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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안도현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1. 29.

 

출생 1961, 경북 예천

1984년 동아일보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단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부교수

 

 

안도현 시 모음

 

 

​◈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 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 /// / //이 되/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 /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제비꽃에 대하여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냉이꽃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 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 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 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 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 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 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 빼기에 냉이 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 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 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 꽃이 피었다

 

 

 

 

걸어가면서 부르튼 발바닥은 걸어가면서 가라앉힐 수 있지만

어느 날 내 마음속 물집은 아무래도 터뜨릴 수 없다.

터뜨릴 수 없다

그냥 홀로 한국소처럼 먼 하늘에다 두 눈알을 박기 전에

산 넘고 물 건너 그대 만나러 왔더니

지나온 땅 빼돌리고 저무는 벌판 끝으로 달아나 눕는 길

 

 

 

저녁노을

어두워지며

썩은 강에 검은 산이 소리 없이

조선 망하듯 누울 때

앞 논에 개구리야

뒷산에 소쩍새야

빚진 빚진 나라 울지 마라

한 사십 년 가문 사랑 탓하지 마라

오늘 저녁 부끄러움에 멍든 가슴들이

저렇게 다란히 피워 올리는

너무 찌들려서 아름다운 저녁밥 짓는 연기를 보아라

밥 먹고 어디 머리 둘 곳 없을지언정

끝없이 살아

우리 현대사 내려다보는 노을 아래

우리가 씨 뿌린 곡식같이 당당하게

살아 이 땅을 잠들지 않게 하는

내 아버지 붉은 얼굴과 더불어 살아

 

 

 

나의 희망

 

학교 관사 옆 공터가 심심하지 않게

거기에다 호박을 심자 했더니

선생님,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심나요?

깔깔대더니

 

어느새 호미와 삽과 괭이가 모이고,

비료가 한줌씩 오고,

쇠똥거름도 한 리어카 달려왔지.

사실 이런 일이 생전 처음인 나는

구덩이마다 호박씨 서너 개씩을 꼭꼭 심으며

이것들이 땅 속에서 부디 숨결을 열어 주기를

그리하여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 주기를

얼마나 조마조마 기다렸는지 몰라.

 

떡잎이 삼삼오오 오종종 돋은 날

나는 고것들이 햇볕의 끈을 부디 놓치지 않기를

빌었지, 덩굴손을 가지게 되면

자기 아닌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손 뻗어 툭, 건드려 보는 재미로 살아가기를

수업 없는 빈 시간에 둘러보고 물을 주며

또 빌고는 했지.

 

사는 게 뭐 별거 있겠어.

자꾸 물을 주다 보면

호박꽃은 필거야.

그러면 어느 날 아침 한때

, 호박꽃 주위에서 붕붕거리는 한 마리 벌이 될지도 몰라.

세상 속으로 뚫린 귀가 있다면

두두둥 둥둥둥 두둥두 둥둥두둥

호박이 익어 가는 소리도 들을 거야.

그래 그래, 삶의 뜨거운 날 다 지나간 뒤에

우리 반 여학생들 궁뎅이 같은 놈이나

드문드문 열렸으면 좋겠어.

 

 

 

하수도는 흐른다

 

그대들이 퍼먹고 놀다 잠든 한밤에도 하수도는 흐른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잡고 하수도는 흐른다

씨벌씨벌하며 기어이 하수도는 흐른다

이 악물고 눈물 머금고 닦지도 않고 하수도는 흐른다

똥오줌물 데리고 하수도는 흐른다

고관의 저택에도 하수도는 흐른다

아파트 층과 층 사이로도 하수도는 흐른다

손에 손을 잡고 하수도는 흐른다

땅 밑에도 길이 있다고 하수도는 흐른다

이 썩은 세상을 뒤집어쓰고 하수도는 흐른다

흐르다가 숨이 막히면 거꾸로 하수도는 흐른다

그대들의 주방으로 침실로 하수도는 흐른다

 

 

 

저 물푸레나무 어린 새순도

 

저 어린 것이

이 험한 곳에 겁도 없이

뾰족, 뾰족 연초록 새순을 내밀고 나오는 것

애쓴다, 참 애쓴다는 생각이 든다

저 쬐그만 것이 이빨도 나지 않은 것이

눈에 파랗게 불 한 번 켜 보려고

기어이 하늘을 한 번 물어뜯어 보려고

세상 속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을 내밀어 보는 것

저 물푸레나무 어린 새순도

이 봄에 연애 한 번 하러 나오는가 싶다

물푸레나무 바라보는 동안

온몸이 아흐 가려워지는

나도, 살맛 나는 물푸레나무 되고 싶다

저 습진 땅에서

이내 몸 구석구석까지

봄이 오는구나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 가는 길 멀고 험하여

못 가겠다 가다가는 쓰러져 죽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우리가 백두산에 갈 수 있도록

여름에는 햇볕이 땅을 벌겋게 달구었고

겨울에는 모난 데마다 눈이 내려 주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보일 리 없는 길

들에 나가듯 출근하듯 가는 길

골목길은 바로 역사가 시작되는 길

자전거 타고 바람 가르며 학교 가는 길

운동장에 축구공과 함께 콩콩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을 교실로 불러 모아

산당화 피는 아침 국정 국어교과서를 들고

나는 오늘도 백두산으로 간다

너무 늦었다 생각될 때 출발해도

아이들아 우린 꼭 닿을 수 있단다

밟고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 길이

볼수록 멀고 거친 길일 수밖에

자기선전에 급급했기 때문에

그들은 백두산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통일되면 가야지, 그것은

앉은뱅이 그리움이다

그리움을 일으켜 세워 큰길로 나서자

누구나 가야 할 길

백두산 가는 길

지금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원히 갈 수 없는 길

선생님, 천지 물이 바다같이 깊고 푸르다지요

암 그렇고말고 여러분 속마음과 똑같답니다

우리는 오늘도 백두산으로 간다

 

 

 

보리밭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릴 수 없는 깃발이 있다는 뜻이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땅투기꾼 독점재벌에게는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한 뼘의 분노가 있다는 뜻이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희망

우리가 청춘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적에 대한 증오가 이렇듯 푸르고

동지에 대한 사랑이 이만큼 싱싱하다는 뜻이다

이 땅에 아직 보리밭이 있다는 것은

이 땅에 아직 보리피리를 찬란하게 불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대

 

한 번은 만났고

그 언제 어느 길목에서 만날 듯한

내 사랑을

그대라고 부른다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홀연히 떠나는 강물을

들녘에도 앉지 못하고 떠다니는 눈송이를

고향 등진 잡놈을 용서하는 밤 불빛을

찬물 먹으며 바라보는 새벽 거리를

그대라고 부른다

지금은 반쪼가리 땅

나의 별 나의 조국을

그대라고 부른다

이 세상을 이루는

보잘것없어 소중한 모든 이름들을

입 맞추며 쓰러지고 싶은

나 자신까지를

그대라고 부른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때

꽃은, 핀다

 

 

 

애기똥풀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바람이 부는 까닭

 

바람이 부는 까닭은

미루나무 한 그루 때문이다

 

미루나무 이파리 수천, 수만 장이

제 몸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흔들고 싶거든

자기 자신을 먼저 흔들 줄 알아야 한다고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화암사 안마당에는

스님 모시고 노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 귀가 하도 맑고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습니다

간혹 귀 쫑긋 세우고 쌩 하니 달려갔다가는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올 때가 있는데

귓전에 닿는 소리에

덕지덕지 욕심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냥 한번 그래 본 것입니다

바람이, 일없이 풍경소리를 내는 물고기 꼬리를

그저 그냥 한번 툭 치고 가듯이

 

 

 

나그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겨울 편지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별을 쳐다보면

가고 싶다

 

어두워야 빛나는

그 별에

셋방을 하나 얻고 싶다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풍

 

보고 싶은 사람 때문에

먼 산에 단풍

물드는

사랑

 

 

 

정든 세월에게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린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장엄한 가난

기러기떼 男負女戴하고 가네

 

어제도 가더니

오늘도 가네

 

자꾸 밟고 다녀야

허공에도 반질반질하게 길이 난다고

 

 

 

그립다는 것

 

그립다는 것은

가슴에 이미

상처가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날이 살이 썩어간다는 뜻입니다

 

 

강과 연어와 물푸레나무의 관계

 

남대천 상류 물푸레나무 속에는

연어 떼가 나무를 타고

철버덩거리며 거슬러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무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알을 낳으려고

연어는 알을 낳은 뒤에 죽으려고

죽은 뒤에는 이듬해 봄 물푸레나무 가지 끝에

수천 개 연초록 이파리의 눈을 매달려고

연어는 떼 지어 나무를 타고 오른다

나뭇가지가 강줄기를 빼닮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눈 오시는 날

 

워매, 눈 오시네

뭔 일이다냐, 요것이 대체

 

담 너머 과부댁

자지러지네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 확인란에

내 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 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 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 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 가지 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 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 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 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 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 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 받는다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 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 받지 않는다

열 받아도 열 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 받게 하는 것이다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기관차를 위하여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 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가령 객차에 한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 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 섬일 뿐이야

 

내 어린 시절, 기차를 몇 번 타 봤는지

얼마만큼 먼 곳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인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 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 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줄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은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 위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새 길을 만들어 달릴 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 간다 싶을 때 힘을 내

달릴 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물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내가 술로 헝클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둔 길가에

개나리꽃이 너무 예쁘게 피어 있었지요

한 가지 꺾어 들고는

내 딸년 입술 같은 꽃잎마다

, 쪽 뽀뽀를 해댔더랬지요

 

웬걸

아침에 허겁지겁 나오는데

간밤에 저질러버린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내 잘못이

길바닥에 노랗게 점점이 피를 뿌려 놓은 것을

그만 보고 말았지요

 

개나리야

개나리야

나는 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인간이다 인간도 아니다

 

 

 

정든 세월에게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릴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숭어회 한 접시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 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쾌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말을 걸어오는 주인아줌마, 그 굵고 붉은 손목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라

나 혼자 오뎅 국물 속 무처럼 뜨거워져

수백 번 엎치락뒤치락 뒤집혀 보는 거라

 

 

 

구월이 오면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 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 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

 

 

 

나그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 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양철 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 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 다는 것을

너는 눈치 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는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연애편지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한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있나 없나 수없이 되읽어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 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속에서도 꿨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좋고

나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야 썩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친구, 누구보다 깨끗하게 살았노라 말하겠는가

스무 살 안팎에 쓰던 연애편지는 그렇지 않았다네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집안에 도둑이 들면 물리쳐 싸우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가진 건 없어도 더러운 밥은 먹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썼었다네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들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 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