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金永郞. 1903-1950)
본명 윤식(允植). 전남 강진 출생.
1930년부터 〈시문학〉 동인으로 시를 쓰기 시작· < 모란이 피기까지는>등 발표.
1935년 <김영랑 시집> 출간
김영랑 시 모음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서 봄을 여원 설움이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붙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四行詩
1
임 두시고 가는 길의 애끈한 마음이여
한숨쉬면 꺼질 듯한 조매로운 꿈길이여
이 밤은 캄캄한 어느 뉘 시골인가
이슬같이 고인 눈물을 손끝으로 깨치나니
2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3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4
저녁 때 저녁 때 외로운 마음
붙잡지 못하여 걸어다님을
누구라 불러 주신 바람이기로
눈물을 눈물을 빼앗아 가오
5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만 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6
뵈지도 않는 입김의 가는 실마리
새파란 하늘 끝에 오름과 같이
대숲의 마음 기여 찾으려
삶은 오로지 바늘 끝까지
7
푸른 향물 흘러버린 언덕 위에
내 마음 하루살이 나래로다
보실보실 가을눈(眼) 이 그 나래를 치며
허공의 속삭임을 들으라 한다.
8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 같이
꽃가지에 은은한 그늘이 지면
흰 날의 내 가슴 아지랭이 낀다.
◈ 5월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 5월 아침
비 개인 5월(五月)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지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 만은
이아침 새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그 보금자리에 찌찌찌 소리내는 잘새의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 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蒼空)을 흔드오
자랑찬 새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 버렸대서야
불혹(不惑)이 자랑이 아니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魂)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익(靜謚)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少年)인가 보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中年)이고
내사 불혹(不惑)을 자랑튼 사람
◈ 가늘한 내음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언 산 허리에 슬리는 보라빛
오! 그 수심뜬 보라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윈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처얼썩 갯물이 놓이듯
얼컥 니이는 후끈한 마음
아니 후끈한 내음 내키다 마아는
서언한 가슴에 그늘이 도오나니
수심 띠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라빛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론 도론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내 마음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기인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혼자 마음을.
아!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누는 띠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배인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 뉘 눈결에 쏘이었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봉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일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여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 달
사개를 인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 씩 옮아오고
이 마루 우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뒤!>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뒤!>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 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두견(杜鵑)
울어 피를 토하고 뱉은 피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으로 지친 작은 새
너는 넓은 세상에 설음을 피로 새기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젖한 이 새벽을, 송구한 네 울음
천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별들 바르르 떨리겠구나.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릴 것을.
아니 울고는 차마 죽어 없으리오
불행의 넋이여!
우지진 진달래 와지직 이 삼경의 네 울음.
◈ 땅거미
가을날 땅거미 아름풋한 흐름 위를
고요히 실리우다 휜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라빛의 낡은 내음이요
임의 사라진 천리 밖의 산울림
오랜 세월 시닷긴 오스름한 파스텔
애닯은 듯한
좀 서러운 듯한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날의 놓친 마음
◈ 마당 앞 맑은 새암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 무너진 성터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 북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 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 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 보는
수풀 속의 맑은 샘
넓은 하늘의 수 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이 쏟아져 동이 갓을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얽혀져 잠긴 구슬손결이
웬 별나라 뒤 흔들어 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녘 그대 종종걸음 휜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와도
그 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새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 밤 내 혼자 내려가 볼꺼나 내려가 볼꺼나
◈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 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 淸明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 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 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 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 하날갓 다은데
내 옛날 온꿈이 모조리 실리어간
하날갓 닷는데 깃븜이 사신가
고요히 사라지는 구름을 바래자
헛되나 마음가는 그곳 뿐이라
눈물을 삼키며 깃븜을 찻노란다
허공을 저리도 한업시 푸르름을
업듸여 눈물로 따우에 색이자
하날갓 닷는데 깃븜이 사신가
◈ 강물
잠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 못해 한 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 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 지반추억(地畔追億)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 발 짓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 춘향(春香)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一片丹心)
◈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 숲 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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