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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생에 대한 소고

by 石右 尹明相 2009. 9. 29.

 

조선시대 기생에 대한 소고


노래와  웃음은 팔지언정 평생 지조를 팔지않는

몸은 천민이지만 머리는 양반이라는그네들은 한시대의 멋과 풍미를 알았다

남자들은 풍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대했으나 그들은 온몸으로 삶을 승화하였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일명 해어화라고도 불렀다

상류고관이나 한학적 교향이 높은 유생들을 상대하다보니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하지 않으면 않되엇다

 


 

기생은 술자리의 시중을 드는 것이 적어도 겉으로 나타난 업무이다.

기생은 천민출신이지만 상대하는 남성들은 고관대작이나 상류층 인사들이기 때문에

이들과 맞상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훈련을 거친다.

춤과 노래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고

서화도 잘 그려야 하며 또 시도 잘 지어야 하고 학식도 있어야 한다.

또한 말씨도 고상한 것을 골라 써야 하며 행동도 교양있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훈련은 몇년에 걸친 장기간의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양 정도에 따라 "명기"로 알려진 초일류 기생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이름난 문인"도 있으며 "유명한 화가"가 있고 "명창" 그리고 "명연주자"도 있다.

명기는 또한 지조가 있고 정조관념이 강해서 상대하는 남성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류나 멋이 없는 사람은 상대를 꺼리고 때로는 기지를 발휘하여 골탕을 먹이곤 하였다.

그러나 풍류를 알고 인품이 훌륭하여 상대할 가치가 있으면 돈이 없어도

이쪽에서 접근하여 교류를 하며 때로는 장래성 있는 젊은이의 뒷바라지도 하였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기생을 "의기"라고 한다.

일제 때에 "항일기생"들이 많았다.

진주 기생으로 명월관에 드나들던 "산홍"에게 친일파 이모가 당시 거금 1만원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였으나 산홍은 돈을 보고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춘외춘"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으로부터 배일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면서 돈 한뭉치 주는 것을 뿌리친 일이 있었다.


 

또한 위와 같은 개인적인 애국행위 말고도 집단적인 애국행위도 있었다.

기생조합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19년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은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에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검진을 거부하고 다시 경찰서 앞에 와서 독립만세를 부르고는 헤어졌다.

주모자 되는 기생이름은 "김향화"인데 그후 그녀는 6개월의 언도를 받았다

 

"동기"란 기생교육을 받는 10세 안팎의 어린 기생을 말한다.

이 동기가 교양을 쌓고 기생이 되기 위한 수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나이가 15, 16세가 되면

남자를 받게 되는데 처음 이 동기와 동침하는 남자는 "머리를 얹어준다"라는 표현을 쓴다.

즉 초야권(첫날밤)을 얻는 것이다.

 

기생의 종류도 그 직책과 품위에 따라 다양하며 따라서 이름도 갖가지로 불리운다.

"관기"란 각 지방 고을의 수령의 수청을 들기 위하여 두었던 기생으로

대체로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 중 가족을 떼어 놓고 부임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위한 위안대상이었다.

감사가 부임하는 날에는 각 고을의 관기가 총동원 되어 감사를 영접하는

습속이 있는데 이 기생들은 녹의홍상을 떨쳐 입고 나귀 타고

풍악잡혀 지화자를 부르며 맞이하였는데 그 수는 4∼5백명이며

또 행렬이 10리에 달했다고 한다.

 

"상방기생"이란 궁중 내에서 대궐의 의복을 지으면서

내연(잔치)에도 참가하는 기생을 일컫는데 이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을 합쳐

양방기생이라 하며 이들을 기생재상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기생으로서

가장 출세한 것이기도 하며 재상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기생에게도 종류가 있어 1패, 2패, 3패의 등급이 있는데

1패란 궁중에서 여악(여자 악공)으로 어전에 나아가 가무를 하는 일급기생을 일컫는다.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급이 낮은 기생으로서 은군자 또는 은근짜라고 하며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지만 은밀히 매음도 하는 즉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기생은 이론적으로는 술좌석 또는 연희의 흥을 돋우는 연예인이므로)

숨어서 매음하는 류의 기생으로서 대개 이들이 관리의 첩이 되거나 한다.

3패는 술좌석에서 품위 있는 기생의 가무같은 것은 하지 못하고 잡가나 부르며

내놓고 매음하는 유녀(노는계집)를 가리킨다.

 

 

기생들의 조직은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로 상경함으로써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3년에 서도(황해도와 평안도)지역 출신의 기생들이 "다동조합"을 구성했는데

조합원수가 약 30여명에 이르렀고 여기에 대항하여 서울 출신과

남도(경기도 이남) 출신 기생들이 모여 "광교기생조합"을 구성하였다.

이 조합은 1914년부터는 이름을 "권번"으로 바꾸어서 한성조합은 한성권번,

다동조합은 다동권번으로 불렀으며 이 당시에 있었던 권번은 한성권번,

대동권번, 경천권번, 조선권번 등이 있었다.

 


각 권번에는 1번수, 2번수, 3번수의 우두머리들이 있으며

그 외에 연령에 따라 선후배의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고 서로 나이에 따라

한 살 위이면 "언니", 두 살 위면 "형님", 다섯 살 위이면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기생은 옷차림으로 보아 여염집 여자와 구별이 되게 입었다.

여염집 여자들이 황색 또는 다홍색을 입으므로 기생들은 이 색을 입지 않고

기생의 지위에 따라 옷을 입었다.

1번수, 2번수, 3번수의 우두머리는 옥색치마를 입었고 보통 기생들은 남치마를 입었다.

 

일제의 저급한 게이샤 문화가 유입되어 사회적 경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원래 우리나라 기생은 격이 높아 ‘천민의 몸, 양반의 머리’라 일컬었다“

 “비록 신분은 천민이었지만 상대하는 이의 격에 맞게 가무(歌舞), 시(詩), 서(書), 화(畵)의

재능과 지조(志操), 지략(智略), 의협(義俠)의 덕목을 두루 갖춘 교양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