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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동편 지역과 출애굽 과정 이해

by 石右 尹明相 2019. 9. 12.

 

 

요단 동편 지역과 출애굽 과정 이해

 

 

1. 가데스 바네아 재집결에서부터

모압 평지 도착까지의 행군 진로 및 요단 동펀 땅 정복 경로

 

 

 

위의 지도는 이스라엘이 전날 B.C. 144519월경 발생한

가데스바네아 대반역 사건으로 야기된 38년간의 광야 방랑 생활을 마치고

B.C. 14061월 가데스 바네아에 재집결한 후 B.C.14066,7월경

출애굽 광야시대의 최종 기착지였던 모압평지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 준다.

 

위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일단 가데스바네아에서 재출발한 뒤

모압 평지의 동쪽 끝인 느보산에 기착한 다음 이스라엘 본대는 남고 전투 부대만 파견하여

아모리 족속의 주류로서 시혼(Sihon) 왕이 다스리던 아모리 왕국과 그 역시

아모리 족속의 일파로서 옥(Og)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던 바산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후 이스라엘 민족 본대 전체가 요단강과 더욱 가까운

모압 평지 서편으로 전진 배치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정복 완료된 아모리 족속의 땅들은 전 민족적 합의 아래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에게 우선 할당되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측방 및 후방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였을 뿐 아니라 앞으로 대략 5년여에 걸쳐 전개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위한 후방 군수기지를 확보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전반적 과정이 민 20-36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언급되어 있다.

한편 요단 동편 땅은 이처럼 출애굽 시대에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되어

이스라엘 영토의 일부로 편입된 이후 B.C. 733년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완전히 상실될 때까지 시대에 따라 그 양상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어쨌든 이스라엘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이에 출애굽 시대 말기의 광야 행군 과정을 기록한 민수기 제 20-36장 사이의

해당 본문 및 모압 평지에서 행해진 신명기 설교의 배경이나 요단 동편 땅과 관련된

구약 본문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서 민수기 본문에 즈음하여 요단 동편 땅의

개략적 이해를 해둘 필요가 있다.

 

한편 일반적으로 요단 동편 지역(Trans-Jordan)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요르단(Jordan)

사우디 아라비아(Saudi Arabia) 그리고 시리아(Syria)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요단강 동편 지역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요단 동편 땅'이라고 할 때는 그 범위가 훨씬 제한된다.

즉 구약 성경 민수기나 신명기에서 말하는 요단 동편 땅은 요단 서편 가나안 본토와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요단강과 인접한 요단강 동쪽 땅만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에돔, 모압, 암몬과 아모리족속 시혼의 왕국과 옥의 왕국이었던 바산 등이 포함된다.

 

2. 출애굽 시대 당시의 이 지역의 정세

 

출애굽 시대 당시 요단 동편 땅에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족들이 제각각 도시 국가 내지 소왕국 형태의 기틀을 갖추고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예들이 세운 에돔과

야곱의 조부인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들이 세운 모압과 암몬이다.

 

이중 에돔(Edom)은 사해 동편 남단에 위치한 세렛 시내(Zered)를 북쪽 경계로 하고

남쪽으로는 아카바만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모압(Moab)은 사해 동편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남쪽으로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삼았고 북쪽으로는 본래 압복강(Jabbok)까지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땅을 통과하기 직전 아모리 왕 시혼에 의해 아르논강 이북의 땅을 빼앗겨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땅을 통과할 때는 아르논강을 북쪽 경계로 삼고 있었다.

또 암몬(Ammon)은 모압 본래의 땅 동북쪽의 아라비아 사막 변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요단 동편 땅에는 이처럼 혈통적으로 이스라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세 개의 소왕국 외에도 아모리 족속(Amorites)이 주축을 이룬

두 개의 소왕국이 더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혼(Sihon)이 통치한

아모리(Amori) 왕국과 옥(Og)이 통치한 바산(Bashan) 왕국이다.

 

이중 아모리 왕국은 본래 헤스본(Heshbon)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국가였으나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땅을 통과하기 직전에 시혼이 모압으로부터 아르논강

이북 지역을 빼앗아 관할하고 있었다(21:26).

그러나 시혼이 옛 모압 땅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옛 모압 땅은 아직 정치. 군사적으로 공백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비스가산으로 진행할 때까지 모압이나 시혼으로부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음으로 바산은 길르앗을 남쪽 경계로 하여 북으로 헬몬산 지역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을 관할하던 왕국이었다.

이로 보건대 당시 요단 동편에서는 다섯 소왕국이 특별히 다른 왕국을 완전히

제압할 만큼 강력한 세력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두 아모리인의 왕국이

비교적 세력을 확장해 가던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을 통과할 당시 아모리 및 바산과 충돌한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당시 요단 서편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7족속으로 불리는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이 여러 소왕국을 이루고 자리잡고 있었으며

요단 동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요단 서편에서도 아모리 족속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 하고 있었다(7:7 ; 10:1-27 ; 11:1-14).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의 원주민과 관련해서는 그랜드 주석 수 9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3. 요단 동편 땅에 위치했던 소왕국들의 역사

 

3-1. 에돔(Edom)

 

에돔이란 이름은 붉다란 뜻으로 에돔 족속의 조상인

에서의 별명에서 유래하였다(25:30).

에서의 후손들은 일찍이 세일 산지에 정착했다(36:8).

이곳은 사해로 흘러 드는 세렛 시내 남쪽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모압과 경계를 이루고

남으로는 아카바만에 이른다.

그리고 동으로는 에돔 광야의 일부와 서로는 아라바 광야의 일부를 포함한다.

대부분은 황폐한 산지이나 몇 군데의 좋은 경작지도 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에돔 지역에는 에서를 비롯한 그 후손들이

정착하기 이전인 B.C. 23-20세기경에 이미 번영한 문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B.C. 20세기경에 발발한 가나안 남북 전쟁(14) 당시

그돌라오멜(Chedoraomer) 동맹군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후 에서가 이곳에 정착하였을 때는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호리 족속(Horites,

14:6)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으며(36:20-30) 에서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그들과 통혼하게 되었다.

 

세일산 정착 이후 에서와 그의 후손들은 원주민들과 혼혈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에서의 후손들이 이 지역을 다스리는 족장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이후 에돔은 그곳에 이미 있었던 문명을 바탕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출얘굽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실시한 듯하다. 출애굽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에돔을 형제국으로 생각하여 우호적으로 대했으며 또한 에돔에게 이스라엘의 통과를

요청했으나 에돔은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며 자국 영토의 통과를 거절했다. 때문에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은 에돔을 가로질러 모압 평지에 이르는 가까운 길을 두고 앞 지도에서 보듯이

멀리 엘닷 부근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20:14-21 ; 2:8).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뒤 에돔은 유다 지파와 경계를 접했으나

이스라엘과 그들 사이에 특별한 접촉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시대(B.C. 1050-1010)에는 에돔과

이스라엘 사이에 부분적인 분쟁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었다(삼상 10:47).

 

이후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염곡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이고

에돔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삼하 8:13,14).

이로써 에돔은 이스라엘에 복속되고 말았으며 이스라엘 왕 솔로몬 시대에

에돔의 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 에시온게벨은 이스라엘 해상 무역의 전진 기지가 되었고,

이곳 제련소에서 생산된 철이 이스라엘에 공급되기도 하였다.

 

에돔의 이스라엘 종속은 이스라엘 분열 왕국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에돔은 남왕국 유다 여호사밧 시대(B. C. 872-848)에 암몬, 모압과 연합하여

유다를 침으로 독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대하 20:1,22,23).

그리고 에돔은 유다 왕 여호람 시대에 일시적으로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왕하 8:21)

아마샤와 웃시야에 의해 재정복되었다(왕하 14:7,22).

 

그러나 B.C. 735년 에돔은 북이스라엘 및 아랍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남왕국 유다와는 속국 관계를 청산했다.

이후 에돔은 메소포타미아의 앗시리아가 팽창함에 따라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으며,

B.C. 604년에는 앗시리아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B.C. 586년 유다가 멸망할 때 에돔은 바벨론과 동맹 관계에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뻐하였으며(137:7) 이후 서쪽으로 세력을 뻗쳐

유다의 남부 헤브론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의 본거지는 아랍족인 나바티아인에 의해 황폐하게 되었다.

 

한편 마카비 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다시 유대에 점령되어

에돔 족속을 포함한 그 주민들은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에 이 땅이 이두매(Idumea)로 편입된 후 이 족속 출신인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 헤롯 대왕(Great Heord) 및 그 아들들이 팔레스틴을 통치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그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에돔 족속들도

로마의 응징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3-2. 모압(Moab)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맏딸 사이에서 난

모압의 후손들이 세운 국가이다(19:30-38).

이들은 B.C. 19세기경부터 요단 동편 지역에서

한 민족과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출애굽 시대 당시 모압은 이미 왕정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에돔과 접경을 이루는 세렛 시내에서 북쪽으로는

압복강에 이르는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 동편 지역을 통과할 즈음에는

당시 요단 서편과 동편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던 아모리 족속 중

헤스본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시혼에게 아르논 강 이북을 빼앗김으로써

그 영토가 매우 축소된 상태에 있었다.

 

이후로도 모압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큰 세력을 갖지는 못하였는바

모압의 남단에서 북단까지 이르는 거리는 대략 100km,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이르는 거리는 대략 50km 정도에 불과했다.

 

출애굽 시대 당시 이스라엘은 모압을 혈통적으로 가까운 민족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나 모압 왕 발락(Balak)

메소포타미아 복술가 발람(Balaam)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요청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22-24).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사 시대 이전까지는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비교적 평화로웠다.

그리고 사사 시대 때 모압은 약 18년 간 이스라엘을 지배하였다(3:12-30).

하지만 모압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정복되었으며(삼하 8:2)

분열 왕국 시대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사후 모압 왕 메사(Mesha)

반역할 때까지(왕하 1:1 ; 3:4,5)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있었으며,

B.C. 733년경에는 근동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앗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앗시리아가 멸망한 이후에도 모압은 바벨론에 복속되어

백성들이 주변 국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모압인들이 떠난 모압 땅은 수세기 동안 방치되다가

B.C. 1세기경 나바티아인(Nabateans)이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3-3. 암몬(Ammon)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그의 둘째 딸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

벤암미의 후손들이 세운 국가이다(19:30-38).

암몬이 국가 단위로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던 중 사해 북동쪽에 위치한 암몬 땅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이다.

여기서 암몬은 르바임(Rephaim)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에 거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2:20,21),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B.C. 16세기 이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사해 북동부 지역에 정착한 암몬은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로부터

남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부침(浮沈)을 거듭하였다.

그들은 사사 시대에 요단 동편 지역에 자리잡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배하고

요단 서편의 유다와 베냐민과 유다 지파를 침공하여 괴롭힌 일이 있으나(10:7-9)

이스라엘 사울 왕 때에는 이스라엘에 크게 패배하였고(삼상 11:1,2)

다윗의 통치기(B.C. 1010-970)에는 완전히 이스라엘에 정복되기까지 하였다

(삼하 10:9-14 ; 12:26-31). 그 후

 

암몬은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의 혼란을 틈타 일시적으로 강성하여지기도 하였지만,

그 강성함을 그리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남유다의 웃시야(B. C. 791-739)

요담(B. C. 747-731) 왕의 통치기에는 남유다에 조공을 바칠 정도로 약해졌다.

 

암몬은 이후 한때 북이스라엘의 길르앗을 정복하기도 했으나(49:1)

B.C. 8세기경 앗시리아에 복속되었고, 앗시리아의 뒤를 이어 대제국이 된

바벨론에 대항하여 반바벨론 동맹에 가입하였다가(27:3)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B. C. 605-562)에게 크게 패하여

완전히 멸망함으로써 독립 국가로서의 지위를 영영 상실하였다(21:19-22).

 

특히 이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스마엘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유다 총독 그다랴를 암살한(40:13-41:3) 암몬 족속을 본토에서 추방해 버리는

강경한 정책을 시행하였다(25:1).

 

3-4. 아모리(Amori)

 

아모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주해 온 아모리 족속이 세운 소왕국이다.

B.C. 30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메르(Surner) 유적에 의하면

아모리 족속은 본래 팔미라 지방에서 생활하던 유목민이었다.

이러한 아모리 족속은 B.C. 23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으로 이주하여

수메르의 우르(Ur) 3왕조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치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때 가장 유명한 통치자는

구바벨론의 함무라비 왕(Hammurabi, B. C. 1792-1750년경)이다.

그런데 B.C. 1590년경 히타이트족CHittites)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침략해 옴에 따라

아모리 족속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통치는 막을 내리고 아모리 족속은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소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가나안 지역에 있었던 아모리 족속(7:7 ; 10:1-27)과 요단 동편에 있었던

시혼의 아모리 왕국도 이러한 소왕국들 중의 하나이다.

출애굽 시대 당시 요단 동면 땅에 자리잡은 시혼의 아모리 왕국의 역사는

성경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아모리는 본래 헤스본(Heshbon)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국가였으나

시혼이 모압을 쳐서 아르논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그 영토를 확장했다.

이러한 아모리는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땅을 통과할 때

그들의 땅 통과를 거절하였다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그 땅은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주어졌다(21:21-23 ; 2:26-32).

 

3-5. 바산(Bashan)

 

바산은 시혼의 아모리 왕국와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주해 온

아모리 족속들이 세운 왕국이다.

이러한 바산 왕국은 그 경계가 남으로는 야르묵 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헬몬 산에 이르렀는데 주요 성읍으로는 골란(4:43),

아스다롯과 에드레이(1:4) 살르가(3:10) 등이 있었다.

바산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운 초원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번영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50:19 ; 7:14).

 

한편 바산은 출애굽 시대 당시 시혼의 아모리 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속 북상한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당한 뒤 그 땅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므낫세 지파

길르앗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다(21:33-35 ; 32:33 ; 3:1-13).

이후 바산 지방은 이스라엘 남북 분열 왕국 초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아합, 요람, 예후가 다스리던 때는 바산의 일부 혹은 전부가 아람의 수중에 넘어가기도 했다.

 

그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B. C. 793-753)가 잠시 다시 정복하였으나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3(Tiglath-Pileser 3, B. C. 745-727)에 의해

앗시리아 제국에 편입되고 말았다(왕하 15:29).

 

3-6. 미디안(Midian)

 

미디안 족속의 기원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처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미디안의 후예들이다(25:2 ;

대상 1:32).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죽을 즈음 다른 서자들과 함께 동국(東國)으로 보내졌다(25:6).

미디안의 후손들이 정착한 지역은 일반적으로 오늘날 아카바 만의

동부 해안 지역일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일정 지역에만 거주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일정한 영토와 경계선이 없이 유목민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닌 것으로 보인다.

구약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모압 들(36:35 ; 대상 1:46)과 동부 요단 계곡

(25:6,7; 7:25), 또 시내 반도(2:15) 등에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에서 미디안 족속은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처음으로 언급된다.

즉 이들은 그 이야기 속에서 요셉을 그의 형들로부터 사서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상인으로 등장한다(37:28).

이는 당시에 미디안 족속들이 무역이나 여행 등의 생업 외에

인신매매와 같은 일도 했음을 보여 준다.

 

한편 미디안 땅은 모세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애굽 왕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 모세는 그곳의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머물렀고, 그의 장녀 십보라를 아내로 취하였다(2:15-22).

또한 이곳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다가 호렙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났다(3).

 

이후에 미디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평지에 머물고 있을 때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으로 언급된다.

즉 모압 동편에 자리잡고 있던 미디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의

모압 평지에 머물러 있게 되자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압과 결탁,

메소포타미아 복술가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하였다(22:4-7).

그리고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이스라엘을 성적으로 유혹하여

이스라엘 남자들로 하여금 음행에 빠지게 하였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미디안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25:1-18).

이 전쟁에서 모압 동편에 있던 미디안 족속의 여러 성읍과 진지들이 불에 타고

약탈 되었으며, 처녀를 제외한 모든 미디안 족속들이 죽임을 당했다(31) .

 

그 후 B.C.11세기경에 미디안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7년 동안 억압했으나,

사사 기드온이 이끄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궤멸되었다는 기록이 있다(6-8).

 

이후 성경에는 미디안의 역사에 관해서 더 이상의 언급이 없고, 단지 이사야의 예언 속에서

회복된 도시 시온에 약대를 공급하게 될 열방으로 묘사되고 있다(60:6).

 

 

4. 요단 동편 땅에 위치했던 이스라엘 영토의 약사(躍史)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차지한 요단 동편 땅은 남쪽으로는 아르논강, 서쪽으로는 요단강,

북쪽으로는 야르묵강, 동쪽으로는 암몬과 아라비아 광야를 경계로 이루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성경에서 흔히 길르앗(Gilead)’으로 통칭되기도 하는데(22:19),

이곳에는 길르앗 라못, 길르앗 야베스, 마하나임, 미스바, 숙곳, 헤스본 등의 성읍이 있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 지역에는 B.C. 23-20세기경부터

정착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대 이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출애굽 시대 당시 이 지역은 모압과

아모리 족속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이스라엘이 이 곳을 통과할 즈음에는

헤스본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아모리 왕 시혼이 모압의 세력을

아르논강 이남으로 몰아내고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왕 시혼에게 화친을 제의하고 이 지역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시혼이 이를 거절하므로 아모리를 공격하여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하고 그 땅을 빼앗았으며 그곳에서 기업을 얻기를 소원한

르우벤과 갓 지파, 그리고 그 땅 정복에 크게 공헌한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해 주었다(21:21-35 ; 33:1-42 ; 12:1-13:33).

 

가나안 땅 정복 이후 이 지역의 이스라엘 자손들 곧 르우벤과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은 얼마 동안은 요단 서편에서 기업을 얻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누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즉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 자손자손들은 여호수아 사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미디안 족속과 아말렉 족속(6,7), 암몬 족속(10,11)

이방 족속에 의해 수년 또는 십 수년씩 지배를 받았다.

 

사울 왕 시대(B.C. 1050-1010)에는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어느 민족도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 땅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삼상 11장에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길르앗 야베스에 침공한 암몬 족속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대상 5장에 보면 사울 왕 시대로 여겨지는 때에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하갈 자손과 싸워 숭리하고, 그들이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Tiglat-Pileser 3,

B. C. 745-727)에게 사로잡힐 때까지 요단 동편 땅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이 사울 이후 요단 동편 땅을 줄곧 완전히 지배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이 이 땅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 땅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었다(삼하 24:5-9).

 

그러나 분열 왕국 시대, 특히 B.C. 9-8세기경에는

이 땅이 자주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1:3).

왕상 20장에 보면 북왕국 아합(Ahab, B.C. 874-853) 왕 때에

남북 이스라엘 왕국 동맹군이 이 지역의 주요 성읍인 길르앗 라못(Ramothe-Gilead)

아람왕 벤하닷 2(Benhadad 2, B.C. 874-853)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나온다(26-43).

또 왕하 8장에 보면 북왕국 아하시야(Ahaziah, B. C. 853-852)와 남왕국의 요람(Joram,

B. C. 848-841)이 연합하여 이 성읍을 탈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8,29).

 

이로 보건대 분열 왕국 이후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 땅은

어느 특정 민족이 지배한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영토 확장을 위한

각 민족의 각축장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 땅은 B.C. 733년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 의해

정복된 이래 신약 시대 이전까지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