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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청마 유치환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5. 2. 28.

 

유치환(柳致環, 1908~1967)

호는 청마(靑馬). 시인교육자.

1931'문예 월간''정적'으로 등단,

대표작으로 <깃발>· <행복>· <생명의 서>

해방 직후에는 '생명파 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유치환 시 모음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생명의 서 1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2

 

뻗쳐 뻗쳐 아세아의

거대한 지벽() 알타이의 기맥(氣脈)

드디어 나의 고향의 조그마한

고운 구릉에 닿았음과 같이

오늘 나의 핏대 속에 맥맥히 줄기 흐른

저 미개적 종족의 울창한 성격을 깨닫노니

인어조(人語鳥) 우는 원시림의 안개 깊은 웅혼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조상이

그 광막한 투쟁의 생활을 초창(草創)한 이래

패잔(敗殘)은 오직 죄악이었도다

 

내 오늘 인지(人智)의 축적한 문명의

어지러운 강구(康衢)에 서건대

오히려 미개인의 몽매(夢寐)와도 같은

발발한 생명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러르면

광명에 표묘(漂渺)한 수목 위엔 한 점 백운

내 절로 삶의 희열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만만한 투지를 준비하여 섰나니

하여 어느 때 회한 없는 나의 정한(精悍)한 피가

그 옛날 과감한 종족의 야성을 본받아서

시체로 엎드릴 나의 척토(尺土)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오오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위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진저!

 

 

 

가마귀의 노래

 

내 오늘 병든 즘생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올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야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러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 것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다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서 살어

오욕(汚辱)을 팔어 인색(吝嗇)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증오하야 해도 나오지 않고

날새마자 질타하듯 치웁고 흐리건만

그 거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노니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마귀 모양

이대로 황망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으려 하노라

 

 

고목

 

내 고궁(古宮) 뒤에 가서 보니

뉘 알려지도 않은 높다란 고목 있어

적막히 진일(盡日)을 바람에 불리우고 있었도다

그는 소경인 양 싹도 틀려지 않고

겨우살이 말라 얽힌 앙상한 가지는

 

갈리바의 머리깔처럼 오작(烏鵲)이 범하는대로

오오랜 고독에 무쇠같이 녹쓸어

종시 돌아옴이 없는 저 머나먼 자를 향하여

소소(嘯嘯)히 탄식하듯 바람에 울고 있었도다

 

 

광야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귀고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신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그리우면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곁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위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하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호올로 숨겼기에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무의 노래

 

외로움, 그것이 외로운 것 아니란다

그것을 끝내 견뎌남이 진실로 외로운 것

세월이여, 얼마나 부질없이 너는

내게 청춘을 두고 가고 또 앗아가고

그리하여 이렇게 여기에 무료히 세워 두었는가

 

무심히 내게 와 깃들이는 바람결이여, 새들이여

너희 마음껏 내게서 즐검을 누리고 가라

그러나 마침내 너희는 나의 깊은 안에는 닿지 않는것

 

별이여, 오직 나의 별이여

밤이며는 너를 우러러 드리는 간곡한 애도에

나의 어둔 키는 일곱 곱이나 자라 크나니

허구한 낮을 허전히

이렇게 오만 바람에 불리우고 섰으매

이 애절한 나의 별을 지니지 않은 줄로 아느냐

 

아아 이대로 나는 외로우리라, 끝내 정정하리라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

나는 밤마다 호을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노송

 

아득한 기억의 연령을 넘어서 여기

짐승같이 땅을 뚫고 융융히 자랐나니

이미 몸둥이는 용의 비늘을 입고

소소히 허공을 향하여 여울을 부르며

세기의 계절 위에 오히려 정정히 푸르러

전전 반축하는 고독한 지표의 일변에

치어든 이 불사의 원념을 알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매화나무

 

겨우 소한(小寒)을 넘어선 뜰에 내려

매화나무 가지 아래 서서 보니

치운 공중에 가만히 뻗고 있는

그 가녀린 가지마다에

어느새 어린 꽃봉들이 수없이 생겨 있다

 

밤이며는 내가 새벽마다 일어 앉아

싸늘한 책장을 손끝으로 넘기며 느끼는

엊저녁 그 모색(暮色) 속 한천(寒天) 아래 까무러치듯

외로이도 얼어붙던 먼 山山!

그러면서도 무엔지

아련하고도 따뜻이 마음 뜸 돌던 느낌을

이 가지들도 느껴 왔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표연히 집을 나서

어디고 먼 바닷가에나 가서

그 바다의 양양(洋洋)함을 바라보고

홀로의 생각에 젖었다 오?!

이런 수럿한 심정도 어쩌면

저 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

내가 느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매운 바람결이 몰려 닿을 적마다

어린 꽃봉들을 머금은 가녀린 가지는

외로움에 스스로 다쳐서는 안 된다!

살래살래 타일르듯 흔들거린다

 

목숨

 

하나 모래알에

삼천 세계가 잠기어 있고

 

반짝이는 한 성망에

천년의 흥망이 감추였거늘

 

이 광대무변한 우주 가운데

오직 비길 수없이 작은 나의 목숨이여

 

비길수 없이 작은 목숨이기에

아아 표표한 이 즐거움이여

 

​​

 

바람에게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회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어느 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

 

병처(病妻)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觀念)하며

요요(遙遙)한 태허(太虛)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蕭條)히 지저(地底)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蕭條)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만약 그대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사향(思鄕)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어 와

내 대신 내 자리에 살째기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 양 밀어 놓고

가만히 일어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暮色)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 같은 등불 두엇!

 

산처럼

 

오직 한 장 사모의 푸르름만을 우러러

눈은 보지도 않노라

귀는 듣지도 않노라

 

저 먼 땅 끝 닥아 솟은 산,

너메 산, 또 그너머

가장 아슬히 지켜 선 산 하나--

아아 그는 나의 영원한 사모에의 자세

 

무수히 침부하는 인간의 애환의 능선 넘어

마지막 간구의 그 목마른 발돋움으로

계절도 이미 苛熱에 항시 섰으매

 

이 아침 날에도

그 아린 孤高를 호궤받듯

정결히도 백설 신령스리 외로 입혀 있고

 

내 또한 한 밤을

전전(轉輾)없이 안식함을 얻었음은

그 매운 외롬 그같이 설은 축복 입더메서랴

 

아아 너는 나의 영원--

짐짓 소망 없는 저자에

더불어 내 차라리 어리숙게 살되

 

오직 너에게의 이 푸르름만을 우럴어

귀는 듣지 않노라

눈은 보지 않노라

 

​​

 

석경(夕景)

 

달 희고

잔양(殘陽) 가지 끝에 남아 걸려

참새 떼 마을에 돌아와

아이들처럼 법석대는 저녁은

땅거미같이 은밀히

내 오랜 가향(家鄕) 생각에 늙었음이여

 

 

세월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雨氣 짙은 양이면

자욱 기어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

 

십이월의 北滿(북만)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苛刻(가각)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街城(가성) 네거리에

匪賊(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寒天(한천)模糊(모호)히 저물은

朔北(삭북)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四惡(사악)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鷄狗(계구)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法度(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險烈(험렬)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暝目(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한 思辨(사변)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수선화

 

몇 떨기 수선화

가난한 내 방 한편에 그윽히 피어

그 청초한 자태는 한없는 정적을 서리우고

숙취의 아침 거칠은 내 심사를 아프게도 어루만지나니

오오 수선화여

어디까지 은근히 은근히 피었으련가

지금 거리에는

하늘은 음산히 흐리고

땅은 돌같이 얼어붙고

한풍은 살을 베고

파리한 사람들은 말없이 웅크리고 오가거늘

이 치웁고 낡은 현실의 어디에서

수선화여 나는

그 맑고도 고요한 너의 탄생을 믿었으료

 

그러나 확실히 있었으리니

그 순결하고 우아한 기백은

이 울울한 대기 속에 봄안개처럼 엉기어 있었으리니

그 인고하고 엄숙한 뿌리는

지핵의 깊은 동통을 가만히 견디고 호을로 묻히어 있었으리니

수선화여 나는 너 위에 허리 굽혀

사람이 모조리 잊어버린

어린 인자의 철없는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나니

하여 지금 있는 이 초췌한 인생을 믿지 않나니

또한 이것을 기어코 슬퍼하지도 않나니

오오 수선화여 나는

반드시 돌아올 본연한 인자의 예지와 순진을 너게서 믿노라

 

수선화여

몇 떨기 가난한 꽃이여

뉘 몰래 쓸쓸한 내 방 한편에 피었으되

그 한없이 청초한 자태의 차거운 영상을

가만히 온 누리에 투영하고

이 엄한의 절후에

멀쟎은 봄 우주의 큰 뜻을 예약하는

너는 고요히 치어든 경건한 경건한 손일레라.

 

 

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모색(暮色)이 초연한 거리 끝에 서서

내가 이렇게 눈물짓는 것은

불행(不幸)하여서가 아니다.

 

시방 기척 없이 저무는 먼 산이며

거리 위에 아련히 비낀 초생달이며

자취 없이 사라지는 놀구름이며-

이들의 스스로운 있음과 그 행지(行止)의 뜻을

나의 목숨이 새기어 느낄 수 있음의

그 행복(幸福)에 흐느껴 눈물짓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의지 없고 덧없음으로 하여

보배롭고 거룩한 이 꽃받침자리여.

 

 

 

시인에게

 

영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정수리 위에 도사려

내가 목숨을 목숨함에는

솔개에게 모자보다 무연(無緣)한 것.

 

이 날 짐짓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것은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 되는 무가내한 설정에

비바람에 보듬긴 나무.

햇빛에 잎새 같은 열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의 사무치는 뜨거움에

차라리 나는 가두 경세가(經世家).

 

마침내 부유의 목숨대로

보라 빛 한 모금 다비되어

영원의 희멀건 상판을 기어 사라질 날이

얼마나 시원한 소진이랴.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히 영원하라.

 

​​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

 

日月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입추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저녁놀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잠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 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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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밀고 생겨난 죽순적 뜻을 그대로

무엇에도 개의챦고 호올로 푸르러

구름송이 스쳐가는 창궁(蒼穹)을 향하야

오로지 마음을 다하는 이 청렴의 대는

노란 주둥이 새새끼 굴러들 듯 날러 앉으면

당장에 한그루 수묵(水墨)이 향그론 그림이 되고

푸른 달빛과 소슬한 바람이 여기 잠기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유현(幽玄)한 죽림의 일원이 되다

 

 

죽음 앞에서

 

그 날 절벽 같은 너의 죽음 앞에서

다시도 안 열릴 석문을 붙들고

아무리 불러 호곡한들

내 소리 네가 들으랴?

네 소리 내게 들리랴?

 

 

차창에서

 

달아 나오듯 하여

모처럼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새에 자리 잡고 앉으면

이게 마음 편안함이여

의리니 애정이니

그 습()하고 거미줄 같은 속에 묻히어

나는 이렇게 살아 나왔던가

기름대 저린 유치환

이름마저 헌 벙거지처럼 벗어 팽가치고

나는 어느 항구의 뒷골목으로 가서

고향도 없는 한 인족(人足)이 되자

하여 명절날이나 되거든

인조 조끼나 하나 사 입고

제법 먼 고향을 생각하자

모처럼 만에 타보는 기차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틈에 자리 잡고

홀로 차창에 붙어 앉으면

내만의 생각의 즐거운 외로움에

이 길이 마지막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라도

나는 하나도 슬퍼하지 않으리

 

 

철로(鐵路)

 

사나운 정염(情炎)이 불을 품은

강철의 기관차 앞에

차가이 빛나는 두 줄의 철로는

이미 숙인(宿因) 받은 운명의 궤도가 아니라

이 거혼(巨魂)

- 스스로 취하는 길

- 취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길

의지를 의지하는 심각한 고행의 길이로다

비끼면 나락(奈落)!

또한 빠르지 않으면 안 되나니

오오 한자락 자학에도 가까운 의욕과 열의의 길이로다

 

보라

처참한 폭풍우의 암야(暗夜)에 묻히어

말없이 가리치는 두 줄의 철로를

그리고 한결같이 굴러가는

신념의 피의 불꽃의 화차(火車)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출생기(出生記)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넝쿨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삿날 밤 열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繁文縟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盤)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치자꽃

 

저녁 어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가는 고향의 슬프디슬픈 海岸通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天幕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항가새꽃

 

어느 그린 이 있어 이같이 호젓이 살 수 있느니 항가새꽃

여기도 좋으이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내 여기도 좋으이

하세월 가도 하늘 건너는 먼 솔바람 소리도

내려오지 않는 빈 골짜기

어느 적 생긴 오솔길 있어도 옛같이 인기척 멀어

멧새 와서 인사 없이 빠알간 지뤼씨 쪼다 가고

옆엣 덤불에 숨어 풀벌레 두고두고 시름없이 울다 말 뿐

스며오듯 산그늘 기어내리면 아득히 외론 대로 밤이 눈감고 오고

그 외롬 벗겨지면 다시 무한 겨운 하루가 있는 곳

그대 그린 항가새꽃 되어 항가새꽃 생각으로 살기엔 여기도 즐거웁거니

아아 날에 날마다 다소곳이 늘어만 가는

항가새꽃 항가새꽃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사자(黃金獅子) 나룻

오만(傲慢)한 왕후(王候)의 몸매로

진종일 찍소리 없이

삼복(三伏)의 염천(炎天)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蝴蝶)도 못오는 백주(白書)!

한 점 회의(懷疑)도 감상(感傷)도 용납치 않는

그 불령(不逞)스런 의지(意志)의 바다의 한 분신(分身)이 되려오.

 

 

향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 길은 어디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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