부를 인용해 본다.
○ (마태 6-11~13)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 (누가 11-3~4)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위의 예문을 보면, 마태복음에 있는 전통적인 번역 방식을 벗어난 누가복음의 번역이 얼마나 훌륭한 번역인지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국어에서는 서술어가 문장의 맨 끝에 오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처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고’라고 하면 그 문장을 마지막까지 들어보기 전에는 그 의미가 일용할 일용한 양식을 ‘주셨다’는 의미인지, ‘주신다’는 의미인지, ‘주시라’는 의미인지 알 길이 없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누가복음처럼 문장을 끊어서 번역하면 이런 모호함과 불편함이 없어지고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누가복음의 이런 번역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한글 성서 번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닐까. 이처럼 우리말의 특성을 살린 번역에 힘쓴다면, 차라리 영어로 성경을 읽는 게 쉽다고 우쭐대는 영역 성서 예찬론자들의 입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번역까지도 이런 번역의 문체를 적용하여 일치시켰더라면 읽는이가 보다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3. 논의의 여지가 있는 사항들
<개정판>을 보면서 단편적으로 느낀 항목 몇 가지를 열거해 본다. 이것은 단지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이므로 이에 대한 다른 견해도 충분히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가) 대명사 사용의 문제점
○ (마태 20-26~27)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라는 말은 듣는이를 포함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인데, 본문대로라면 제자들이 자기 자신들을 섬기고 자신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므로 ‘너희’라는 표현을 달리 바꿔야 되는 것은 아닐까? 문맥으로 보면 줄친 부분의 ‘너희’는 ‘너희 중 다른 사람들’이어야 한다.
(나) 소제목과 본문의 불일치
○ (요한 8-31~38 소제목)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위의 구절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명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 31절 이하에서는 모두 ‘자유롭게 하다’로 번역해 놓았다. 사실 ‘자유하다’라는 말이 원래는 어법에 어긋나는 말이기 때문에 본문 속에서 ‘자유롭게 하다’로 바르게 바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제목과 본문의 어휘를 일치시키지 않았을까?
(다) 쉼표와 마침표의 문제
○ (마태 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 (마태 2-15) “내가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위의 예에서 보듯 <개정판>에서는 쉼표의 사용이 지나치게 헤프고 마침표의 사용은 유난히 인색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위의 예문에서와 같은 쉼표의 사용이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이런 쉼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 마침표는 문장이 끝났다는 표시이므로 ‘불러냈다’ 다음에는 마침표를 찍는 것이 상식인데, <개정판>에서는 인용문 다음에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지 않는 한 인용문 속에 찍어야 할 마침표를 철저하게 찍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편찬자의 의도에 속하는 일이므로 지나치게 문제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인용문이 끝날 때 물음표(?)나 느낌표(!)만은 어떤 경우에도 철저히 찍은 것을 보면 문장부호의 기능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인식에 철저했는가 의심이 간다.
(라) 번역투의 표현
○ (요한 6-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서, 그들에게 먹게 하셨다.’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번역투의 표현은 성경 번역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적절한 표현을 두고 일부러 번역투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위의 경우에는 ‘먹게 하셨다’는 말보다는 ‘먹이셨다’로 하는 게 의미상 적절한 표현이다.
이 밖에도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든지 ‘고침을 받지 못하게’라든지,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하겠느냐?‘하는 표현들은 좀더 세련된 우리말 표현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점 외에도, ‘계시다’라고 써야 할 자리에 ‘계신다’라고 쓰지는 않았는지,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혹시 ‘너희의 아버지’라고 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보조 용언의 띄어쓰기에는 왜 일관성이 없는지 등등 손질해야 할 부분이 여기저기 발견된다.
[3]
언어가 사회의 약속이라면 그것을 기록하는 표기 규칙도 하나의 약속이다. 국어의 맞춤법이나 표준어나 띄어쓰기 등은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정한 규칙이다. 이것은 신호등처럼 약속을 정하고서 서로 지키자는 것이므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나름의 주장을 고집할 사항이 아니다. 본고에서 필자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국어의 표현이나 표기 규칙이 한글로 번역된 성서 속에 얼마나 충실히 적용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위에서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 중, 핵심이 되는 4복음서에 나타난 국어 표기의 오류와 문제점을 간략히 짚어 보았다. 이는 <개정판> 편찬자에 대한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 지금까지 성역시되거나 무관심 속에서 크게 불거지지 않았던 ‘국어다운 표현과 표기’에 관해서 성서를 간행하는 분들이 큰 관심과 정성을 쏟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새롭게 수정되어 나오지 않으면 안 될 <표준새번역 성서 개정판>은 물론, 앞으로 계속 새롭게 태어날 새로운 한글 성서가 우리 국어의 표준이 되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바이블다운 바이블이 되기를 필자는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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