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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류시화(안재찬)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1. 31.

 

류시화(본명:안재찬) 1958년 충북 옥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아침> 시 부문 당선

1991-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출간

외눈박이 물고기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출간

 

 

류시화(안재찬) 시 모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잇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길 처름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지상에서 잠시 류시화라고 불리웠던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별들이 가득 내린 강을 건너다가

그만 별에 발을 찔렸습니다

지금은 집에 돌아와

그 옛날 내가 떠나온 별에게

긴 편지를 씁니다 어떤 영혼은

별에서 왔다는

별에서 와서 고독하다는

그 말을 내 집 지붕에 얹어둡니다

이 짧은 지상의 삶과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내가 띄운 편지가 그 별에 가 닿았는지

내 집 지붕 위에서 별 하나가 흔들립니다

 

 

 

눈 위에 쓴 시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여섯 줄의 시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이월

 

별이 모래 언덕에 스치운다

나그네 하나

그곳에 닿기 전에

생을 마친다

 

 

 

저편 언덕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그 슬픔에 기대라

저편 언덕처럼

슬픔이 그대를 손짓할 때

그 곳으로 걸어가라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기댈 수 없을 때

저편 언덕으로 가서

그대 자신에게 기대라

슬픔에 의지하되

다만 슬픔의 소유가 되지 말라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세월

 

강물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홀로 앉아 있을 때

나는 들었네

그대를 만나 내 몸을 바치면서

나는 강물보다 더 크게 울었네

강물은 저를 바다에 잃어 버리는 슬픔에 울고

나는 그대를 잃어버리는 슬픔에 울었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먼저 가보았네

저물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그 서러운 울음을 나는 보았네

배들도 눈물 어린 등불을 켜고

차마 갈대숲을 빠르게 떠나지 못했네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나 태양에게 고백할 것이 있네

한때 나는 최고의 시인을 꿈꾸었으나

화살을 맞은 독수리처럼

추락하였다

시인이 될 권리를 갖고 태어나

열 살부터 다락방에서 홀로 우주를 꿈꾸었으나

구름들이 몰려와 내 둥지를

감춰 버렸다

그리하여 나 삼류 시인처럼 거리를 헤매며

수년간 시를 잊고 살았다

누군가 세상의 등록 장부에서

내 이름 석 자를

지워 버렸다

 

나 태어나는 날

태양은 일식을 시작하고

꼬리가 여러 개인 별똥별이 날아와

점치는 여자의 눈에 박혀 버렸다

눈먼 여자의 예언에 의할 것 같으면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었다

태양이여, 내 눈을 멀게 하렴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지 않도록

내 눈이 본 것과 보게 될 것들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태양이여, 내 눈에게 말하렴

눈먼 자의 지혜를

진정으로 볼 것을 보고 있는 자의 지혜를

 

눈먼 여자가 나를 따라왔다

눈 먼 늙은 여자가 바다 위를 걸어

나를 따라왔다

태양은 또다시 일식을 준비하고 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네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새들은 우리 집에 와서 죽다

 

새는 공중을 나는 동안 대기를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월의 하루 동안 새가

우리 집 지붕 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집 뒤의 빈터로 추락했을 때

나는 지구가 한쪽으로 기우뚱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새를 떠받치고 있던

어떤 손이 치워지기라도 한 듯

새가 수직으로 빈터의 민들레밭에 내리꽂히자

우리 집 식탁이 기울고

식탁에 놓인 오후의 찻잔이 기울고

순간적으로 찻잔의 물이 엎질러졌다

 

죽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

추락한 새의 무게는

우리 집 뒤의 민들레밭을 누르고

민들레밭은 다시 도시 전체를 누르고

도시는 또다시 도시들로 가득한 세상 전체를 눌렀다

그렇게 해서 잠시 세상의 무게 중심이

한 마리의 새의 죽음의 무게로 이동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새들이 그날 오후

우리 집 빈터에 와서 추락하기라도 한 듯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날개들을 떠받치고 있던

어떤 손이 갑자기 치워지기라도 한 듯

지구의 중심이 우리 집

민들레의 빈터로

기우뚱하고 이동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비밀

 

신비의 서를 나는 읽었네

글자 없이 종이 없이 씌어진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저 티벳 성자들의 낯선 세계 속으로

나는 가 보았다.

흰구름의 길을 헤치고

밀라레빠와 대머리 독수리들의 대화 속으로

그리고 절대의 음악을 나는 들었다.

연주하는 이도 없이 악기도 없이 울려 퍼지는

신비 시인 파비르의 시에 나는 취했다.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지만

그가 주는 술은 마실 수 있다.

술잔도 없이 건네주는 그 술을

입 대지도 않고 나는 마신다.

이 술 취한 자의 말을 들으라

삶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다만 덧없는 시간의 화살 속에서

그 화살 쏘는 자를 나는 본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잘 구워진 빵

적당한 불길을 받아

앞뒤로 골고루 익혀진 빵

그것이 어린 밀이었을 때부터

태양의 열기에 머리가 단단해지고

덜 여문 감정은

바람이 불어와 뒤채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제분기가 그것의

아집을 낱낱이 깨뜨려 놓았다

나는 너무 한쪽에만 치우쳐 살았다

저 자신만 생각하느라고

제대로 익을 겨를이 없었다

 

내 앞에 빵이 하나 있다

속까지

잘 구워진 빵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잠을 자는 것은 인간뿐

삶이 그만큼 피곤하기 때문이다

굴뚝 속에는 더 이상

굴뚝새가 살지 않는다

보라, 삶을

굴뚝새가 사라진 삶을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

오직 인간만이 남으리라

대지 위에

입을 벌리고 잠든 인간만이

 

 

 

안개 속에 숨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

시간이 지나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잊었는가 우리가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배달부가 두들기는

첫 번 째 집

시작 노트의 첫 장에

시의 첫 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넌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내게 말해다오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어린 바닷게들의 눈속임을

순간의 삶을 버린 빈 조개가 모래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을

그러면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만 너를 위한 것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

 

넌 알겠지

바닷게가 그 딱딱한 겁질 속에

감춰 놓은 고독을

모래사장에 흰 장갑을 벗어 놓는

갈매기들의 무한 허무를

넌 알겠지

시간이 시계의 태엽을 녹슬게 하고

꿈이 인간의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다는 것을

내 마음은 바다와도 같이

그렇게 쉴 새 없이 너에게로 갔다가

다시 뒷걸음질 친다

생의 두려움을 입에 문 한 마리 바닷게처럼

나는 너를 내게 달라고

물속의 물풀처럼 졸라 댄다

내 마음은 왜

일요일 오후에

모래사장에서 생을 관찰하고 있는 물새처럼

그렇게 먼발치서 너를 바라보지 못할까

넌 알겠지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는

무한 고독을

넌 알겠지

그냥 계속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을

 

 

 

별에 못을 박다

 

어렸을 때 나는

별들이 누군가 못을 박았던

흔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별들이 못구멍이라면

그건 누군가

아픔을 걸었던

자리겠지

 

 

 

비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안개로 만든 집

구월의 오솔길로 만든 집

구름비나무로 만든 집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세상이 슬픔으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의 새가 세상의 지붕 위를 날고

비를 내리는 오솔길이

비의 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비로 만든 집에서

나는 살았네

비의 새가 저의 부리로

비를 물어 나르는 곳

세상 어디로도 갈 곳이 없을 때 나는

그곳으로 가서 비를 맞았네

 

비로 만든 집에는

언제나 비가 내리지

비를 내리는 나무

비를 내리는 길

비를 내리는 염소들

 

 

 

자작나무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 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지막 연이 들린다

내말은 나에게 되돌아 올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 받지 못했다.

 

 

 

톱질하는 사람들

 

그들은 나무에 앉아

자신이 앉아 있는 가지를 톱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누가 더 빨리 톱질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듯이.

그리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떨어졌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쳐다보던 다른 사람들은

톱질을 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톱질을 계속했다.

 

 

 

온 곳으로 가는 도중에

 

누나 이제 그만 바다로 손을 뻗어

배들의 돛을 잡아 올려요

이제 그만 저 반짝이는 섬들을 건져 올려요

멀리 모래사장 위에 개들은 어슬렁거리고

여름은 얼룩을 남기며 가고 없는데

 

이제 그만 누나 우리 얼굴을

얼굴 속에 파묻어요 태양 저편 더 많은

태양이 빛나지만 우리 이마는 차가워 이제

그만 우리 목에 감은 모래의 두 팔을

풀어 놓아요 망나니들은 모여 칼춤을 추고

바다 위에서 거인과 천사는 싸움을 하는데

 

우리는 침묵하고 우리 이마 위에는 일식이 드리워지는데

누나 이제 그만 배들의 돛을 잡아 올려요

이제 그만 저 반짝이는 섬들을 건져 올려요

우리 온 곳으로 가는 도중에

불꽃 나무는 시들고 나무 위 큰곰별은 추워서 떠는데

그런데 누나 저 구름이 구름 뒤에

뿔 달린 호랑이들을 감추고 있어요

 

 

 

그대와 함께 있으면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너무나도

행복한 기분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내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그대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느 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치 내 마음을 털어놓은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항상 나를 이해하는

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너무나도

편안한 기분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사소한 일조차 속일 필요 없고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을 갖습니다

나는 사랑으로 그대에게 의지하면서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대는 내게

특별한 자신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만의 것

 

외딴 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깻죽지에서 피어오르고, 한두 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있다, 붉은 꽃들

 

그의 그림자는 그의

,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 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우리는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태양은 등 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둥글고

딱딱한 것,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 내려와 우리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우리 발 앞을

지나쳐간 남자,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그가 비탈을 걸어 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러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에게 한 세계를 준다

그는 왜 모자를

썼을까, 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 번도 내려가 보지 않은 강 아래쪽의 풍경과

한낮의 수증기, 구름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 두 시간 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우리가 놀고 있는 강 아래쪽으로 떠 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햇빛을 피해 얼굴을 물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 물잠자리도

그의 것, 이미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 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말씀

 

쉽게 정주지 마세요

그것이 더 애틋한 것이고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제자리에 있는 나무들과

꽃과 돌을

당신의 자리에 서서

맑게 바라보는 기쁨을 이제는 알듯이

그런 겁니다

쉽게 가까이 가지도

멀리하지도 마세요

맑은 눈으로, 남김 없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안을 수 있는

당신의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 애틋한 사랑이란 걸

이제는 당신도 잘 압니다

 

 

 

벌레의 별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엉겅퀴 풀에게 노래함

 

그것이 내 안에 있다

어지러운 풀냄새가 나는 것으로

그것을 알았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나는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일종의 모래 장미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그 무엇

나는 들판으로 걸어갔다 내 현기증이

다만 풀냄새 때문이라고

곧 사라질 것이라고

열에 들떠 내가 손을 뻗자

강 하나가 둥글게 뒤채이기 시작했다

 

나는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더 강렬한 무엇을 느낀다

그것이 나에게 명령한다

나무 아래 양팔을 벌리고 서서

태양을 부르라고

그래서 나무를 불태우라고

들판 가장자리에 더 많은 불꽃이 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구두는 돌들과 부딪혀

맹수처럼 튀어 오른다

 

어떤 뜻을 가지고 신이

나를 만들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그것은

확실하다 신의 손이 그것과 맞닿아 있다

옷들을 벗고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올라

한없이 투명한 빛과 나는 만난다

 

내 몸 안에 머리 둘 달린

뱀이 있어

내 두 눈으로 혀를 내 어미는 것 같다

그러자 어떤 힘이 나를 흔들었다

소리쳤으나 그 소리는 소리 나지 않고

나는 공중에서 회전하였다

날개 하나가 천천히 돋아나

불붙는 구름 그 끝없는 들판 위에

나를 눕힌다

 

 

 

바람 부는 날의 풀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 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가를 보아라.

 

 

 

언덕

 

뒷짐을 지고

한 짐 그리움을 지고

올라가는

, 햇빛은 가장 먼 곳에서

죽어 있는 것들 흔들며

내려오고

 

점점 작아지는 사람

하나

 

 

 

눈물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이 환하다

누가 등불 한 점을 켜놓은 듯

노오란 민들레 몇 점 피어 있는 듯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민들레밭에

내가 두 팔 벌리고

누워 있다

눈썹 끝에

민들레 풀씨 같은

눈물을 매달고서

눈을 깜박이면 그냥

날아갈 것만 같은

 

 

 

늑대들의 태양

 

덫에 걸리면 너의

발목을 끊어 버려라

 

너의 머리를 허공에

들이밀어라 뿔을 내밀어라 머리

가죽을 뚫고 구름 너머로 너

그것을 차가운 구멍 속으로

집어넣어라

 

자아상실 하라 푸른 막을 쑤시고

너 마음대로 솟아올라라

주먹을 쳐들어 그것을

밀어라 비틀어 물

속에 처넣고 부풀어오르는

뇌 세포들을 연주하라

 

행동반경을 넓혀라 하늘의 등에

낙인을 찍어라 하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물어보라 어디

너 마음껏 들이밀어라 몸통을

길게 둥글게 말아

 

침을 흘려라 흰 독수리

찢어라 나비의 날개

사랑을 맛보아라 피맛을

본 짐승처럼

 

나는 나를 죽이고 싶다 나는

내 목을 조르고 싶다

 

저 모든 섬과

악마들을 뛰어넘어 까마귀의

지붕 위로 올라가라 그래서

까마귀의 몸속에 너의

팔다리를 집어넣어라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버릴 수 있다면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 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내리고

마음은 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자살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여기 죽은 나무가 있다

누군가 소리쳐서 뒤돌아보니

그곳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물을 주면 살아날지도 몰라

누군가 다가가서 흔들어 본다

죽은 나무는 기척이 없다

나무는 자살을 꿈꾸지 않는다

그냥 잎을 버리고

죽을 뿐이다

 

 

 

소금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소금별

 

소금별에 사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릴 수 없네

눈물을 흘리면

소금별이 녹아 버리기 때문

소금별 사람들은

눈물을 감추려고 자꾸만

눈을 깜박이네

소금별이 더 많이 반짝이는 건

그 때문이지

 

 

 

소금인형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우리는

강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던 느티나무였다

함께 저녁강에 발을 담근 채

강 아래쪽에서 깊어져 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가 오랜 시간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함께 기울고 함께 일어섰다

번개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원히 느티나무일 수 없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우리는 몸을 바꿔 늑대로 태어나

늑대 부부가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늑대의 춤을 추었고

달빛에 드리워진 우리 그림자는 하나였다

사냥꾼의 총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생각만으로도 늑대의 몸을 버릴 수 있었다

 

별들이 약속했듯이

이제 우리가 다시 몸을 바꿔 사람으로 태어나

약속했던 대로 사랑을 하고

전생의 내가 당신이었으며

당신의 전생은 또 나였음을

별들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당신은 왜 나를 버렸는가

어떤 번개가 당신의 눈을 멀게 했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물방울로 만날 수 없다

물가의 느티나무일 수 없고

늑대의 춤을 출 수 없다

별들의 약속을 당신이 저버렸기에

그리하여 별들이 당신을 저버렸기에..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갯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 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을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비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지구에 달맞이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이제 막 동그라미를 그려낸

어린 해바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너를 감추고 있기 때문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너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 온다

달이 지구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나비의 그 날갯짓 때문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너에 대한 내 그리움 때문

 

 

 

구름은 비를 데리고

 

바람은 물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새는 벌레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구름은 또 비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나는 삶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달팽이는 저의 집을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백조는 언 호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어린 바닷게는 또 바다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 나는 나를 데리고 자꾸만

어디로 가고 있는가

 

 

 

패랭이꽃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 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따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밝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신비의 꽃을 나는 꺾었다

 

세상의 정원으로 나는 걸어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 둥근

화원이 있고 그 중심에는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 꽃은 마치 빛과 같아서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나는 둘레에 핀 꽃들을 지나

중심에 있는

그 꽃을 향해 나아갔다

 

한낮이었다. 그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누구의 화원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그것은

나를 향해 저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듯했다

 

밝음의 한가운데로 나는 걸어갔다

그리고 빛에 눈부셔 하며

신비의 꽃을 꺾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갑자기

화원 전체가 빛을 잃고

폐허로 변하는 것을

 

둘레의 꽃들은 생기를 잃은 채 쓰러지고

내 손에 들려진 신비의 꽃은

아주 평범한

시든 꽃에 지나지 않았다

 

 

 

길가는 자의 노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 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내 안의 물고기 한 마리

 

나는 내 안에 물고기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물고기는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내 안의 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고

때로는 날개 없이 하늘을 날기도 한다

물이 부족하면 나는 물을 마신다.

내 안의 물고기를 위해.

내가 춤을 추면 물고기도 춤을 춘다.

내가 슬플 때 물고기는 돌틈에 숨어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나를 응시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해도

나 자신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는 거.

날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안의 물고기를 행복하게 하는 일.

나는 내 안에 행복한 한 마리 물고기를 키우고 있다.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빈 강에 서서

 

날마다 바람이 불었지.

내가 날리던 그리움의 연은

항시 강어귀의 허리 굽은 하늘가에 걸려 있었고

그대의 한숨처럼 빈 강에 안개가 깔릴 때면

조용히 지워지는 수평선과 함께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지.

저무는 강, 그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목숨처럼 부는,

목숨처럼 부대끼는 기억들뿐이었지.

 

미명이다.

신음처럼 들려오는 잡풀들 숨소리

어둠이 뒷모습을 보이면

강바람을 잡고 일어나 가난을 밝히는 새벽 풍경들.

항시 홀로 떠오르는 입산금지의 산영(山影)이 외롭고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슬픔의 시작이었지.

 

다시 저녁.

무엇일까 무엇일까 죽음보다 고된 하루를 마련하며

단단하게 우리를 거머쥐는 어둠,

어둠을 풀어놓으며 저물기 시작한 강,

흘러온 지 오래인 우리의 사랑,

맑은 물 샘솟던 애초의 그곳으로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저물어야만 하는가

긴 시를 끝의 마지막 인사를

끝내 준비해야만 하는가.

 

바람이 불었다.

나를 흔들고 지나가던 모든 것은 바람이다.

그대 또한 사랑이 아니라 바람이다.

강가의 밤, 그 밤의 끝을 돌아와

불면 끝의 코피를 쏟으며

선혈이 낭자하게 움트는 저 새벽 여명까지도

바람이다. 내 앞에선 바람 아닌 게 없다.

그대여.

 

 

 

누구든 떠나갈 때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이별법

 

사랑이 오실 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한 사람을 떠나보냅니다

비록 우리 사랑이 녹아내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각자의 길을 떠난다 해도

그래도 한때 행복했던 그 기억만은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이 사랑

그대가 주었던 슬픔은 모두 잊고

추억의 상자에서 꺼내어

아름다웠노라, 지극히도 아름다웠노라

회상할 수 있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우리 사랑이 이별로 남게 되어

지금은 견디기 힘든 아픔뿐일지라도

사랑이 오실 때의 그 마음보다 더한 정성으로

그대를 떠나보냅니다

헤어지는 지금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로....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

 

살면서 가장 외로운 날

네가 나에게 왔다.

잠긴 마음의 빗장을 열고

내 영혼의 숨결에

수놓은 너의 혼...

나는 너로 인해 새로워지고

너로 인해 행복했다.

그리고 나 살아있는 동안

너로 인해 행복 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여기에 둥근 기둥이 있어 아무도 그것을 둘러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흙 위에 솟아나온 뿌리가 있어

그것은 방향 없는 눈

아무것도 아닌 것

 

발에 채인다 여기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

빛을 갉아먹는 황금색

벌레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새삼 사랑을 공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눈 위에 눈 위의 감시자들에게 새삼

나의 애인을 들추어 낼 까닭은 없다

여기

하늘에서는 조용히 구름이 날고 이미

이전에 왔던 이가 또 소리친다

이제 곧 종말이 오리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있음을

안다

눈 속의 감자들, 감자의 죽은

눈들

 

우리는 소리 없이, 줄지어

검은 나무들 아래로 지나간다

안개, 기둥들,

들리지 않는 소리들

한때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것들,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여기에 멈추지 않는 흐름이 있어 우리와 함께

지나간다

소리지른다, 언제나 들리는

소리들

여기에 우리가 서 있어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찬란한 기둥들이 서 있어 아무것도

우리의 찬양을 받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눈썹

 

너의 긴 속눈썹이 되고 싶어

그 눈으로 너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네가 눈물 흘릴 때

가장 먼저 젖고

그리움으로 한숨지울 때

그 그리움으로 떨고 싶어

언제나 너와 함께

아침을 열고 밤을 닫고 싶어

삶에 지쳤을 때는

너의 눈을 버리고 싶어

그리고 너와 함께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입술 속의 새

 

내 입술 속의 새는 너의 입맞춤으로

숨막혀 죽기를 원한다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그 입술 속의 새

길고 긴 입맞춤으로 숨 막혀 죽는 새

나는 슬픔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너를 껴안는다

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삶은 다만 그림자

실낱같은 여름 태양 아래 어른거리는

하나의 환영

그리고 얼마큼의 몸짓

그것이 전부

나는 고통 없는 세계를 꿈꾸진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내가 찾는 것은 너의 입술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입술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며 숨 막혀 죽는 새

밤이면 나는 너를 껴안고

잠이 든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온 몸으로 너를 껴안고

내 모든 걸 잊기 위해

 

 

 

들풀

 

들풀처럼 살라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무한 허공의 세상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머물라

언제나 빈 마음으로 남으라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기쁨은 기쁨대로 가게 하라

그리고는 침묵하라

다만 무언의 언어로

노래부르라

언제나 들풀처럼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민들레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

 

 

 

꽃등

 

누가 죽었는지

꽃집에 등이 하나 걸려 있다

꽃들이 저마다 너무 환해

등이 오히려 어둡다,

 

어둔 등 밑을 지나

문상객들은 죽은 자보다 더 서둘러

꽃집을 나서고

살아서는 마음의 등을 꺼뜨린 자가

죽어서 등을 켜고 말없이 누워 있다

 

때로는 사랑하는 순간보다

사랑이 준 상처를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아

지금은 상처마저도 등을 켜는 시간

 

누가 한 생애를 꽃처럼 저버렸는지

등 하나가

꽃집에 걸려 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 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