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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김용택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1. 3. 31.

 

시인, 초등교사()

1948, 전북 임실

1986년 김수영문학상

1997년 소월시문학상

시집 '섬진강' ‘맑은 날’ ‘그리운 꽃편지등 다수

 

 

김용택 시 모음

 

 

봄잠

 

요즈음

외로움이 잘 안 됩니다

맑은 날도 뽀얀 안개가 서리고

외로움이 안 되는 반동으로

반동분자가 됩니다

 

외로움의 집 문을 닫아두고

나는 꽃 같은 봄잠을 한 이틀쯤

 

쓰러진 대로 곤히 자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행복2

 

바람 없이 눈이 내린다

이만큼 낮은 데로 가면 이만큼 행복하리

살며시 눈감고

그대 빈 마음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는 눈

곧 녹을

 

 

 

행복3

 

바람 타고 눈이 내린다

이 세상 따순 데를 아슬아슬히

피해 어딘가로 가다가

내 깊은 데 감추어 둔

손 내밀면

얼른 달려와서

물이 되어 고이는

이 아깐 사랑

 

 

 

그리운 우리

 

저문 데로 둘이 저물어 갔다가

저문 데서 저물어 둘이 돌아와

저문 강물에

발목을 담그면

아픔없이 함께 지워지며

꽃잎 두송이로 떠가는

그리운 우리 둘

 

 

 

사랑노래 2

 

돌아눕고 돌아눕고 돌아누워

왼 밤을 딩굴어 만든 사람아

아침 햇살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사람아

 

 

 

사랑노래 3

 

사랑의 눈과 눈이 만나 붐비네요

붐비는 것은

바람 없이 노는

금싸라기 같은 햇빛이구요

 

아물아물 눈이 시네요

오오, 봄이군요

우린 둘 다

진달래 빛 환한

앞산 뒷산이구요

 

 

 

사랑 노래 5

 

마음의 끝을 보고 걸어서

마음의 끝에 가면

한쪽 어깨가 기울어

저뭄에 머리 기대고 핀

외로운 뜰꽃 하나 보게 되리

팍팍하게 걸어온 저문 얼굴로

헐은 어깨 기울이면

야윈 어깨 기대오던 저문 그대

마음의 끝에 서서

저뭄의 끝에 기대섰던 우리

마음의 끝을 적시며

그대는 해지는 강물로

꽃잎같이 지고

한쪽이 쓸쓸한 슬픔으로

나는 한세상을

어둑어둑 걷게 되리

 

 

 

6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무 옆에 바람이 불고

하루해가 갑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

주저앉힐 수가 없습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오래오래 어딘가를 보고

있곤 합니다

느닷없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당신 생각이었음을 압니다.

하루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해가 갑니다.

 

 

 

가난한 꽃

 

가난이 뭔지 알겠습니다

가난 안에서만 꽃은 만발하고

가난 안에서만 꽃은 향기롭습니다

가난이 뭔지 알겠습니다

가난이 뭔지 아는 것은

사랑이 뭔지 아는 것이고

사랑은 다 버리고

세상을 다 얻는 것이겠지요

이제

그대 가난한 가슴 위에 피어나는 들꽃들이

그대 가난한 가슴 속의 눈물인 줄도 알겠어요

 

 

 

가을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이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대에게 들킵니다

그대에게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 이슬이 반짝 떨어집니다

산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일이나 그러한 것들이

때로는 낯설다며 돌아다보면 이슬처럼 반짝 떨어지는

내 슬픈 물음이 그대 환한 손등에 젖습니다 사랑합니다

숲은 끝이 없고 인생도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 숲 그 숲에 당신이 문득 나를 깨우는 이슬로 왔습니다

 

 

 

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 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 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 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그리운 꽃편지 1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피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피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10

 

부드럽고 달콤했던 입맞춤의 감촉은 잊었지만

그 설렘이 때로 저의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10월이었지요.

행복했습니다.

 

 

 

11월의 노래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롬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와 닿습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미처 하지 못한 말

 

살다가,

이 세상을 살아가시다가

아무도 인기척 없는

황량한 벌판이거든

바람 가득한 밤이거든

빈 가슴이, 당신의 빈 가슴이 시리시거든

당신의 지친 마음에

찬바람이 일거든

살다가, 살아가시다가

 

 

 

섬진강

 

섬진강 발원지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경사면인 전북 진안 장수를 경계한

팔공산 상추막이골의 데미샘에서

발원한다.

 

섬진강은 유로연장 21.3km

유역면적 4,896평방 km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3개도

11개 시군을 거쳐 흐른다.

 

그 중에 유역면적 분포는 전라남도가 47%

전라북도 44% 경상남도 9%를 차지한

550리 물 즐기를 형성하고 있다.

 

진안군 백운면출발로 마령면을 거쳐 성수면을 지나

전북 임실군 순창군을 거쳐 전남 곡성읍에서

요천과 만나고 곡성군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하여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경계를 따라 남해안의

광양만으로 흘러간다.

 

선진강 특징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순으로

5대 강에 속하고 자연상태가 제일 잘 보전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 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 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

 

 

 

섬진강 3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섬진강 15

- 겨울, 사랑의 편지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 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섬진강 22

- 누님의 손끝

 

누님

누님 같은 가을입니다

아침마다 안개가 떠나며 강물이 드러나고 어느 먼 곳에서 돌아온 듯

풀꼿들이 내 앞에 내 뒤에 깜짝 깜짝 반가움으로 핍니다

누님 같은 가을 강가에 서서 강 깊이 하늘거려 비치는

풀꽃들을 잔잔히 들여다보며 누님을 떠올립니다

 

물동이를 옆에 끼고 강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강물에 이르르면

누님은 동이 가득 남실남실 물을 길어 바가지를 물동이에 엎어 띄워놓고

언제나 그 징검다리 하나를 차지하고 머리를,

그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흘러가는 강물에 풀었었지요

누님이 동이 가득 강물을 긷고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물장난을 치며 징검다리를 두어 간씩 힘껏힘껏 뛰어다니거나

피라미들을 손으로 떠서 손사레로 살려주고 다시 떠서 살려주며 놀다가

문득 누님을 쳐다보면 노을은 강을 따라 앞산을 오르고

누님은 머리를 다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채를 흔들어 강바람에 말렸지요

저 앞의 우뚝 큰 산의 솟구치는 산굽이 돌아오는 맑고 고운 강물 속에

누님의 모습은 불길처럼 타는 노을과 함께 활활거렷습니다

그런 누님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내 가슴은 쿵쿵 뛰었었습니다

강바람에 하늘거리던 누님의 검정치마와 꽃 자주고름 그 고운 머릿결이

차곡차곡 내 가슴 어딘가에 서늘히 쌓이곤 했습니다

누님, 누님은 붉은 댕기를 입에 물고 머리를 따 내리면서

나를 보며 가을 햇빛같이 쓸쓸히 때론 환하게 웃어주기도 했습니다

누님은 머리를 다 따 내려 묶고

또아리를 곱게 빗은 머리 위에 가만히 얹고 앉아

또아리 끝을 입에 물고 눈 내리깔아 물동이를 이었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뛸 때마다 남실거리던 물이 넘쳐 흘러내리면

누님은 이마에서 눈썹에서 물을 훔쳐 뿌리곤 했습니다

누님의 그 눈 내리깐 고운 청춘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뿌리는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누님의 손끝에선 저기 저런 풀꽃들이 강에 피고 다른 풀꽃이 지고

때론 작은골 큰골 붉은 단풍이 물들고 앞산 위에 반짝이는 샛별이 되고

초가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피어났습니다

강길이 다 끝날 때까지

누님은 그렇게 우리 마을 곳곳을 곱게도 물들이며 걸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누님은 일찍 물을 길어놓고

노을보다 먼저 징검다리를 건너 강변에 가 앉았습니다

누님은 풀꽃들이 만발한 강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무심히 풀잎들을 뜯어 잘근잘근 깨물었습니다

강바람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풀잎들 풀꽃들 하늘거리는

그 깊디깊은 눈으로 저 강굽이 끝을 보며

"그이는 꼭 살아 있을 거여 그이는 꼭 올 거여" 하셨지요

누님, 누님이 그때 그 말을 중얼거리며 풀을 뜯어 흩뿌리며

벌떡 일어나 화난 사람처럼 강을 건넜었는지 나는 몰랐었습니다

다만, 그해 가을이 이 가을처럼 가고 겨울이 겨울처럼 온 어느 눈 내리던 밤

나는 잠결에 아버님의 진노하신 목소리에 잠이 깨었고

"그놈은 오지 안는다, 인자 그놈은 잊어부러, 그 놈은 그 놈은..." 하시던

고함소리와 누님의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를 따라 내리는

눈 쌓이는 소리를 나는 숨죽여 들었습니다

누님, 누님은 그날 밤 내 뒤척이고 눈은

들먹이는 산의 어깨를 따라 쌓이고 강에 내렸습니다

누님, 누님이 보여주었던 그 바람 타는 강변 풀잎들이

지금도 저렇게 어쩌자는 것인지 바람 속에 흔들거립니다

풀꽃들이 넘어졌다가 일어나며

"그이, 그이는 꼭 올거여 꼭 올 거여" 하는 것 같습니다 누님

누님은 이렇게 가는 어느 늦가을 살얼음을 깨고 시린 물소리를 따라갔습니다

누님이 한번 들려주셨던 그 그이 그이를 지금 나도 생각합니다

 

내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해 지면 풀꽃들이 한없이 몰려와 저문 강에 몸을 씻고

더욱 황홀하게 드러났다 서늘히 식던 그 자태들을

한 꽃이 지며 다른 한 꽃에 꽃을 넘겨주고 가던

그 다정한 계절의 손짓들을 아무도 오지 않는 내 청춘의 저문 물가에

우두커니 서서 저물어오는 강물에

내 얼마나 오래오래 내 외로움을 적셔 늦꽃을 피웠었는지요

 

누님, 나는 누님의 강물과 내 어린 강물이 보고 싶을 때면

물소리를 따라 강물로 가곤 합니다

물소리를 따라 가장 낮게 가라앉아 흐를 때까지 따라가면

이 세상이 이 세상으로 소중하게 다가와 내 몸에 감겨옵니다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 깊다는 그런 말들을 믿을 때쯤

나는 물소리를 따라가며 물소리 끝에 뼈가 시렸으나

그런 말들을 계절처럼 수정해가면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세상의 참모습이 바로 보이고

 

해야 할 일만 보임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누님이 머리 감고 일어서면

언제나 싱싱하게 물기에 젖어 있던 징검다리를 찾아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이 세상의 물소리 속에서

피비린 전쟁과 두 동강난 조국의 아픔을

그리고 용기와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 이별과 만남, 내 삶의 깊이와 폭을

누님, 누님이 바라보며 그이를 기다렸던 저 슬픔과 괴로움과

그리움과 사랑의 여울지는 강물을 나도 바라봅니다

아늑하고 평안한 바라봄의 저 강물을

 

누님, 누님이 나를 데리고 강 건너로 가

바람에 쓰러지고 일어나는 바람 타는 풀잎들을 보여주었던

그 아름다운 날의 중얼거림

그이 그이는 꼭 온다는 그 믿음이 세월을 따라 곧 내 믿음이 됩니다

고개 들어 우뚝 일어서는 저 어두워져오는 산속을 보면

어둠속에 하얀하던 누님의 손

그 손끝이 어둠을 뿌리며 부르며 하늘거립니다

그 손끝 따라 오늘도 강에 꽃들이 피어납니다

 

누님, 그이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저기 저 물같이 들를 곳 다 들러 우리 땅을 골고루 적셔 채워주며

이 가을과 저 멀고 긴 어둠의 겨울을 뚫고

봄을 여는 물굽이로 저 산굽이를 돌아 눈부시게 올 것입니다

그 힘찬 희망의 날에 우리 그리운 누님의 고운 강변에 풀꽃들이 만발하고

역사의 꽃수레를 끌고 가는 씩씩한 사내들을 맨발로 따라가는

내 누이들의 숨김없는 싱그러운 웃음소리들이

산에 산산이 울려 강에 강강에 울려 누님의 손길을 따라

저 깊고 어두운 산과 강이 훤하게,

훤하게 꽃같이 훤하게 열릴 것입니다

그러면 누님 이 서러운 강물을 쓸어안으며 저 하늘 보며

곱게 곱게 쓰러지십시오 누님

 

 

 

그때

 

허전하고 우울할 때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

어딘가 달려가 닿고 싶을 때

파란 하늘을 볼 때

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둥 떠가면 더욱더

저녁노을이 아름다울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둥근 달을 바라볼 때

무심히 앞산을 바라볼 때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빗방울이 떨어질 때

외로울 때

친구가 필요할 때

떠나온 고향이 그리울 때

이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내 그리움의

그 끝에

당신이 서 있었습니다.

 

 

 

그랬다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그리운 꽃 편지

 

봄이어요.

바라보는 곳마다

꽃은 피어나며 갈 데 없이 나를 가둡니다.

숨막혀요.

내 몸 깊은 데까지 꽃빛이 파고들어

내 몸은 지금 떨려요.

나 혼자 견디기 힘들어요.

이러다가는 나도 몰래

나 혼자 쓸쓸히 꽃 피겠어요.

싫어요.

이런 날 나 혼자 꽃 피긴

죽어도 싫어요.

꽃 지기 전에 올 수 없다면

고개 들어 잠시 먼 산 보셔요.

꽃 피어나지요.

꽃 보며 스치는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제 생각에 머무셔요.

머무는 그곳,

그 순간에 내가 꽃 피겠어요.

꽃들이 나를 가둬,

갈 수 없어 꽃그늘 아래 앉아

그리운 편지 씁니다.

소식 주셔요

 

 

 

그이가 당신이예요

 

나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입니다

나의 가장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모습을 통째로 알고 계시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일 터이지요

그분이 당신입니다

나의 아흔아홉 잘못을 전부 알고도 한점 나의 가능성을

그 잘못 위에 놓으시는 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일 테지요

그이가 당신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의 사랑이고 싶어요

당신의 한점 가능성이 모든 걸 능가하리라는 것을

나는 세상 끝까지 믿을래요

나는,

나는 당신의 하늘에 첫눈 같은 사랑입니다.

 

 

 

나는 당신의 꽃

 

내 안에

이렇게 분이 부시게

고운 꽃이 있었다는 것을

나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 이예요

당신에게 나는

이 세상 처음으로

한 송이 꽃입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서리 내린 가을날

물 넘친 징검다리를 건너던

내 빨간 맨발을

잊지 말아요.

 

지금은 괴로워도 날 잊지 말아요.

달 뜬 밤, 산들바람 부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

강물을 보던 그 밤을

잊지 말이요.

 

내 귀를 잡던 따스한 손길,

그대 온기 식지 않았답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내가 불입니다

 

언젠가 부터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사랑의 불을

나는 물로 끌수 있을지 알았습니다

 

불길이 목울대를 넘나들 땐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불길은 갈증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어느덧

물로 끌 수 없는

큰 불길에 싸여 있는 내 가여운 영혼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천지를 헤매고도 남을

이 영혼을 당신은 아시기나 한지요

 

,

그냥 두지요

재가 되도록 타게 그냥 두지요

 

불은 타올라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에

몇 방울의 물은 물이 아닙니다

그도 따라 뜨거운 불입니다

 

,

당신을 향해 타오르는

이 불길로 내가 다 타겠습니다

내가 불이 되겠습니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저 물을 따라가며

소리 없이 저물어 가는 강물을 바라보아라

풀꽃 한 송이가 쓸쓸히 웃으며

배고픈 마음을 기대오리라

그러면 다정히 내려다보며, 오 너는 눈이 젖어 있구나

 

배가 고파

바람 때문이야

바람이 없는데?

아냐, 우린 바람을 생각했어

 

해는 지는데 건너지 못할 강물은 넓어져

오빠는 또 거기서 머리 흔들며 잦아지는구나

아마 선명한 무명 꽃으로

피를 토하며, 토한 피 물에 어린다

 

누이야 저 물의 끝은 언제나 물가였다

배고픈 허기로 저문 물을 바라보면 안다

밥으로 배 채워지지 않은 우리들의 멀고 먼 허기를

 

누이야

가문 가슴 같은 강물에 풀꽃 몇 송이를 띄우고

나는 어둑어둑 돌아간다

밤이 저렇게 넉넉하게 오는데

부릴 수 없는 잠을 지고

누이야, 잠 없는 밤이 그렇게 날마다 왔다

 

 

 

늘 보고 싶어요

 

오늘

가을 산과 들녘에 물을 보고 왔습니다

산골 깊은 곳

작은 마을 지나고

작은 개울들 건널 때

당신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산의 품에 들고 싶었어요, 깊숙히

물의 끝을 따라 가고 싶었어요

물소리랑 당신이랑 한없이

 

늘 보고 싶어요

늘 이야기하고 싶어요

당신에겐 모든 것이 말이 되어요

십일월 초하루 단풍 물든 산자락 끝이나

물굽이마다에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이 보고싶어서 가슴이 저렸어요

 

오늘

가을 산과 들녘과 물을 보고

하루 왼종일

당신을 보았습니다

 

 

 

단 한 번의 사랑

 

이 세상에

나만 아는 숲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

눈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차곡차곡 솔잎 쌓인

고요한 그 숲길에서

오래 이룬

단 하나

단 한번의 사랑

당신은 내게

그런

사랑입니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당신 없는 하루

 

해 뜨니

앞 강물은 저리 흐르요

당신 떠난 이 나라

쳐다볼 곳 없는 내 눈길이

먼 허공을 헤매이고 헛헛한 마음도

이리 기댈 곳 없으니

이 맘이 시방 맘이 아니요

차라리

이 몸 이 맘

이 강물이 다 가져가불고

저 강물에 얼른얼른

오늘 해도 져불면 좋것소.

 

 

 

들 국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무슨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 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신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별 하나

 

당신이 어두우시면

저도 어두워요

당신이 밝으시면

저도 밝아요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있는 내게

당신은 닿아 있으니까요

힘내시어요

나는 힘없지만

내 사랑은 힘 있으리라 믿어요

내 귀한 당신께

햇살 가득하시길

당신 발걸음 힘차고 날래시길 빌어드려요

그러면서

그러시면서

언제나 당신 따르는 별 하나 있는 줄 생각해 내시어

가끔가끔

하늘 쳐다보시어요

거기 나는 까만 하늘에

그냥 깜박거릴게요

 

 

 

별일

 

양말도 벗었나요.

고운 흙을 양손에 쥐었네요.

등은 따순가요.

햇살 좀 보세요.

거 참, 별일도 다 있죠.

세상에, 산수유 꽃가지가

길에까지 내려왔습니다.

노란 저 꽃 나 줄 건가요.

그래요.

줄게요.

다요, .

 

 

 

보고 싶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마음을 돌리려고

아무리 뒤돌아서고 뒤돌아서도

당신은 나보다 빨리 도시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계십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요

보고 싶은 이 마음을

어디에다 다 감추고

보고 싶다는 이 말을

어디다 다 하겠어요

보고 싶어요

당신.

 

 

 

봄 옷 입은 산 그림자

 

그저께 엊그저께 걷던 길

어제도 걷고 오늘도 걸었습니다

 

그저께 엊그저께 그 길에서

어제 듣던 물소리

오늘은 어데로 가고

새로 찾아든 물소리 하나 듣습니다

 

문득 새로워 걷던 발길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귀기울여봅니다

 

, 그 물소리 새 물소리

봄옷 입은 산그늘 강 건너는 소리입니다

 

 

 

봄이 그냥 지나요

 

올 봄에도

당신 마음 여기 와 있어요

여기 이렇게 내 다니는 길가에 꽃들 피어나니

내 마음도 지금쯤

당신 발길 닿고 눈길 가는 데 꽃 피어날 거예요

생각해 보면 마음이 서로 곁에 가 있으니

서로 외롭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린 서로

꽃 보면 쓸쓸하고

달 보면 외롭고

저 산 저 새 울면

밤새워 뒤척여져요

마음이 가게 되면 몸이 가게 되고

마음이 안 가더래도

몸이 가게 되면 마음도 따라가는데

마음만 서로에게 가서

꽃 피어나 그대인 듯 꽃 본다지만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어요

당신도 꽃산 하나 갖고 있고

나도 꽃산 하나 갖고 있지만

그 꽃산 철조망 두른 채

꽃 피었다가

꽃잎만 떨어져 짓밟히며

새 봄이 그냥 가고 있어요.

 

 

 

빗장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 달아도 내달아도

속 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 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세상의 비밀들을 알았어요

 

닫힌 내 마음의 돌문을 열며

꽃바람 해바람으로 오신 당신

당신으로 하여

별이 왜 반짝이는지

꽃이 왜 꽃으로 피어나는지

세상에 가득한 그런 가만가만한

비밀들을 알게 되었어요

 

, 내 가는 길목마다

훤하게 깔린 당신

돌부리 끝에 걸려 넘어져도

거기 언뜻 발끝이 아프게 부서지는 당신

이 초겨울 빗줄기 속에서도

들국 같은 당신의 얼굴이

하얗게, 하얗게 줄지어 달려옵니다

 

이 길에 천둥 번개 칠까 두려워요

 

 

 

슬픔

 

외딴 곳

집이 없었다

짧은 겨울날이

침침했다

어디 울 곳이

없었다

 

 

 

약이 없는 병

 

그리움이, 사랑이 찬란하다면

나는 지금 그 빛나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파서 못 견디는 그 병은

약이 없는 병이어서

병중에 제일 몹쓸 병이더이다

 

그 병으로 내 길에

해가 떴다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가 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없이 돌아 흐르며

내 병은 깊어졌습니다

 

아무리 그 병이 깊어져도

그대에게 이르지 못할 병이라면

이제 나는 차라리 그 병으로

내가 죽어져서

 

, 물처럼 바람처럼

그대 곁에 흐르고 싶어요

 

 

 

 

외딴집,

외딴집이라고

왼손으로 쓰고

바른손으로 고쳤다

 

뒤뚱거리며 가는가는 어깨를 가뒀다

 

불 하나 끄고

불 하나 달았다

 

가물가물 눈이 내렸다

 

 

 

참 좋은 당신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푸른 나무

 

나도 너 같은 봄을 갖고 싶다

어둔 땅으로 뿌리를 뻗어 내리며

어둔 하늘로는 하늘 깊이 별을 부른다 너는

나도 너의 새 이파리 같은 시를 쓰고 싶다

큰 몸과 수많은 가지와 이파리들이

세상의 어느 곳으로도 다 뻗어가

너를 이루며 완성되는 찬란하고 눈부신 봄

나도 너같이 푸르른 시인이 되어

가난한 우리나라 봄길을 나서고 싶다.

 

 

 

푸른 나무 1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푸른 나무 2

 

너를 부르러

캄캄한 저 산들을 넘어

다 버리고 내가 왔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리운 너의 이름을 부르러

어둔 들판 바람을 건너

이렇게 내가 왔다

이제는 목놓아 불러도

없는 사람아

하얀 찔레꽃 꽃잎만

봄바람에 날리며

그리운 네 모습으로 어른거리는

미칠 것같이 푸르러지는

이 푸른 나뭇잎 속에

밤새워 피를 토하며

내가 운다.

 

 

 

푸른 나무 3

 

나무야 푸른 나무야

나는 날마다

너의 그늘 아래를 두 번씩 지난다

해가 뜰 때 한 번

그 해가 질 때 한 번

 

걷다가 더울 때 나는 너의 뿌리에 앉아

너의 서늘한 피로 땀이 식고

눈보라칠 때 네 몸에

내 몸을 다 숨기고

네 더운 피로 내 몸을 덥히며

눈보라를 피했다

나무야

잎 하나 없는 잔가지 그림자만

맨땅에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내겐 푸르른 나무야

내가 서러울 때

나도 너처럼 찬바람 가득한

빈 들판으로 다리를 뻗고

달이 구름 속에 들 때 울었다

목 놓아 운적도 있었단다 나무야

푸른 나무야

우리 마을이 네게서 시작되고

네게서 끝나듯이

내 삶의 기쁨도

네게서 시작되고

네게서 이루어졌다

오늘은 나와 함께 맘껏 푸르른 나무야

 

 

 

푸른 나무 4

 

우산 없이 학교 갔다 오다

소낙비 만난 여름날

네 그늘로 뛰어들어

네 몸에 내 몸을 기대고 서서

비 피할 때

저 꼭대기 푸른 잎사귀에서

제일 아래 잎까지

후둑후둑 떨어지는 큰 물방울들을 맞으며

나는 왠지 서러웠다

뿌연 빗줄기

적막한 들판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서 바라보는 먼 산

느닷없는 저 소낙비

 

나는 혼자

외로움에

나는 혼자 슬픔에

나는 혼자

까닭 없는 서러움에 복받쳤다

외로웠다

 

네 푸른 몸 아래 혼자 서서

그 수많은 가지와

수많은 잎사귀로

나를 달래주어도

나는 달래지지 않는

그 무엇을, 서러움을 그때 얻었다

그랬었다 나무야

오늘은 나도 없이

너 홀로 들판 가득 비 맞는

푸르른 나무야

 

 

 

, 너는 죽었다

 

콩 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 , 저 콩 좀 봐라

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 너는 죽었다

 

 

 

사랑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 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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