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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신달자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22. 2. 4.

 

 

신달자 시인, 대학교수

출생 1943, 경남 거창

학력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

데뷔 1964년 시 '환상의 밤

수상 정지용문학상

 

 

신달자 시 모음

 

 

 

선물을 싼 줄은

절대로 가위로

싹둑 자르지 마라

 

고를 찾아

서서히 손끝을 떨며

풀어내야지

 

온몸이 끌려가는

집중력으로

그 가슴을 열어 가면

따뜻한 줄 하나

언 땅 밑에서

조용조용 끌려 나오려니

우주의 하체가 손끝에

움찔 닿으리

 

곧 선물의 정체가

보이리라.

 

 

1

 

때는 새벽

1월의 시간이여 걸어오라

문 밖에 놓인 냉수 한 그릇에

발 담그고 들어오면

포옥 삶아 깨끗한

새 수건으로

네 발 씻어 주련다

자세는 무릎을 꿇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도

환히 미소 지어리니

나의 두 손은 잠시

가슴에 묻은 채 쉬리라.

 

4월의 꽃

 

홀로 피는 꽃은 그저 꽃이지만

와르르 몰려

숨넘어가듯

엉겨 피어 쌓는 저 사건 뭉치들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꽃 철쭉들

저 집합의 무리는

그저 꽃이 아니다

우루루 몰려 몰려

뜻 맞추어 무슨 결의라도 하듯이

그래 좋다 한마음으로 왁자히

필 때까지 피어보는

서럽고 억울한 4월의 혼령들

잠시 이승에 불러 모아

한번은 화끈하게

환생의 잔치를 베풀게 하는

신이 벌이는 4월의 이벤트

 

​​

 

그리울 때는

 

모질게

욕이나 할까부다

 

네까짓 거 네까짓 거

얕보며 빈정대어 볼까부다

 

미치겠는 그리움에

독을 바르고

 

칼날 같은 악담이나

퍼부어 볼까부다

 

 

 

그리움

 

찾아낼 수 없구나

문 닫힌 방안에

정히 빗은 내 머리를

헝클어 놓는 이는

 

뼈 속 깊이깊이 잠든 바람도

이 밤 깨어나

마른 가지를 흔들어 댄다

 

우주를 돌다돌다

내 살갗 밑에서 이는 바람

오늘밤 저 폭풍은

누구의 미친 그리움인가

 

아 누구인가

꽁꽁 묶어 감추었던

열길 그 속마음까지 열게 하는 이는.

 

 

기도

 

아마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잘 됐으면,

일이 잘 됐으면, 자녀들이 잘 됐으면,

내 앞으로의 일들이 잘 됐으면...

좋아 졌으면,

안 좋아졌던 모든 것이 다 좋아 졌으면,

내 신앙이 좋아졌으면, 우리 식구들의 믿음이 좋아졌으면,

우리 교회가 날마다 부흥함으로 좋아졌으면...

육신은 건강했으면,

아픈 몸이 건강했으면, 건강한 몸은 더 건강했으면,

심령에는 은혜가 넘쳤으면,

그리하여 감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는 것이 신나고 즐겁고 행복했으면..

한 마디로 `복 있는 자`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오늘 읽었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복 있는 자`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3절에 있는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헛되지 않고 하는 것에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열심히 일했더니 수고의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렸더니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했더니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또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은혜가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물질이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하는 일이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건강이 마르지 아니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즉 우리의 영, 육간이 날마다 강건함을 입는 자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날마다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날마다 승리하며 이기는 자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주고 꾸어주고도 남는 물질의 복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용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멀리는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하고 몰려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복 있는 자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간절함

 

그 무엇 하나에 간절할 때는

등뼈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끝에

푸른 불꽃이 어른거린다

 

두 손과 손 사이에

깊은 동굴이 열리고

머리 위로

빛의 통로가 열리며

신의 소리가 내려온다

 

바위 속 견고한 침묵에

온기 피어오르며

자잘한 입들이 오물거리고

모든 사물들이 무겁게 허리를 굽히며

제 발등에 입을 맞춘다

 

엎드려도 서 있어도

몸의 형태는 스러지고 없다

오직 간절함 그 안으로 동이 터 오른다

 

 

개나리꽃 피다

 

바람 부는 3

진회색 개나리 가지들 속에서

노오란 머리 비집고 나오는

신생아들

순금의 애기 부처들이

지난해 못다 준 말씀을

세상에 와르르 쏟아내고 계시다

온 몸으로 순금의 등을 켜고

거리에 순금의 자비를 내리신다

화가 잔뜩 난 사람들 여기를 봐라

하늘의 선물로 내린 빛의 아기들

세상을 순화시키려고

거리마다 신생아실을 짓는다

절하라

거기가 어디든 모두 법당 안이다

아기부처들을 태운 황금열차가

세상의 거리를 달려간다

3월 설법으로

개나리꽃 핀다

 

겨울 연가

 

한 번 더 용서하리라

겨울 이별은

땅 끝까지 떨려

설악산엔 이미

안개처럼 눈 덮이고

서울엔 영하로 떨어져

내 창의 울음 커지는 때

한번만 더 용서하리라

 

5시에 몰려오는 새벽어둠은 차고

12월의 노을은 너무 적막해

몸속의 뼈는

회초리로 모두 일어서서

심장을 내려치는

영웅적 고독을

나는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어

 

그대여 좀 더 따뜻한 날에

이별할지라도

지금은 혼자서는 결 딜 수가 없어

 

 

겨울 초대장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아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 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 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

 

공중전화를 보면

동전을 찾는다

 

그냥 무심히

그 앞을 지나갈 수가 없다.

 

해가 진다

어두워 오는 마음에

불을 켠 듯한 이름 하나 없을까

 

사각의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

수첩을 뒤적이지만

가을 억새가 나부끼는

빈 들판에 나는 서 있고

이런 마음을 들켜도 좋을

편안한 이름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공중전화를 보면

그래도 동전을 찾는다.

 

 

구절초

 

무주구천동 오르는 계곡

구절초 한마당

가락으로 흐르고 있네요

하필이면 그 음절이

꼭 울 엄마 가슴 에던

그 곡조 같아서

나 바람 속에 취해 흥얼거리는

구절초 한 송이 꺾어

입술에 대니 그렇구나

울 엄마 낮술에 취해 있던

그 내음 그 노래라

 

 

 

얘야 일어나라

어머니 말씀 하나 그대로 상하지 않고 담겨 있다

몇 천 번 꺼내 들어도

다시 그대로 더 싱싱해지는 말씀

왕창 무너지는 모진 강풍에도 끄떡없이

몸 안에 묻혀 있던 독

독이 또 하나의 독을 만들며

또 하나의 독이 다시 또 하나의 독으로 불어나

강풍을 밀어내던 목소리

얘야 일어나라

그 말씀 더 진하게 발효되어 온몸을 울리는

깊은 항아리

바람이 숱한 세월을 밀고

귓전을 칼바람으로 스쳐지나가지만

얘야 일어나라

볕살 좋은 곳에 오늘은 뚜껑 열어 두고

항아리마다 담긴 말씀을 푸욱 익히는

내 몸의 장독대여.

 

 

 

커피를 마시며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

 

남 보기에라도

수평을 지키게 보이려고

지금도 나는

다섯 번 째

커피잔을 든다.

 

실은

안으로

수평은커녕

몇번의 붕괴가

살갗을 찢었지만

 

남 보이는 일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해서

배가 아픈데

아픈데

 

깡소주를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니

사약(死藥)처럼

커피를 마신다.

 

 

 

파도

 

누가 저렇게 푸른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놓았는가

구겨져도 가락이 있구나

나날이 구겨지기만 했던

생의 한 페이지를

거칠게 구겨 쓰레기통에 확 던지는

그 팔의 가락으로

푸르게 심줄이 떨리는

그 힘 한 줄기로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궁극의 힘

 

 

 

허수아비 1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 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 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헌화가

 

사랑하느냐고

한마디 던져 놓고

천길 벼랑을 기어오른다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아스라한 절벽 그 끝에

너의 응답이 숨어 핀다는

, 그 황홀을 찾아

목숨을 주어야

손이 닿는다는

그 도도한 성역

나 오로지 번뜩이는

소멸의 집중으로

다가가려 하네

육신을 풀어 풀어

한 올 회오리로 솟아올라

하늘도 아찔하여 눈감아버리는

캄캄한 순간

나 시퍼렇게 살아나는

눈 맞춤으로

그 꽃을 꺾는다

 

 

화장

 

속이 비었나봐

화장이 진해지는 오늘이다.

 

결국은 지워 버릴 속기(俗氣)이지만

마음이 비어서 흔들리는

가장 낮은 곳에 누운 바람이

 

붉은 연지로

꽃이 핀다

아이섀도의 파아란

물새로 날아오른다

 

안으로 안으로 삭이고만 살던

여자의 분 냄새

여자의 살 냄새

대문 밖을 철철 흘러나가

삽시간 온 마을 소문의 홍수로

잠길지라도

 

진해버려

진해버려

쥐 잡아 먹은 듯

그 입술에 불을 놓아 버려

 

결국은

색과 향이 있는

대담한 사생활은

그저 이것 하나뿐.

 

 

희망

 

초등학교 때 내 희망은

교회첨탑의 높이

새로 난 시멘트 다리의 폭이었다.

 

그렇게 높게 그렇게 넓게

서울 바람을 먹고

대학 시절 방학에 내려가 본

내 희망은

주머니에 넣어도 모자랄

그 높이 그 넓이였다.

 

지금은

다시 그 교회첨탑은 높기만 하고

다리의 폭은 넓기만 한데

거품 같은 세월은 나쁘지만 않아

()을 버리고 진()을 찾는데

손가락쯤 닳아도 아프지 않은

 

 

 

기우는 해

 

너는 산을 넘고

나에겐 밤이 온다

 

너의 불붙는 옷자락에

내 피가 기울어 나는 더욱 캄캄해지고

더 캄캄해질수록 산을 넘는 너의 불꽃은 활활 탄다

 

캄캄해지는 것과 불붙는 일

내 생을 줄이면 이 두 가지일 것

그 두 가지가 오늘 더 찬란하게 마른 울음으로 땅을 친다

 

마음 구석에 달라붙은 상처들은 지구의 반이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도 옮겨 붙지 않고 따로 타오르고

나는 어둠에 섞여 따로 어두워지고

 

 

 

물 위를 걷는 사나이가 있었다

 

모든 소유를 거부하고

대신 죽기 위한

목숨 하난 가진 자는

가벼운가봐

물 위에 뜨는 꽃잎처럼

가지 위에 있는 새처럼

 

그이 손이

늘 비어 있음을

늦게야 알았다

모이는 것은

십자가와 가시면류관과

피 묻은 옷자락

무덤을 넘어

날아오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사랑은 짐이 아니므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철근으로 추켜세운

당당한 육교 위에

불안하게 흔들리며

바라보는

무한창공의 비어있음

그것이 길인 것을

늦게야 알았다

 

가벼워지는 자가

오르는 길.

 

 

 

 

네 그림자를 밟는

거리쯤에서

오래 너를 바라보고 싶다

 

팔을 들어

네 속닢께 손이 닿는

그 거리쯤에

오래 오래 서 있으면

 

거리도 없이

너는 내 마음에 와 닿아

아직 터지지 않는 꽃망울 하나

무량하게 피어올라

 

나는 네 앞에서

발이 붙었다

 

 

 

내가 건너온 강이 손등 위에 다 모여 있다

무겁다는 말도 없이 손은 잘 받아 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꽤 수척해 있다

툭툭 튀어나온 강줄기가 순조롭지 않았는지

억세게 고단하게 보인다

허겁지겁 건너오느라 강의 성도 이름도 몰라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하는데

뭐 이름을 알아 무엇하냐며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퍼런 심줄 줄기가 거칠게 겉늙어 보인다

그 강의 이름을 그냥 끈이라 하자

날 놓지 못하고 기어이 내 손등까지 따라와

소리 없이 내가 건넌 세월의 줄을 홀쳐매고 있으니

자잘한 잔물결이 손등 전체에 퍼져

내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세월의 주름은 더 깊게

내 손을 부여잡고 있다

그 세월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니어서 아예

잠 못 드는 밤 팔베개를 하고

그 강줄기들과 함께 흐르려 한다

 

 

너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에

울음을 참아 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부를수록

너는 멀리 있고

내 울음은 깊어만 간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네가 눈뜨는 새벽에

 

네가 눈뜨는 새벽

숲은 밤새 품었던 새를 날려

내 이마에

빛을 물어다 놓는다

우리 꿈을 지키던

뜰에 나무들 바람과 속삭여

내 귀에 맑은 종소리 울리니

네가 눈뜨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아침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너는 내 꿈의 중심에

거리도 없이 다가와서

눈뜨는 새벽의 눈물겨움

다 어루만지니

모두 태양이 뜨기 전의 일이다

 

네가 잠들면

나의 천국은 꿈꾸는 풀로

드러눕고

푸른 초원에 내리는

어둠의 고른 숨결로

먼데 짐승도 고요히 발걸음 죽이니

네가 잠드는 시각을 내가 안다

그리고 나에게 밤이 오지

어디서 우리가 잠들더라도

너는 내 하루의 끝에 와

심지를 내리고

내 꿈의 빗장을 먼저 열고 들어서니

나의 잠은

또 하나의 시작

모두 자정이 넘는 그 시각의 일이다.

 

 

 

노을

 

이대로야 돌아설 수 있겠느냐

지는 해 붙안고

단 한마디 말 전하기 위해

파초꽃 같은 심장을 토해 놓는

저 마지막 애원

 

나는 어리석었다

손가락 깨물어 피를 낼지라도

내 심중의 한마디

전했어야 했다

 

 

 

늙은 밭

 

늙은 밭에도 잡풀은 자란다

절반은 자갈이 들어박혀 수명 다해 가는 거친 밭에도

돌 사이를 비집고 잡풀이 자란다

 

이렇게 천둥이 치고 치는 밤

늙은 여자의 밭에도 이름도 없는 바다의 해일이 쳐들어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잡풀이 온몸을 덮어

회초리로 쳐도 죽지 않는 잡풀이 살 속을 흔들어

다만 누워 고요라도 암벽 타듯 끌어안아라 한다

 

어쩌다가는 눈에 익은 배롱나무 한 그루

무슨 인연으로 천둥 낙뢰를 혼자 맞으며

방에서 새어 나간 마음 한 줄기

밤새 누가 울었는지 모르게 소나기 없었던 마당이 젖어 있다

 

다만 누워 어둠을 꼬아 사슬처럼 온몸에 두르니

누군가 이리 떼처럼 운다 바스러지듯 운다

얼마나 단단한 심장인가 하늘이 내려와

땅을 덮고 땅이 솟구쳐 하늘을 껴안는

 

늙은 밭에는 홀로 울음을 달래는

산 그림자가 산다.

 

 

 

늙음에 대하여

 

그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열손가락 활활 타는 불꽃 때문에

임종에 가까운 그를 기다렸고

내 나이 농익은 삼십대에는

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

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욕망의 잔고는 모두 반납하라

하늘의 벽력같은 명령이 떨어지면

네 네 엎드리며

있는 피는 모조리 짜 주고 싶었다

 

피의 속성은 뜨거운 것인지

그 캄캄한 세월 속에도

실수로 흘린 내 피는 놀랍도록 붉었었다

 

나의 정열을 소각하라 전소하라

말끔히 잿가루도 씻어내려라

미루지 마라

 

나의 항의 나의 절규는

전달이 늦었다

20년 내내 전갈을 보냈으나

이제 겨우 떠났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이젠 마음을 바꾸려는

그 즈음에

 

 

 

늦은 밤에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

울음을 참아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풀이 죽어

마음으로

너의 웃음을 불러들여

길을 밝히지만

너는 너무 멀리 있구나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다만 하나의 빛깔로

 

백지에 동그라미 그리면

그 안에

내 세상이 있다

 

조금 비뚤어진 원 안에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것은

하나의 빛깔로 움터오는

새싹인

아직 이름 없는 나의 세상

 

마흔 넘어도

두려움 없이 넓은 공간에 있을 수 없어

작은 동그라미 그리고 들어서면

아 드디어

여린 뿌리를 내리고

다만 하나의 빛깔로 떠오르는

나의 세상

 

혼탁한 거미줄과

그 뒤의 안개를 거두어 내고

가파른 물길 같은

어둠을 헤엄쳐온 발끝에

새벽 5시의 이슬이 터지는

순간에 접하는 나의 세상

 

살갗을 찢는 포만의 욕구

자생하여 날개를 젖던

앓던 것들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신으로 한 뼘씩 줄여

동그라미 그리면

동그라미 그리면

한 점 점으로 찍히는

단호한 집중

 

아직 이름 없는 새싹인

자궁 속의 태아처럼

이제 분명한 성()으로 자리잡는

나의 세상이 있다

 

 

 

대리 폭행

 

아 네 거기서 네 네 조금만 더 가세요

조금만 더 가서 왼쪽으로 돌자마자 우회전

직진해서 바로 계단 내려오면

그렇죠 다시 좌회전 다시 우회전 몇 발짝 직진하면……

네 네 바로 거기 거기 네 네 네 바로 거기에

나를 통과하는 화살이 박혀 있어요 보이지는 않아요

소리도 없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는 그를 두려워해요

네 그것을 힘차게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흔적 없이 치세요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그렇죠 높이 쳐든 그 돌칼로 내리치세요

햇볕을 부르는데 먹장구름이 떼를 몰아

사정없이 날 이끌어 간다는 그 운명을.

 

뒷산

 

외로울 적에

마음 답답할 적에

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벗는다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 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뒷산은 뒷산은 내 몸이다.

무겁게 끌어 온 신발의 진흙덩이

서리 감겨 살을 에는 하루의 바람

모두 모두 부려놓는

울먹이는 내 몸이다.

 

 

바다를 건너왔지

 

바다에서 바다로 청남빛 갈매속살에 짓이겨지면서

그 푸른 광야를 헤엄쳐 왔지

허연 이빨 앙다문 파도가 아주 내 등에서 살고 있었어

성깔 사나운 바다였다

내 이빨 손톱 발톱을 다 바다에 풀어 주었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단단한 것을 버리고

바다와 몸 섞지 않으면 안 된다

유순하게 물을 따르기만 했는데 팔뚝 굵어진 여자

망망대해의 질긴 심줄이 등으로 시퍼렇게 몰렸다

드디어

암벽화처럼 푸른 지도가 내 등 위에 그려지고 말았어

배 등에 세상의 바다가 다 올려져 있더군

몇 만 겹줄을 벗겨내도 꼼짝 않는 바다

바다를 건너와서도 내려지지 않았다

시퍼렇게 시퍼렇게 바다를 걷어내어

지상의 돛으로나 우뚝 세우고 싶은

내 몸에 파고 든 저 진초록 문신.

 

 

 

등잔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 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미로

 

언제나

시작에서

길을 잃는다.

 

일보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방황하며 더듬거리며

내 마음 같은 곳을 찾아서

걸어간다.

내 마음 같은

갈래갈래 엇갈린 길

 

길머리에서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으려 한다.

 

한 올의 실도 쓸모없는

퇴색한 천연색 실오리를

나는 정결히 고르고 섰다.

 

동행도 없는

밤의 숲

머리카락 곤두서는

아득한 무섬증

 

가도가도

그 자리

엉거주춤 서성이고 있네.

 

 

 

미망의 노래

 

우리는 무엇을 나누었는가

시간을 붙들고 얼굴을 마주하던

몇 년의 세월에도

꼭 같은 거리쯤에 서 있는

우리들 사이로

눈보라가 날린다

시대의 찬비 뿌리고 간다.

 

내 마흔의 혁명은

먼 바다 고도에서 울고 있고

나의 절망은 암초에 걸려

다시 허리가 꺾이니

결코 좁혀질 수 없는

먼먼 거리에

떫은 바람만 머뭇거리고

이름도 없는 별 두 개가

제각기 제 빛을 거두어 들인다

 

그대여

사람과 사람이

어디까지 가까울 수 있느냐

친할 수 있다고 하더냐

어제도 마지막 골목에서 돌아서고

오늘은 그 좁은 골목마저 간 곳이 없구나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길 우리의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

노을이 지는 거리에 서서

불 켜지는 집들을 바라볼 때

어둠은 차라리 우리들 마음에

내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황무지

무명 찢어지는

비명만 외치던 곳에

온화한 미소로 들어앉은 그대여

 

오늘은 신사동 하늘에

낮게 먹구름이 덮히고

다락방에 숨어 들어가

젖은 마음을 구름에 부치니

 

그대여 두어 방울 떨어지는 어깨의 비

그것은 비가 아니다

그대 옷 속을 파고드는 비

그것은 비가 아니다

 

호올로 내가 키우는

눈물의 눈물

심장이 뛰는 살아 있는 핏덩이

 

진실로 그대에게 전해야 할

미망의 잠꼬대를 들어주어라.

 

 

미모사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도

후 하고 입김만 불어도

두려운 명령처럼 잎을 접는 미모사

열세 살 적 민감한 반응을 네게서 본다

햇살이 닿아도 어둠이 닿아도

주르르 피가 아래로 몰려

흔들리지 않으려는 자기 보호에

그는 잘 길들여져

상처받지 않으려는 운명적 순응이

열세 살 순수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늘

너의 순종은 굴종으로 보인다

작은 외압에도 몸 사리며

돌돌돌 몸을 접어 엎드리는

너의 연약함에 분통이 터진다

칼이 닿아도 당당히 잎을 펴는

뎅겅 목이 달아나도 좌악 가슴을 펴는

시대적 고집이 너는 아쉽다

 

쯧쯧 혀를 차다가 그렇지 그래

누군가를 닮아서 더 화가 저미는

멍청하게만 보이는

딱한 미모사

 

바람의 생일

 

개 조개를 넣고 미역국을 끓이는

오늘은 바람의 생일

 

삶은 계란 두 개

명란젓 두 개

소고기 완자를 한 접시 차리니

 

양수리 물 위를 걸어

내 집으로 오는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안개로 얼굴을 싸고

슬며시 비밀처럼 날아든 바람

 

달 밝은 양수리 강가

머리카락을 날리며 내 두 볼을 감싸던 다정한 바람

생일상 차려 주고 싶다고

덥썩 내 뭉클한 외로움이 약속한

 

그 바람이 다시

은근하게 붉은 속살의 언어로

내 식탁에 앉는

봄꿈의 한 찰나.

 

 

백치 슬픔

 

사랑하면서

슬픔을 배웠다.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사랑보다 더 크게

내 안에 자리 잡은

슬픔을 배웠다.

 

사랑은

늘 모자라는 식량

사랑은

늘 타는 목마름

 

슬픔은 구름처럼 몰려와

드디어 온몸을 적시는

아픈 비로 적시나니

 

사랑은 남고

슬픔은 떠나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슬픔아

이 백치 슬픔아

 

잠들지도 않고

꿈의 끝까지 따라와

외로운 잠을 울먹이게 하는

이 한 덩이

백치 슬픔아

나는 너와 이별하고 싶다.

 

 

 

백치 애인

 

나에게는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 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 애인아.

 

 

봄 강

 

금방이라도 치마를

획 걷어 올릴 것만 같아 조바심친다.

밤새 꿈틀거리며 잠들지 않는

저 봄 강의 부풀어 오르는 엉덩이에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숨찬 소리의 신음을 흘리고 가는

새벽

저 멀리 버티고 선 올림픽대교의 기둥이

무슨 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물 속 빛의 교감일까

조마조마하다 당장이라도 저 봄강이

온몸으로 속옷까지 풀어헤칠 것만 같다.

 

 

봄의 금기사항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부적

 

얘야

인터넷에 들어가려면

부적처럼 종이 한 장

들고 가거라

유혹이 번창하는

홍등가를 지나거든

게놈의 유전자에

발목이 잡히거든

봇물처럼 쏟아지는

전자파에 눈이 멀거든

괴물, 수렁, 거친 바람을

만나거든

칼칼하게 일어서는

종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접속에서 접속으로

뜨거워지는

어지러운 피로에 떨어지면

흰 종이 한 장 꺼내

네 정신으로

 

네 이름자를 힘차게 눌러 써 보아라.

 

 

빨래

 

가내(家內)

붙일 곳 없는

마음.

 

흔들리는 물속에

옷을 담그다.

 

비누를 풀면

안개 자욱한 역두(驛頭)에서

손이 시린 여자(女子)

옷을 주무르면

쓸쓸한 해로(偕老)

잠겨있는 문()이 보인다.

 

방망이를 두드린다.

출렁이는 물속에

가셔지는 때

 

가셔지지 않는 때를

비벼 문지르면

조금씩 열리는 문()

물에 헹구면

다시 닫혀진다.

 

물을 짠다.

꼬우며 물을 빼는

불타는 인내(忍耐)

 

십자가를 지듯

태양(太陽) 아래 몸을 말리는

옷 속으로

돌아오는 여자(女子)

 

빨랫줄에 걸쳐진

그녀의 방황(彷徨)

증발(蒸發)한다.

 

 

나뭇잎 하나

 

막 떨어진 나뭇잎 하나

밟을 수 없다

그것에도 온기 남았다면

그 스러져 가는 미량의 따스함 앞에

이마 땅에 대고 이 목숨 굽히오니

내 아버지 호올로 가시는

낯설고 무서운 저승길

내 손닿지 않는 먼 길

비오니

그 따스함 한가닥 빛이라도

될 수 있을까 몰라

울 아버지

동행길의 미등이 될 수 있을까 몰라

막 떨어진 나뭇잎 하나

 

 

낙엽송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

저것들은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딸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끓이던

속 터진

내장들이다

 

 

너를 위한 노래

 

문 잠긴 방에도

새벽 오듯

 

창 없는 감옥에도

봄 오듯

 

눈감고 있는 내게

너 온다

 

빛의 속도로

어둠을 뚫고

 

 

너의 연인이 되기 위해

 

네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너의 연인이 되기 위해

오늘 나는 꽃 이름하나를 더 왼다

달빛 잠기는 강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시구를 욀 때

내 눈은 더 깊어지고 그 만큼 세상을

더 안아 들이면

너는 성큼 내 앞에 다가서게 될까

 

네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너의 연인이 되기 위해

오늘 나는 별 이름하나를 더 왼다

바람 부는 숲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내가 마음으로 노래 부르면

내 발 앞에 꿈꾸던 낙원이 열리고

그 만큼 평화로운 세상 안아 들이면

너는 성큼 내 앞에 다가서게 될까

 

 

사람 찾기

 

둘러봐도 늘 없다

너무 가까이 내 안에 있음일까

이 우주 안에 너 살고 있음

나 분명 알아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높은 지식

너 찾다 눈감는 일

가장 아름다운 길

 

 

 

1

풀기는 풀어야지

 

끝도 없이 뒤엉킨

실 꾸러미

늘어나는 매듭

 

이빨로 뚝 끊어서

버릴 수 없구나 그대여

 

어디랄 것도 없이

막막하게

세상사는 엉키기만 하는데

 

한숨으로도

흥으로도

풀려지지 않는

 

이 배반의 미궁을

통째로 버릴 수는 없구나 그대여

 

2

하나를 풀면

하나가 엉킨다

 

빛도 그늘도

아득한 층계

의문의 첫 계단

더듬어 오르면

 

엉키지도 못하면서

엉키기만 하는

 

사랑과 미움의

앓는 뿌리 보인다

 

너는 너의 집으로

나는 나의 집으로

풀리면서

우리는 다시 엉킨다

 

엇섞이며

거부하며

얽히며 얽히며

 

3

휘청거리며

어엉킨다

살 속 깊이

쑤욱 가시가 들어와도

앞만 보고 간다

꼿꼿하게 간다

뒤돌아보면

더 엉킨다

 

 

 

어둠이 내리면서

나의 섬은 밝아 왔다

 

어둠이 내리면서 나의 꿈은

별빛으로 내리고

하루의 심지를 끈 자리에

깨어나는 섬

가장 진실 된 나무 하나 자라고 있는

나의 섬에 나는 돌아와 있었다.

 

돌아와 있는 이 하나의 사실

눈이 찔리는 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바라보는 신세계

나의 두 발은 초원 위를 걷고 있었다

 

꿈의 마른 잎을 따내면

안식의 꽃 한 송이 피어나고

순한 불빛이 영원처럼

섬을 둘러 왔다

 

돌아와 있는 이 하나의 현실

가슴 깊이 키운 새 한 마리

창공을 난다

몸 하나로

무한 공간을 받쳐 든

나의 섬

 

서서히 어둠이 가고

어둠 따라 섬은 떠나고

하늘로 이어진 수천의 층계도 내려앉는다

섬이 지워지고

어제와 같이 아침이 오고 있었다.

 

 

세상에 빛이 되는 삶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며 살아가고

어딘가 빛을 만들며 사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사나운 소 한 마리 몰고

여기까지 왔다

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았다

골짝마다 난장 쳤다

손목 휘어지도록 잡아끌고 왔다

뿔이 허공을 치받을 때마다

뼈가 패었다

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

 

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

정을 패대기쳤다

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 부렸나

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 같다

핏발 가신 눈 꿈벅이며 이제사 졸리는가

!

잠들라 운명.

 

 

손톱

 

한번쯤은 할켜서 앙칼진 여자의

성껄머리 보여 주고 싶었다.

 

가라 가라 몸 안에서 떠밀려

드디어 손끝에 다달아

세상 앞에 드러난

세상을 향한 나의 저항

그러나 체질적으로

저항은 조금만 길어도 불편해

가위를 들여 대 잘라 버린다.

 

그것도 잘 다듬으면

날카로운 펜촉으로 도약

몸 안에 오래 고인 진한 울화 배어나

이 세상 어느 벽보판에 붉은 글씨 하나

남길 수 있거나

 

중심 없이 흔들리는 세상을 겨냥한

화살촉으로 키워도 좋으련만

시원하게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묵묵히 고요히 목이 잘린다.

 

콕 찍어 피 한 번 내지 못하고

으윽하고 소리 한 번 치지 못한 채

유순한 침묵으로 굳어 잘리고 마는

 

그러나 미지의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여자의 숨은 반란.

 

 

슬픔

 

슬픔을 가지고 논다.

분칠을 벗긴 슬픔

마알갛게 씻은

슬픔은 예쁘다.

 

다정한 슬픔

소리 없는 슬픔

빈 주머니 속에서도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노는 슬픔

 

양식보다 더 풍성히 쌓여

슬픔은 부족하지 아니하다.

 

나는 슬픔에게 교태를 부린다.

슬픔은 나를 기르며 지배한다.

늙지도 않고

새로운 힘으로 태어나는 슬픔

 

눈물도 아닌

철망도 아닌

치욕도 아닌

오늘 슬픔은 예쁘다

 

 

슬픔을 갖고 놀며

 

슬픔을 잊는다.

 

 

시간을 선물합니다

 

막 낳은 달걀 같은 알의 시간

새해라는 따뜻한 이름을 선물합니다

 

사람이 아닌 신의 이름으로

축복의 햇살이 널리 퍼지는

금물결 일렁이는

새해라는 시간을 선물합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에게도

고루고루 주어지는 신의 선물

당신에게 새해의 시간을 선물합니다

 

그 시간 안에는 우주가 넘실거리고

그 시간 안에는 아침과 밤이 출렁거리고

그 시간 안에는 사람과 나무와 꽃이 피어납니다

 

당신이 피어납니다

당신이 피어날 때

날마다 당신의 아침은 새해가 되고

날마다 당신의 밤은 시간이 됩니다

 

숨결 들리고 노래가 들리고 축가가 울려 퍼지고

당신은 드디어

생명의 열매로 충만합니다

 

날마다 당신은 충만합니다

당신이여

진정으로 그런 새해가 되기를

 

 

 

심장이여 너는 노을

 

저녁이 노을을 데리고 왔다

환희에 가까운 심장이 짜릿한 밀애처럼

느린 춤사위로 왔다

 

나는 그와 심장을 나눈 사이

 

닿을 듯 말듯 불같은 입술로 내 가슴께로

왔다 가면

나는 절반의 심장으로 차가운 밤을 노래한다

 

밤이 노을을 데리고 갔다

노여운 기다림을 온 몸에 감고

캄캄한 휘장을 던지며 빠른 춤사위로 갔다

 

나는 그와 심장을 나눈 사이

 

노을에는 내가 활활 타 오르고

나에겐 노을이 광기처럼 잠자는 울음을 깨운다

노을의 심장위에 내 심장을 포갠다.

 

 

雅歌 아가 6

 

해가 저물고 밤이 왔다

그러나 그대여

우리의 밤은 어둡지 않구나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어둠은

물처럼 부드럽게 풀려

잘 닦은 거울처럼

앞뒤로 걸려 있거니

그대의 떨리는 눈썹 한 가닥

가깝게 보이누나

밝은 어둠 속에

잠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나는 글을 쓴다

첫 장에 눈부신 그대 이름

절로 밝아오는 하나의 등불

내 생의 찬란한 꽃 등이 켜진다

 

 

어둠에게

 

편안하네

어둠 베고 누워 어둠 덮으니

좋다 이제야 너와 하나이네

 

어둠에서 어둠으로

그 어둠 비켜 가는 자리에

더 큰 어둠 삭은 뼈 몇 개

잡히던 그 어둠

 

이제 환하게 안이 보인다

분홍빛 끝이 잡힐 듯

오래 같이 살아 내 몸에 닿으니

투명한 물방울이 되네

나의 삶 백치 한 덩이 어루만지며

나를 쓰다듬던 나의 사랑

그렇게 되기까지 먼 길을 왔네

 

 

어머니

 

젊은 시절 아이들은 어리고

나의 생활은 복잡하고 아팠다.

그냥 고달픈 날 이었다고만 말해두자.

 

그 시절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날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아파하고

비록 멀리서지만 눈물 흘리며

같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좀 잤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렸고, 근심으로 가득 찼다.

 

나는 지금 어머니의 이 목소리가 그립다.

늘 내 생활이 고단하고 버겁다고 믿었던

어머니는 나만 보면 잠 좀 자라고

애원하고 푹 쉬라고 애를 태웠다.

 

가장 시원한 곳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제발 자라고, 꿈도 꾸지 말고 자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는

이젠 정말 계시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미 이십 년이나 지난

어머니와의 이별을 인정하지 못해,

인생이 눈물 나게 고달프면

지금도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가슴을 친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도 좋은 일에는

어머니를 덤덤하게 생각하면서도

지쳐 쓰러져 통곡하고 싶은 우울한 날에는

어머니를 간절하게 찾게 되는 것이다.

 

엄마!” 나는 지금도 자주

이렇게 열 몇 살 된 계집아이가 되어

어머니를 부르고 싶다.

부르고 다시 부르고 싶다.

 

어쩌다 그렇게 부르고 나면

강력 비타민 몇 알 먹은 것보다

더 힘이 나고 마음이 밝아진다.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속에서

나는 자주 울고 싶은데,

그때 가장 그리운 사람이 어머니다.

 

조심해라, 얘야. 저 피곤한 얼굴 좀 봐라.

어이구, 어쩌나. 저녁 굶은 거 아니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어머니가 등을 대며 업히라고,

얼른 업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곤 한다.

 

나 힘들어 엄마.”

핸들에 얼굴을 묻고 나는 울먹인다.

요즘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내 마음속에 살아 있고,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힘을 얻고 있다.

 

 

 

여보 비가 와요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지금 어렵다고 해서

오늘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기다림 뒤에

알게 되는 일상의 풍요가

진정한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신경 쓰지 말자

중요한 건 내가 지금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내가 가진 능력을 잘 나누어서

알맞은 속도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여자이고

아직도 아름다울 수 있고

아직도 내 일에 대해

탐구해야만 하는

나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에 초보자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을 익히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현재의 내 나이를 사랑한다

인생의 어둠과 빛이 녹아들어

내 나이의 빛깔로 떠오르는

내 나이를 사랑한다

 

 

여자의 사막

 

주저앉지 마라 주저앉지 마라

저기 저 사막 끝

푸른 목소리가 있으리니

왼손이 오른손에게

오른손이 왼손에게

타이르고 다시 타이르는

마지막 한순간의 절대의지

 

발가락이 타들어가는

죽음의 전선을 건너

오직 닿아야 할 곳은

그대 두손이 잡히는 곳

떠나지 마라 떠나지 마라

내 몸의 절판이 모랫벌에 묻힌들

그대 앞에 당도하는

이 생명은 꺼지지 않아.

 

 

 

열애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 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벤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딱지를 떼어 다시 덧나게 하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 흘리는 사랑도 며칠은 잘 나가겠다

내 몸에 그런 흉터 많아

상처가지고 노는 일로 늙어버려

고질병 류마티스 손가락 통증도 심해

오늘밤 그 통증과 엎치락뒤치락 뒹굴겠다

연인 몫을 하겠다

입술 꼭꼭 물어뜯어

내 사랑의 입 툭 터지고 허물어져

누가 봐도 나 열애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작살나겠다.

 

 

 

오래 말하는 사이

 

너와 나의 깊은 왕래를 말로 해왔다

오래 말 주고받았지만

아직 목이 마르고

오늘도 우리의 말은 지붕을 지나 바다를 지나

바람 속을 오가며 진행 중이다

종일 말 주고 준 만큼 더 말을 받는다

말과 말이 섞여 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때때로 계절 없이 눈 내리기도 한다

말로 살림을 차린 우리

말로 고층 집을 지은 우리

말로 예닐곱 아이를 낳은 우리

그럼에도 우리 사이 왠지 너무 가볍고 헐렁하다

가슴에선 가끔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말할수록 간절한 것들

뭉쳐 돌이 되어 서로 부딪친다

돌밭 넓다

살은 달아나고 뼈는 우두둑 일어서는

우리들의 고단한 대화

허방을 꽉 메우는 진정한 말의

비밀 번호를 우리는 서로 모른다

진정이라는 말을 두려워하는

은폐의 늪 그 위에

침묵의 연꽃 개화를 볼 수 있을까

단 한 마디만 피게 할 수 있을까

단 한마디의 독을 마시고

나란히 누울 수 있을까

 

 

자동옹주

 

바라만 봐도 몸이 저릿한 자동옹주를 아시나요

악연인지 필사적 사랑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두 줄기가 서로 배배틀며 얽혀 능구렁이처럼

서로 살을 파듯 엉켜

자웅동주라고 부르는 나무가 있는 것인데요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 둥근 정자 옆을 보느라면

암수가 한 몸으로 아랫도리를 칭칭 감고 있는 것인데요

서로 종()이 다른 나무들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은 것인데요

슬프다 슬프다 어리둥절하다

밑동만 얽히고 나뭇잎들은 서로 다른 잎을 피우고 있는 것인데요

인간의 정욕 숨기고 싶지만 얽히고 싶은

그 징그러운 외로움을 보고 싶거든

소양강건너 청평사를 좀 가 봐요

그 낯 뜨거운 정사를 볼 수 있을 것인데요

몸은 얽히고 생각은 다른 그 생각 따라 잎은 모양새가 다른

그 소름 돋는 상것들아니 정직한 그 인간적 나무를.

 

 

적막이 나를 품다

 

안겨

적막이 가슴을 열었다

머뭇거리는 찬 손으로

속옷까지 완전히 벗고 뛰어들어

고요히 고요히 적막과 하나가 되어 보는

겨울 오후

이렇게 편안한 포옹은 처음이다

깊이 살 속으로 파고드는

허공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었던

무엇이었는데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슬금슬금 사라지는

바로 그때

다시 적막이

 

 

종소리

 

종이 안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듣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종이 앞에서

뜨거운 과욕의 갈망을 걷어 내는 순간

울리는 종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리고

넝마같이 귓전에 펄럭이는 소음을 지나

해거름에 더욱 눈 찔리는 불빛들 헐떡이는

울화처럼 치솟은 빌딩 숲을 걸어와

간절히 마주하는 종이 앞에서

 

맑은 랩으로 싸 얼려 놓은 순수라는 말

두 손을 비벼 더운 사람의 기운으로

풀어 녹이는 순간

 

저 지하 층층 어둠 속에서 푸르게 다가와

내 가슴에 울리는 종

종 울린다.

 

 

 

참 된 친구

 

나의 노트에 너의 이름을 쓴다.

'참된 친구'

이것이 너의 이름이다.

이건 내가지은 이름이지만

내가지은 이름만은 아니다.

 

너를 볼 때

이 이름의 주인공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손수건 하나를 사도

'나의 것'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것'이라 말하며 산다.

 

세상에 좋은 일만 있으라.

너의 활짝 핀 웃음을 보게

세상엔 아름다운 일만 있으라.

 

'참된 친구'

이것이 너의 이름이다.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울고 싶은 일이 일어나도

 

마음처럼 말은 못하는

바보마음을 알아주는

참된 친구가 있으니

내 옆은 이제 허전하지 않으리.

 

너의 깨끗한 손을 다오

너의 손에도 참된 친구라고

쓰고 싶다.

 

그리고 나도

참된 친구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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