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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만능주의', 설교 타락시키는 원흉

by 石右 尹明相 2011. 10. 2.

 

 

'은혜 만능주의', 설교 타락시키는 원흉

 

글 / 정용섭 목사

 

한국 교회만큼 은혜 타령이 많은 교회는 없을 것이다.

흡사 서양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아이 러브 유'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하지만

그들이 우리보다 실제로 사랑이 많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은혜를 자주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은혜 만능주의가 우리의 신앙을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은혜를 무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서 인식되고 있는 은혜는 거의 인간론적 범주로 축소되어있다.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고 자기 기분이 좋으면 은혜 받았고 하지만

자기 기분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설교가 좋았어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에게 은혜는 사람의 기분에 불과한 것이다.

혹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청량제 같은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인 은혜를 이렇게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사모할 수 있겠는가?

은혜 만능주의는 한국 교회의 설교를 타락시키는 원흉이다.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아첨하거나 위협하는 설교를 우리는 자주 본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흡사 손님들에게 술을 많이 팔려고 교태를 부리는

작부와 다를 게 없다.

좀 지나친 표현이긴 하지만 이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설교자는 길(道)을 가지 않고 무엇을 팔려고만 하는 것일까?

 

물론 그들은 그게 모두 복음을 위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과연 그럴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릴 것이다.

 

순수한 사명감으로 그렇게 하는 설교자도 있을 것이고,

또는 목회 성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설교자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된 목자와 삯군 목자를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복음을 위한다는

명분만으로 기업적 가치와 기술로 목회하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이런 현상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일 때까지 인내심을 가져야만 하겠지.

 

설교의 진정성은 있지만 은혜 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설교자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은혜를 무시하라”이다.

무슨 뜻인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강박증, 조급성을 버리라는 말이다.

 

복음의 긴박성이야 우리에게 늘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그것과는 다르다.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청중이 은혜를 받는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이다.

청중이 은혜를 받는 것 같아도 그것은 껍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청중이 은혜를 받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방식으로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설교자가 구원을 결정할 수 없듯이 은혜도 역시 하나님만의 영역이라는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설교자들은 청중들을 들들 볶으면서까지

은혜를 강요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은혜 자체에 대한 해명이다.

그것의 효과는 오직 성령의 몫이다.

 

이 은혜가 무엇인지 해명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가 여전히 열려있는 세계인 것처럼 은혜도 역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층적 영성에 근거해서 이 은혜를 해명하도록 노력해야한다.

다층적 영성만으로도 우리의 힘이 모자란 마당에 신자들이 은혜를 받는지

받지 못하는지 신경 쓸 틈이 어디 있는가?

 

이런 데 신경을 쓴다는 사실은 본인이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열어가는 세계를

전혀 맛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