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李永道.1916년~1976년).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북 청도
《죽순》지 동인이며, 1954년 첫 시조집 《청저집》.
통영여중 교사
이영도 시조(시) 모음
◈ 황혼에 서서
산(山)이여, 목 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뎜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소리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情)
◈ 아지랭이
내 사랑은 아지랭이
춘삼월(春三月) 아지랭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 달무리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아 우주(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鶴)같이 여기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랭이
◈ 눈
조심히 이 한밤을 자취 없이 오는 눈이
그의 가슴처럼 넓고 고운 사랑일레
이 산천 허물도 없이 한 품안에 안겼네.
◈ 눈
눈이 내리네 펄펄 내 마음 비인 뜰에
그날 그 사랑을 타이르며 타이르며
산하는 가슴을 닫고 돌아 앉아 있어도
◈ 海女 (해녀)
눈은 서늘한 눈은
珊瑚(산호)빛 어린 하늘
먼 갈매기 울음에
부풀은 淸(청)일레라
여울져
달무리 가듯
일렁이는 뒤움박.
◈ 雪夜(설야)
눈이 오시네, 사락사락
먼 어머님 옷자락 소리
내 新房(신방) 장지 밖을
감도시던 기척인 듯
이 한밤
시린 이마 짚으시며
약손인 듯 오시네.
◈ 모란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은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흔든다
◈ 언약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애모(愛慕)는 낙낙히 나부끼고
투명(透明)을 절(切)한 수천(水天)을
한 점 밝혀 뜬 언약(言約)
그 자락 감감한 산하(山河)여
귀뚜리 예지(叡智)를 간[磨]다
◈ 석류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정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 신록
트인 하늘 아래
무성히 젋은 꿈들
휘느린 가지마다
가지마다 숨 가쁘다
오월은 절로 겨워라
우쭐대는 이 강산
◈ 노을
먼 첨탑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앉은 인정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회한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
◈ 무제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 무제 2
정정한 송백 같은
당신의 사유 안에
저녁 어스름
박꽃 같은 나의 정은
수석에
구름이 일 듯
조요로운 멋일래
차라리 말이 없어
당신은 바위인데
내 인생은
여울지는 실계곡
청춘에
돋는 속잎을
멧새들이 노닌다
◈ 무지개
여읜 그 세월이
덧없은 살음이매
남은 일월은
비단 수로 새기고저
오매로
어리는 꿈에
눈 부시는 무지개
◈ 탑(塔)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진달래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 바위
- 어머님께 드리는 詩
여기 내 놓인 대로 앉아
눈 감고 귀 막아도
목숨의 아픈 證言
꽃가루로 쌓이는 四月
萬里 밖
回歸의 길섶
저 귀촉도 피 뱉는 소리
◈ 외 따로 열고
비 오고 바람 불어도
가슴은 푸른 하늘
홀로 고운 성좌
지우고 일으키며
솔바람
머언 가락에
목이 긴 학 한 마리
멀수록 다가 드는
사모의 空間 밖을
만리 더 지척같이
넘나드는 꿈의 통로
그 세월
외따로 열고
다둑이는 추운 마음
◈ 난(蘭)
나직이 영창 밖으로
스며드는 물빛 여명
그 숨결 이마에 감고
새댁처럼 소심 눈 뜨네
내 마음
사래 긴 갈증 위를
왁짜히 장다리꽃 튼다
◈ 천계(天啓)
-사월탑 앞에서
신 벗고, 塔 앞에 서면
한 걸음 다가서는 祖國
그 絶叫 사무친 골엔
솔바람도 설레어 운다
푸르게
눈매를 태우며, 너희
지켜 선 하얀 天啓
◈ 고비
꽃 피고 싹 트이면
골을 우는 뻐꾸기들
목숨의 크낙한 분만
함께 앓는 이 고비를
山河도
끓이던 靑血
아, 그 三月, 그 四月에...
◈ 설야(雪夜)
눈이 오시네, 사락사락
먼 어머님 옷자락 소리
내 신방 장지 밖을
감도시던 기척인 듯
이 한밤
시린 이마 짚으시며
약손인 듯 오시네.
곰곰이 헤는 성상
멀고 험한 오솔길을
갈(耕)아도 갈아도 목숨은
연자방아 도는 바퀴
갈퀴손
어루만지며
言約인 듯 오시네.
◈ 은총(恩寵)
잎잎이 가을을 흔들고
들국화 낭랑한 언덕
그 푸름 속 아른 아른
고추감자리 난다
당신 뜰
마지막 향연 위로
구름이 가네, 바람이 가네.
◈ 光化門 네거리에서
사월의 이 거리에 서면
내 귀는 소용도는 해일
그날, 동해를 딩굴며
허옇게 부셔지던 포효
그 소리
네 목청에 겹쳐
이 광장을 넘친다
정작 바길 덤덤해도
한 가슴 앓는 상흔
차마 바래일(漂白) 수 없는
녹물 같은 얼룩마다
千이요
萬의 푸른 눈매가
나를 불러 세운다.
◈ 석류(石榴)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 丹楓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 선 淸이어라
못내편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 단란(團欒)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청에
삼가한 듯 들렀다.
◈ 생장(生長)
-진아에게
날로 달 붓듯이
자라나는 너를 보면
무엔지 서러움이
기쁨보다 느껴웁고
차라리
바라던 마음
도로 허전 하구나.
◈ 비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 塔3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쳐
푸른 돌로 굳어라.
◈ 그리움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백록담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쓰느라니 고였는가
그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 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 이별
정작 너를 두고
떨쳐 가는 이 길인데
嶺湖千里(영호천리)를
구비마다 겨운 봄빛
山川이 뒤져 갈수록
닥아 드는 체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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