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천석 주필의 특별한 외출] 배우 차인표
- 바른생활 사나이? 무늬만 그랬죠…
자원봉사 가면서 1등석 돌아올 때 엄청 부끄러워
- 배우 차인표씨를 만나면 얼마 안가 왜 그에게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느끼게 된다.
- 그만큼 진지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꼭 행동으로 옮길 듯이 보인다.
- 차씨는 부인 신애라씨와 함께 세계 빈곤 아동들을 지원하는 단체 ‘컴패션’을 통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 신애라씨와 사이에 열한 살짜리 아들을 두었으면서도 두 여자 아이 예은·예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다.
- 지난 5월 11일 본사 주필 서재에 들어선 차인표씨는 그동안의 인터뷰에서 내색하지 않았던 여러 비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차인표
배우 차인표(42)는 충암고, 미국 뉴저지주립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 1993년 MBC 공채탤런트 22기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을 통해 데뷔했다.
- 이듬해 MBC 미니시리즈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스타덤에 올라 이 작품에 함께 출연한 탤런트 신애라(40)씨와 1995년 결혼했다.
- 차씨는 영화 ‘크로싱’ ‘한반도’ ‘목포는 항구다’ 등과 드라마 ‘하얀 거탑’ ‘영웅시대’ ‘왕초’ 등에 출연했다.
- 아동학대방지센터의 홍보대사로 활동했고 북한 어린이 돕기, 고아 시설 지원 등 어린이 후원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지난 3월 낸 장편소설 ‘잘 가요, 언덕’은 두 달 만에 5만부 정도 판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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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강천석 ‘잘 가요, 언덕’으로 소설가라는 직함도 생겼는데 ‘잘 가요, 언덕’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차인표 “‘위안부’로 강제 징용됐던 훈 할머니가 1997년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오신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론 화가 났습니다. 그때의 이런저런 감정을 메모해뒀던 게 시작이었어요. 2006년부터 마음먹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출판을 결심한 것은 2008년경이었지요. 소설은 1930년대 백두산 자락 호랑이 마을이 배경입니다. 엄마를 해친 호랑이에게 복수하려는 소년 사냥꾼 용이, 마을 촌장 손녀딸 순이, 일본군 장교 가즈오 사이의 화해와 용서를 담았습니다.”
첫째 아들 정민이가 아버지의 글쓰기를 북돋워준 열렬한 독자였다면서요. 둘째 예은이와 셋째 예진이를 입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내가 2~3년간 매주 목요일 대한사회복지회에 자원봉사를 나가 아기들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유 먹이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오더니 한 아이가 유독 눈에 밟힌다고 하더군요. 다른 아이들은 웃으면서 잘 노는데, 그 아이가 자꾸 울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우리 부부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결국 입양을 결심했죠.”
우리의 풍속이나 관습으론 입양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예은이를 입양할 때는 ‘아이가 불쌍해서 우리 가정으로 데려온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 아이가 불쌍해서 데려온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예진이를 입양할 때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아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입양을 하는 것이라고요. 우리 부부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도 있지만 아이로부터 받는 사랑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입양한 아이도 낳은 아이를 키울 때와 똑같이 부모인 우리와 사랑을 주고 받아요. 결국 아이를 사랑하고 싶어서, 생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서 입양을 하는 거죠.”
전에는 자식이 없는 집에서 입양을 할 때면 데려온 아이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서 숨기고 살았지요. 그런데 차인표씨는 ‘입양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나요?
“지금도 비공개 입양을 하시는 분들이 많고 또 그분들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이를 못 낳아서 입양을 한다면 비공개 입양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다만 입양이 더 공개적으로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게 장기적으로는 아이와 부모를 위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매년 어린아이를 수천 명씩 세계에 입양시켜야 했던 부끄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양에 대한 편견과 심리적 장벽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 속에서 차인표씨 부부가 입양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신앙의 힘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바탕에는 신앙이 있습니다. 예은이를 입양할 때도 ‘내가 키우다가 아이가 아프면?’ ‘친부모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등 다른 사람이 낳은 자식을 입양할 때 벌어질 수 있는 곤란한 일이 수십 가지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키우는 게 아니라 결국 하나님이 키우신다’는 생각이 입양을 결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첫째 정민이를 키우는 마음 그대로 예은이를 키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차인표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이어받은 ‘모태신앙’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대학 시절 교회 성가대에서 만나 결혼하셨어요. 그런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은 제 인생의 가치관을 바꿀 만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맞게 된 건가요.“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지만 그게 어려웠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예수 역할의 뮤지컬에 무료로 4년간이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마음속에 받아들인 것은 언제였나요?
“1988년 뉴저지대학 2학년 때입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사립 정신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크리스마스 이브 날 중환자실에서 에드워드라는 환자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일대일로 감시하는 일을 맡았죠. 라디오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는데 ‘아, 전세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퍼지더군요. 그 순간 예수님은 당신의 생일인 지금 어디에 계실까 궁금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워싱턴스퀘어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예수님은 틀림 없이 불행한 에드워드 곁에서 그를 지켜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인표씨가 20년 후에는 목사님으로 우리 곁을 찾아오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내일 일도 모르기에 20년 후 제가 어떤 모습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성직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신앙이 차인표씨의 내면을 완전히 바꾸게 된 사건 같은 게 있습니까. “2006년 4월 컴패션 홍보대사였던 아내 대신 인도 콜카타 지방으로 홍보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입니다. 당시 저는 저대로 이만하면 봉사활동을 할 만큼 하면서 산다는 자만심에 차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꼭 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안 간다고 버티다가 억지로 가게 됐죠.”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자원봉사자는 원래 비행기표 값 등 부대비용을 본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당시 제 마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상태였느냐 하면, 자금에 쪼들리는 NGO단체인 ‘컴패션’에 비행기표를 보내달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랬더니 이코노미 클래스석 티켓이 오더군요. 얼마나 가기 싫었는지 ‘이거 CF 찍는 거랑 같은 건데, 해외촬영 가는 배우에게 최소한 비즈니스석은 줘야지’라는 마음이 들었고 비즈니스석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꼭 가야 했으니 컴패션에서는 비즈니스석 티켓으로 다시 보내줬습니다. 저는 그걸 제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를 시켰죠. 불과 3년 전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했던 제 내면이 사실 이랬어요. 10명이 함께 갔는데 저 혼자 일등석, 나머지는 이코노미석으로 갔습니다.”
- 그곳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동행했던 ‘컴패션’ 대표이신 서정인 목사께서 ‘차인표씨가 만날 아이들 중에서 컴패션에 속한 아이들은 그나마 밝은 편이지만 그 밖의 아이들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쓰레기더미에서 태어난 듯이 그렇게 살다 죽어가는 그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라고 부탁하더군요. 그 정도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자동차로 꾸불꾸불한 길을 가고 또 갔더니 메마르고 씁쓸한 황무지 같은 곳에서 인도 아이들 수십 명이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마르고 까맣고 더러운 모습으로 말이죠. 그런데 한 남자 아이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아이 손을 잡는 순간, 40년 동안 찾아 헤매다녔던 하나님께서 제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하려던 말이 ‘많이 힘들었지? 사랑한다’였는데, 그 말을 하나님께서 제게 해주시더군요. 심장에 말 풍선이 터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 가슴이 꽉 채워졌습니다.”
그때가 신앙의 터닝포인트였군요.
“가득 차 있던 서랍을 탁 빼서 모조리 털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날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후 제 자신이 계속 변화하는 것을 느껴요. 저뿐만 아니라 제 아내도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일등석에 앉아왔나요.
“연세가 가장 많은 여자분께 퍼스트 클래스석을 드리고 저는 이코노미석을 타고 왔습니다. 제 마음속 그 동안 꽁꽁 닫혔던 감정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어요. 그저 나와 관계 없는 생명까지도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지금 차인표씨 부부가 컴패션을 통해 후원하는 아이는 몇 명인가요.
“컴패션에서는 영혼의 친자식이란 뜻으로 아이들을 ‘영친’이라 부릅니다. 영친이 34명입니다. 비록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멀리서나마 정성껏 돌봐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 뒤 에티오피아에도 다녀왔는데요.
“그것도 2007년 4월 컴패션을 통해서였습니다. 온토토산이라는 남산 정도 되는 산에서 아이들이 소나 당나귀처럼 자기 몸보다 큰 짐을 지고 내려오더군요. 학교도 못 가고 땔감을 모아 팔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죠. 거기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었고, 1년간 후원자를 모집하는 집회 때마다 그 장면을 틀어주었습니다.”
1년 후 방송국 제작팀과 다시 에티오피아를 찾았다가 그 엘리자베스와 영화같이 재회했다면서요.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산은 이미 나무를 다 베어내 벌겋게 변해 있었고, 아이들은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자베스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제가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어요. 거리에 여러 아이들이 걸어오는데 그중 하나가 1년 전 산에서 만난 소녀 같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차를 세워서 봤더니 그 아이가 바로 엘리자베스였어요.”
제작진도 모두 놀랐겠군요.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한 인연이네요.
“아이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손을 꼭 붙잡고 빈민촌에 있는 엘리자베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이 엄마에게 엘리자베스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딸에게 후원자가 나타나는 것이 제 평생 소원이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컴패션에서 한 아이에 대한 월 후원금이 3만5000원이라면서요. “7명이 함께 사는 엘리자베스 가족의 한 달 수입이 1만원이에요. 엘리자베스에게 후원되는 3만5000원은 가족 모두의 삶을 바꿔놓을 핵폭탄 같은 위력을 지닙니다.”
차인표씨의 가족과 어린 시절도 궁금합니다. “빈농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일찍 고아가 된 어머니가 만나 결혼했고, 맞벌이를 하면서 저희 아들 셋을 낳고 기르셨죠. 그런데 1980년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성격 차이로 이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과 떨어져 사셨지만 늘 세 아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셨어요. 어머니는 여자 혼자서 아들 셋과 살아 남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30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아이 있는 유부녀가 이혼해 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배운 게 많습니다.”
- 어떤 계기로 미국에 가게 됐나요?
“어머니는 목사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안 해주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어머니는 ‘여자도 목사 안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을 종이에 써서 신학교에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에는 1987년 온 가족이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어머니는 그곳의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공부하시고 나중엔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저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었고 남는 건 집 생활비로 가져다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자립심을 배웠죠. 이후 어머니께서는 한국으로 돌아와 신학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게 되셨고, 저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방송에서 차인표씨의 고등학교 성적표와 생활기록부가 공개됐습니다. 생활기록부에서는 모두가 모범적 이야기이고, 성적표는 전 과목 ‘올 수’였다면서요. 그런데도 형(차인혁씨) 보다는 못했다고요.
“제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취재를 해서 방송을 한모양입니다. 그런데 공개한 그 성적표는 제 것이 아니라 형의 성적표였습니다. 저는 반에서 20등 정도를 했어요. 3남 중 둘째인데, 한 살 위인 형은 공부를 무척 잘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작은 IT 회사의 간부로 근무 중입니다. 세 살 아래의 동생은 영국 금융회사의 한국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2008년 개봉해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까지 오른 ‘크로싱’은 처음에는 출연을 거절했다가 나중에 출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라면서요.
“출연요청을 거절한 후 마음이 불편했고, 탈북자와 관련된 기사를 많이 찾아봤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굶어 죽은 북한 소년의 사진을 보게 됐죠. 빼빼 마른 소년은 가슴에 가방을 안고 죽어있었어요. ‘아이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기다렸다면 그게 과연 누구였을까’라고 생각해보니, 그건 바로 저였습니다. 소년은 남쪽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기다렸겠죠. ‘아이가 죽을 때까지 40년간 나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생각했고 북한 동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화 ‘크로싱’ 촬영은 주로 어디에서 했습니까. “강원도 영월, 몽골의 고비사막, 중국 선양 등에서 촬영했습니다.”
고비사막에서 촬영한 장면은 어떤 것이었나요.
“‘크로싱’ 조감독이 탈북자 출신인데, 고비사막에서 그 분의 실제 탈북 루트를 찍었습니다. 탈북자에게는 중국을 통해 몽골 국경을 넘고 고비사막을 걷다가 몽골 수비대에게 발견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케이스라고 합니다. 발견되면 한국 대사관으로 넘겨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곳에서 발견될 확률이 매우 적다고 합니다.”
영화 ‘크로싱’에 대한 관객 반응은 어땠습니까. “관객이 100만명 정도였으니 상업적으로는 실패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탈북자의 고통을 알게 된 것은 정말 만족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미국의 각종 단체와 대학에서 순회상영 중입니다.”
상업적 흥행은 실패에 가까웠지만 영화의 생명력은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이네요.
“저는 조선일보에서 만든 ‘천국의 국경을 넘다’를 보면서도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크로싱’이나 ‘천국의 국경을 넘다’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조금 안타까워요.”
‘크로싱’ 이전에는 차인표씨 연기력에 대한 논란도 있었습니다.
“저는 1993년 MBC 공채 22기입니다. 10개월 정도 단역 생활을 하고 1994년 ‘사랑을 그대 품안에’ 오디션을 봐서 주연을 맡았어요.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너무 빨리 주연을 맡다 보니 오랫동안 그 대가를 치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촬영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요.
“최근에 한·일 합작 드라마의 촬영을 마쳤습니다. 가을쯤 한국 SBS TV와 일본 아사히 TV에서 동시에 방영될 예정이에요.”
영화계에서도 차인표씨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습니까.
“어린이를 위한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한국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국산 콘텐츠가 너무 부족해요. 제 아들 정민이의 경우에도 미국이나 일본 작품을 많이 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보면서 선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주간조선]
/ 정리 = 서일호 기자 ihseo@chosun.com
최다정 인턴기자 starzigi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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