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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발견

by 石右 尹明相 2010. 2. 11.

 

 

 

◈ 자아의 발견

종교 개혁자 칼빈이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삶을 살 수 없는 중요한 두 가지 지식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지식도 가질 수 없다"

유명한 실존 철학자 야스퍼스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관찰이라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창조를 말하면서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 속에 생기가 들어 가기 전에
먼저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우리 인생이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 있는

한줌의 진흙과 같다고 했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들은 육체를 가지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랑은 허탄한 것이라 했습니다.
육체는 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육체는 잠간 푸르름이 있어도
뜨거운 바람이 불면 말라지는 풀과 같습니다.
그 영광이 아무리 화려하여도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시편 90편 말씀에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티끌로 돌아가라 하셨기 때문에...
흙에서 나온 인생을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중에
가장 즐겨 사용하신 용어가 무엇입니까?
인자- 사람의 아들입니다.
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인자라는 호칭을 통하여 당신께서

참 사람이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참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고귀한 사람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참 사람 됨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참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일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미 이 세상 만물이 다 지어져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없는 재료가 없었습니다.
단단하기로 말한다면 돌멩이나 강철이 더 단단하고,
불변하기를 원한다면 금이 더 불변하며,
희귀성을 따지고, 값으로 따진다면
다이아몬드가 더 희귀하고 비쌉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어떤 재료도 사용치 아니하시고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흙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특성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사람됨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귀중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셨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것 속 에는

흙이라는 것 속에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메시지 속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흙을 딛고 살면서 흙을 보고 살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우리 인간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피조성을 알라는 것 입니다.

사람은 돌아간다, 사람은 죽는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흙에서 나온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영원한 것을 찾고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 한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 내가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생각한 사람만이 바르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을 찾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리한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보면 에노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비로소 에노스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사전에 에노스라는 말을 찾아보면 거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을 가진 보통 명사이기도 합니다.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왜 에노스가 하나님을 찾고 불렀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망각하고 죽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욕망과 정욕에 매여서 또 허무와 두려움 속을 왔다갔다하면서
그 사람의 인생은 더럽고 비참하게 살고 마는 것입니다.

한문으로 사(死)자는 하나 일(一)자 밑에다가
저녁 석(夕)자가 옆으로 왼쪽에 써졌고
그 다음 오른쪽에 비수 칼(刀)자가 쓰여진 것을
죽을 사(死)자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음이란 무엇이냐?
저녁에, 밤에 비수가 날아온 것처럼 그렇게 죽음이 우리 에게
갑자기 닥쳐온다 는 뜻에서 사(死)자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낮에 비수가 날아온다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밤에 어두울 때 비수가 어디선가 날아오면
그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방어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이
사람은 갑자기 죽고 만다는 그런 뜻인 것입니다.

최고의 통치자 케네디에게도 이 비수가 날아왔습니다.
내 자녀가 정말 헛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공해야 될 것 인가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반드시 돌아간다'는 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진리 이 실존을 어린이들 마음속에
우리 자식들 마음속에 깊이 넣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자식을 19명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자랑스러운 것은 그 19명이 전부다 하나도 방탕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으로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비결은
그 자식들에게 늘 성경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많이 해주면서 천국과 지옥의
그 생사관과 인생관을 그 자녀들에게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이 죽음을 아는 자들은 이 천국과 영원을 바라다보는 자들은
인생을 방황하지 않습니다. 방탕하지 않습니다.
헛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흙은 생명과 죽음의 모든 근본 재료가 됩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옵니다.
흙 속에는 온갖 영양과 수없이 많은 미생물이 있습니다.
모든 식물이 흙에서 공급되는 수분과 양분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이 흙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물고기도 흙에서 자라는 미생물을 먹고 삽니다.
이처럼 흙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보고인 흙을 사용하셔서 사람 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명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생명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생명의 법칙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흙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하여 자신 안에 감추인 온갖 좋은 것을
인색하지 않고 다 내어 줍니다.
모든 생물들은 흙을 통하여 공급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생명을 다 살고는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체에 생명을 나누어 주고자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참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생명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생명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뜻합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생명의 법칙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흙의 특징은 인간을 위한 모든 섬김의 도구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참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봉사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체의 구조를 살펴보십시오.
모든 우리 인체의 구조는 봉사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자기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 분은 이 땅에 섬김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요한 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최후의 만찬 석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아무도 발을 씻지 못하고
지저분한 채로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발을 씻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그 일이 종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발을 씻을 물도, 대야도 수건도 있었습니다.
없는 것은 종이었습니다.
그 종의 자리를 누가 자원했습니까?
12 제자 가운데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는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구석구석 씻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줍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한 수건이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닦아주시지 아니하셨다면,
그 분이 우리의 온갖 추한 허물을 고쳐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역시 이 사회의 수건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D.L. 무디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했느냐이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 입니까?
섬김의 종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수건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까?
수건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입 니다.
봉사를 택하고 사랑을 택하는 것만이
참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말씀 인 것입니다.

참사람은 이렇게 남을 섬기고 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동시에 영성을 가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 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요4:2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이신 말씀을 들어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고,
기도를 통해서 영적인 하나님과 교통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떡이 필요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 하다는 사실을 주님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 처럼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요하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행복 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기서 부자의 착각은 영혼도 육체의 양식과 물질의 부요함만으로
행복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답습하고 있는 착각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이
"나는 배부른 돼지 보다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한 말도 결국은 인간은 육체의 만족 만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행복 할 수도 없다는 유명한 선언 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존재인 것을 자각하셨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묵상과 기도로 영이신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경건의 연습도 중요한 것 입니다.

세번째,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 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원이 다른 것은 생명과 생기의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사람이나 동일 합니다.

창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러나 사람에게는 생기가 있다는 것 입니다.(창2:7)

생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네쇠마>인데
이것은 인간에게만 사용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독특한 선물 입니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것 입니다.
사람은 이 생기가 있기에 만물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기서 다스린다는 말은 본래 "책임"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누구든지 지도자가 되면 그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책임감이 없이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맡겨 놓으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입니다.
나는 혼자서 잘 믿겠다. 다른 사람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를 부인하는 교만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가려면 불편해도

공동체의 삶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 돌보아주고, 서로 용납해 주고,
서로 참아주고, 서로 기도해 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은 단순한 것 입니다.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시133:1)

이런 말을 주께로부터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 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적인 존재로

그리고 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창조의 원리를 기억하며
하나님이 처음 지어 주셨을 때 하나님이 설계하고 기대 하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