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할 말은 한다

예배시 목사의 예복(가운) 착용이 성경적으로 옳은 일인가?

by 石右 尹明相 2011. 10. 9.

 

 

권위를 상징하는 목회자 가운

 

보기만 해도 품위(?)가 넘치는 카톨릭의 잔재인 이 폐습은

목회자의 권위를 교회권력으로 자라게 하는 씨앗이다.

교회의 돈(헌금) 문제와 권력, 이 두 가지는 교회를 병들게 하는

독버섯 같고 암적인 존재로 모든 교회악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권력의 근원이 되는 이 폐습이왜, 누구에 의해, 무슨 이유로,

어떻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아직까지 유지될 수 있었는지를 여러 모로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가운 착용에 관하여 성경적인 견해를 담은 두편의 신학교수들의 글을 실었으며

그 외 여러 편의 글들을 통해 교회의 전통으로 가장하여 성도들을 속이고 진리를 외면하며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는 중대한 문제들의 실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예배시 목사의 예복(가운) 착용이 성경적으로 옳은 일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 목사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목사 자신을 높이기 위한 행위는 아닌지 돌아보자.

 

 

누가 20/46~47

 

서기관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며,

시장에서는 인사받기를,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가장 좋은 자리를 좋아하고 또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남들에게 보이고자

길게 기도하니,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시더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성경에서 벗어난 목회자의 가운

 

먼저, 예배시 예복으로 목사 가운을 입는 것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쓴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 글은 오덕교 교수(합신)가 한기총의 목사제복 권장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입니다.

 

 

* 한기총의 목사제복 권장에 대하여 *

-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 -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는 1997710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목사의 복장을 통일하기 위한 목사 제복 발표회를 가졌다.

 

한기총은 이를 통해 수렴된 의견을 모아 목사의 제복을 확정하고 49개 교단,

5만 여명의 목사에게 제복 착용을 권장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일을 주관한 한기총의 교회발전위원회는 목사의 제복 착용으로

"시민들에게 목사임을 알리고 기독교의 통일성 등을 고려해

제복 도입을 추진키로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기총의 이러한 시도는 많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은 목사의 복장 착용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기독교는 로마천주교회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성경의 최종적인 권위를 고백하여 왔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예배만이 아니라 생활의 영역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 수많은 성도들이 이 일로 인해 박해를 받았고, 순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목사의 제복 착용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세상적인 것이다.

혹자는 구약시대 아론이 입었던 제사장 복장을 거론하겠지만, 구약의 제사장 제도나

번제와 소제와 같은 제사, 성전 제도는 장차 오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하는 그림자요 비유였다(8:5; 10:1).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여(5:17), 이제는 더 이상 의식적이거나

상징적인 구약의 제사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론의 제사장복을 신약 시대의 성직자 제복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성직자의 복장 제도가 성경보다는 인간적 전통에 기초한다.

학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사용하는 복장제도가 아론의 의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당시 평민들이 입던 복장에 기인했다는데 동의한다.

 

4세기에서 9세기 사이 복장제도가 크게 변할 때, 일반인들은 로마인들이 입던

가운과 같은 겉옷과 망또를 벗어버렸지만, 사제들이 이를 고수하여 사제복으로 고정시켰다.

 

그 후 10세기에 의식용 복장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13세기까지 약간의 수정을 거쳐

오늘날 로마 천주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다양한 성직자의 복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제복은 성경에 근거한 것도,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른 것도 아니다.

 

목사의 복장을 도입하여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권위주의적이며

사제주의적인 발상이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벧전 2:9).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모든 부패의 근원을 사제주의에서 찾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복장을 통하여 일반 신도로부터 목사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성경의 가르침뿐만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 존 후퍼(John Hooper)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며 기독교 신앙에 배치되는 것"이다.

 

한기총은 목사의 제복을 채용함으로 기독교의 통일성과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목사가 신부와 같은 복장을 하면, 세상은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기독교회가 천주교회의 작은 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장 통일은 성경적인 기독교를 고백하는 많은 신자와 목회자의 반대에

부딪히게 됨으로 교회 분열을 조장할지도 모른다.

한기총이 49개 교단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교단들의 신학과 생활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기총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목사의 제복 착용을 권장하는 것보다는,

모든 한국 교회가 동의할 수 있는 성경적인 신앙을 확립하고 그것을 세상 속에서

실현하도록 하므로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가운을 입으려는 것은 목회자의 권위를 세우려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여러 지체들을 세우시고 각각 은사대로 맡은 일을

분담하게 하셨는데 그중에서 목사를 통해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도록 세우셨으니 곧 돌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을 맡기셨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4:11~12)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곳간인 성경에서 때에 따라

필요적절하게 영혼의 양식인 그 말씀을 꺼내어서 성도들에게 공급하여 양육케하라는

명령이시기에 그야말로 목사는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자라고 할 수가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사들에게 성도들 위에 군림하라고

특별한 권세를 주신 일이 절대 없으시다.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다른 모든 자들은 목사를 포함하여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에 불과하다.

목사가 그리스도의 자리인 머리가 되려 한다거나 모든 지체들보다 특별한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며 복음에 무지한 자라 여겨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에서는 "목사는 계급을 가리킴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르쳐 칭하는 것 뿐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예장통합과

예장고신의 헌법에서는 삭제되었다. 왜 삭제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다시 밝힌다.

 

 

신학자이며 성경주석가인 박윤선 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목사들에게 권세를 가지지 말라고 이렇게 경고한다.

"만일 목사들이 자기에게 어떤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반역이다."

 

 

이 한마디 속에 목사들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모든 의미가 잘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시 한국교회 목사들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강대상을 높이고 복식(가운)을 화려하게 갖추며 박사학위를 선호하며

자신을 위하여 교회의 재정을 낭비하는 현실을 비판 하기도 했다.

 

 

목사란 구약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아니다.

성도들 개개인이 모두 제사장이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일대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이는 대제사장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중재자가 되시는 은혜로

목사를 비롯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부여된 특권이다.

 

 

목회자의 권위에 대하여 말한다면,엄밀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이지

그 말씀을 수종드는 종이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보배가 담긴 그릇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은 보배로 인함이지

그릇 자체의 가치는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질그릇이 아무리 요란스런 치장을 하고 권위를 내 세운다고 금그릇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수종드는 종이 아무리 권위를 내세우려하나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목사에게 특별한 권위를 주신 일이 없으며

그 말씀 자체에만 오직 권위는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목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전할 때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지 그 말씀을 벗어나 의상이나 예복으로

권위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권위가 아니다.

 

보배를 담은 그릇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 보배를 훼손한다든지

변질되게 하는 그릇일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가?

마땅히 폐기처분 되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라는 그릇을 말씀을 담아 옮기는 도구로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 될 것이다.

 

 

(3) 가운을 즐겨 입는 목사들의 공통점

 

 

가끔씩 보게 되는 기독교 케이블 방송에서 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설교자들의 요란한 복장이다.

언뜻 봐서 카톨릭의 방송인지 기독교 방송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그들의 모습은 천주교 사제들의 모습과 흡사해서 헷갈릴 정도이다.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23: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고 다니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어쩌면 이렇게도 미리 아시고 이토록 정확한 묘사를 하셨을까?

 

 

 

가운의 생김새를 보라!

 

~ 늘어진 넓은 소매하며 요란한 무늬와 색깔하며...

종교지도자라 자부하던 서기관(랍비)들의 권위위 상징인 예복처럼

목회자들이 권위를 내려하여 입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일이다.

예수께서 외식적이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질책하셨듯이

그 책망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유효하리라.

 

목사에게 부여된 권위는 대접을 받으라는 권세가 아니라

성도를 섬기고 양육시키라고 위임받은 말씀의 권위 아래 복속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주님께로 부터 위임받은 이 권위를 이용하여

악한 사단으로 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진리 위에서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데 사용해야만 한다.

 

 

 

 

목사들의 예배용 가운 (견본들)

일부 목사들이 선호하는 박사가운(팔소매 띠 두른 것)견본

 



카톨릭의 사제복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

  위 사진을 비교해 봅시다.

 

기독교 목사의 복장과 이것이 무엇이 크게 다르단 말인가?

오히려 기독교 목사들의 가운이 더 요란하고 권위적이지 않은가?

 

종교개혁의 정신은 어디가고 기독교가 카톨릭의 전통을 버리기는커녕

아예 한술 더 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실상 목사의 가운은 천주교의 짝퉁 사제복 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4) 한제호 교수가 제시한 논문

 

 

여기에 또 하나의 글

 

설교 시 목사의 가운 착용의 문제점에 관하여

한국성경신학회의 한제호 교수가 제시한 논문의 일부분을 발췌 소개합니다.

 

 

한제호 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 목사들의 예배 인도시의 복장이 1950년에 일어났던 6.25 동란을

계기로 해서 급속한 변화를 보이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밝히고 "기독교 목사들이

예배 인도 시에 기독교의 전래 이후 6.25 동란까지 70여년 동안 입었던 평복 대신

 

갑자기 소속 교단이나 어떤 연구단체들과의 아무런 합의도 없이 개인마다 처음에는

검은 색 가운을 입더니 점차 그들 개개인의 취향을 따라 천주교나 성공회, 루터교의

성직자들의 복장을 닮아 가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우리나라 기독교 목사들의 지금까지의 예배시 복장이 평복인 이유는

무원칙의 산물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토대인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한

신앙 고백의 한 표지였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교회의 오랜 기간의 훌륭한 불문율의

전통을 이어온 관례였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우선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라는

구절이 포함된 갈라디아서 215-18절을 낭독하며, 위와 같은 사도의 말에서

기독교 목사의 설교와 예배용 복장에 관한 원리를 얻을 수 있다며 이를 제시했다.

 

기독교 목사는 이미 헐리고 사라져 버린 구약적, 율법적 제복 개념을 좇은 복장을

다시는 입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한 교수는 어떤 종교의 성격을 살펴보는 판단 기준은 그 종교의 교리와 의식이라고

말하며, 교리는 그 교리를 전하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의식은 예배 시 인도자의 복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한 교수는 모세 율법에 제정된 많은 교리들과 예배 의식들 및 복식 관련 규정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정교하고 화려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예비적 방도의 하나로서만

계시되었던 것들, '개혁되기 위해서 개혁의 날까지만 남아 있었던 것들'(9:10)'

이었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의 예수님 말씀 및 사도들의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지적하며, 목사가 이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목사가 이미 '개혁된'(2:18, 9:9,10) 구약의 율법에 있는

제사장의 복식을 닮은 예배용 복장을 입으려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그것은 목사 자신이나 교인들이 목사의 중심 대신 그의 외모를 주목케 함으로

목사를 우상화하는 행위며, 이는 목사를 죽이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목사의 예배용 복장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23:5,6)

목사들이 복장 같은 외모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 그들의 중심에 확실히 새겨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고전 12:8)의 능력에만 의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우상화 금지에 포함된 목사의 우상화 금지

 

십계명에서 두번째로 다루고 있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행위에 대해,

한 교수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형상화하는 행위는

성경 전체에서 강하게 다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로,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죽이는 행위라고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5) 가운에 대하여 그토록 집착하는 목사들의 심리상태는

 

왜 그러하며 그 원인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교회 안에서 목사가 성도로부터 섬김 받는것에 익숙해지는 심리상태를

신랄하게 지적한 어느 분의 글이 있어 올립니다.

 

아래 글들을 통하여 왜 가운착용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그들 마음속을 순서대로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발췌)

 

 

서기관들은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현대판 서기관들과 후보생들

 

[20: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그 차고 다니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이런 사실이 비단 예수님 당시로만 국한된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판 서기관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높은 자리를 추구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존경을 받으려는 무리들이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된 요인을 찾아보면,

목회자들이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을 받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청년시절이 거의 없습니다.

소년에서 바로 장년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청년기가 없이 장년으로 넘어가게 되는 이유는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전도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이라고 존경과 대접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예우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지만 나중에는 예우를 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학교에서는 그저 학생일 뿐이지만

교회에 가면 영혼을 지도하는 교역자로 대접받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목회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목회관이 정립됩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까지 하게 됩니다.

 

단 한 번도 섬기는 훈련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신학생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갑니까?

처음부터 섬김을 받으려는 서기관들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교만해 질수 있습니다.

 

스스로 거룩한 줄 알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대접만 받다 보면

겸손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과연 가운이 목회자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성경적으로 조명해보면 예수님의 책망을 받던

서기관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입어야만 교인들이 거룩하게 보고 존경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가운을 벗어야 합니다. 가운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차라리 최고의 예의를 보여주는 신사복을 정중히 입고 설교에 임하면 됩니다.

목회자가 가운에 파묻혀 있는 것은 형식에 치우쳤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형식은 내용이 내용다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최소 조건일 뿐입니다.

내용과 형식은 동반자이되 내용이 형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형식은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내용의 무게를

삭감시키는 일만 할 뿐입니다.

 

목사가 박사가운을 좋아한다구요?

 

'성의'라 부르는 가운에도 직분의 차등(?)에 따라

어깨 주름의 숫자가 다르다고 합니다.

 

 

안수집사는 주름이 하나, 장로는 둘, 목사는 셋이랍니다.

심지어 박사학위를 가진 어떤 목사님은 무려 네 개의 어깨 주름이 접힌 가운을

즐겨 입는다는데, 이것은 엄격한 위계적(位階的 hierarchical) 조직체인

카톨릭에도 없는 일입니다.

 

스톨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로마시대 여성들이 어깨에 장식용으로 걸치던 스톨라(stola)에서 유래되었다는데,

영어로는 '훔치다'라는 뜻의 동사 steal의 과거형인 stole과 글자가 꼭 같습니다.

 

무엇을 훔친 것일까?

 

진실을 훔친 거짓의 표상인지, 존경과 신뢰의 시선을 훔친 위선의 징표인지...

 

 

문제는 예복을 입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복이 가리키는 정신입니다.

예복을 걸친다고 숨은 부끄러움의 허물이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복을 입지 않는다고 해서 없던 허물이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모시 옷)

곧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라고 썼습니다(요한계시록 19:8).

신앙인의 예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삶이요 올곧은 행실입니다.

 

 

미움과 거짓을 떨치려고 애쓰는 인격이며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지향하는 발걸음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곳 사람들이

"제우스와 헤르메스의 환생"이라는 칭송과 함께 제사의 예식을 바치려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옷을 찢어 탄식하며 제사를 금지시켰습니다(사도행전 14:818).

 

자신들이 종교적 우상으로 전락되는 것을 끔찍한 죄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6)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으려는 목회자들

 

 

루터는 영적 계급을 나누는 것은 거짓과 위선이며,

모든 크리스천이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간에는 직무적인 차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주의'는 교회 지도자를 '성직자'라고 부르고, 이들을 평신도와

구별된 신분으로 보고 특별히 대접하며,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거나,

축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일삼는 교회권력 경향입니다.

 

예수님이 아닌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되면 로마 카톨릭처럼 반드시 타락하며,

비성경적인 교리와 관습이 생겨나 구원과 멀어지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6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다른 머리가 없다.

로마의 교황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것의 머리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그리고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모든 것을 대항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요 죄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자신을 높이려 하는 목사들도

로마의 교황과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7) 목사의 가운 착용이 가져오는 결과

 

주의 자녀들 위에 군림하는 '주의 종'

 

한국교회 일부 목사들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 부르기를 좋아하며,

교인들에게 자신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자신을 섬길 것을 강요합니다.

이는 비성경적인 발언이며, 구원 받은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지체로 은사적 차이는 있으나 계급적 차이는 없습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을 치루고 산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또한 주의 자녀가 주의 종을 섬겨야 한다는 것부터 이치에 맞지 않으며,

목사 스스로 '주의 종'이라 인식하고 있다면영광을 구치 않고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고 섬김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목회를 하지 말고 정치가나 사업가를 해야 합니다.

묵묵히 주인이 시키는 일을 아무 대가 없이 하는 것이 종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사람으로 부터 어떤 보상을 바라기 보다는

주님으로 부터 상급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그 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명성 없는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정말로 주의 종이 되고 싶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미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기에,

이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려 보좌 오른 편에 앉히셨고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진실한 주의 종은 주인을 두려워 해야 하고, 주인의 일을 해야 하며,

어떤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말아야 하고, 주의 자녀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를 천국에서 부요하게 하시고 높여 주시며,

영화와 권세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교권주의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성직임을 강조하면서

권력을 집단화하여 각종 혜택(, 명예, 권세)을 누리고, 교인들을 권력적으로

지배하려는 구조와 그러한 경향을 말합니다.

 

 

 

* 목사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종 된 자이다 *

 

[고린도후서 4]

 

5절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개역개정)

5절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읍니다. (공동 번역)

 

 

여기서 사도 바울이 (우리) 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사도들을 말함이며,

요즘으로 말하면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일컫는다.

다만 유의할 것은 이 사도직이란 단회적인 소명으로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제자들인 당사자들에 한해서 주어진 것이고 결코 계승되는 직분이 아니다.

어쨌든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은 요즈음의 목사가 (우리)라고 자신을 지칭할 때

(너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말하는 뜻은 무엇이겠는가?

목사들은 성도들을 위해 종으로 세워진 자들이라는 말이다.

 

 

 

(8) 목사의 가운을 용납하는 무관심한 성도들!

 

예레미아 5/30~31 경이롭고 무서운 일이 그 땅에서 행해지는도다.

선지자들은 거짓되이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그들의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고후 11/19~20 너희는 현명하다고 하면서도 어리석은 자들을 기꺼이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삼키거나 착취하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얼굴을 쳐도 너희는 용납하는구나.

 

 

성도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

신약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다(벧전 2:9).

 

 

웨스트민스터 정치조례에서는 "목사는 계급을 가리킴이 아니요,

다만 각 양 책임을 가르쳐 칭하는 것뿐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예장통합과 예장고신의 헌법에서는 삭제시켜 버렸다.

 

 

그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예복이라는 미명하에 가운을 착용함으로써

성직자 자신을 과시하거나 높이기 위해 예복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9) 가운을 입는 것과 예수님

 

예수님도 말씀을 전하실 때 가운이 아닌 평상복을 입으셨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이 제사장 예복이나 랍비들이 즐겨입던 좋은 옷을 입고

권위를 자랑하며 사역하신 적이 결코 없다.

늘 평상복으로 설교하시고 치유하시고 섬기시는 일을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또 여러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운을 걸치고 말씀을 전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딤후 4:13)를 보면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를 보아도

다른 사도들 역시 그 당시 유대인의 평상복을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일부 목사들은 그토록 가운을 좋아할까?)

그것은 권위 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3:30)외쳤던

세례요한의 말처럼 목사는 말씀 앞에 뒤로 숨어야하고 가리워져야 하는 존재이지

그 말씀 앞에 돋보여지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섬기려 이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그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이 섬김의 정신으로 봉사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교회 권력의 단초이며 목사 권위의 상징인

목회자 가운을 없애는 일은 교회가 거듭날 수 있는 출발점이다.

 

 

 

(10) 칼빈의 실수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부패의 근원을 사제주의에서 찾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사제주의를 없앤다고 하면서도

그 잔재이자 폐습인 사제복 에 대해 너무 관대했다는 점인데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차마 이것마져 버리지 못한건지

그 사제복으로 인해 장차 교회안에 생겨날 교회권력이라는

악영향과 폐단을 예상못했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개혁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카톨릭의 잔재물을

모양만 약간 변형시켜 그 가운을 걸쳐 입는 그의 발상과 행동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네바 가운은 이렇게 기독교 교회 안으로 들어와

목사가 입는 모범 예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군다나 개혁교회 안에 이 제네바 가운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권장함으로써

개혁의 정신에 역행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이를 두고

칼빈을 기독교 가운의 시조(始祖)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러한 역사를 통해 다시금 짚어 볼 것은,

초기 기독교의 400 여년 동안이나 예배를 집례할 때

목회자가 평상복을 입는 것이 교회전통으로 내려왔건만

5세기 초 천주교의 등장과 함께 성직자라 불렸던 소수의 권위를 위해

인간의 생각이 개입함에 따라 점차 변형되었고,

초기의 성경적인 평상복 모습은 사라지게 되면서

가운을 입는 자가 교회 권력의 상징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Geneva Gown

(이 제네바 가운은 경건과 엄숙함을 강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검정색이다)

 

 

칼빈은 개혁교회 안에

권위의 상징인 목사 가운을 권장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그가 카톨릭의 사제복으로 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그들의 전통을 답습하고 말았다.

 

 

(11) 경건함을 위해 설교 시간에 입는다는 예복.

그럼 왜 목사만 가운을 입어야 하는 건데?

 

목회자가 설교 중 왜 가운을 입어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심리적으로 예배의식의 경건성과 거룩함을 고양시키는 효과가 있으며...등등

들어보면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마치 가운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것 처럼

가운에 대해 그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하고 합리화 시키느라 온갖 구실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어떤 논리와 미사여구를 총동원하여도 성경말씀에 비추어보면

설득력이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

 

목사만 교회 안에서 경건한 예배를 위해 그 어떤 권위를 상징하는 듯한

불필요한 의상을 입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일반 성도들도 똑같이 입어볼까?

 

경건을 위한 것이라면 일반 모든 성도들도

목사와 같이 가운을 입고 예배에 참여해야 옳지 않겠는가?

옷의 색깔과 모양 그리고 단추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혀 구분이 없는 가운으로

모든 성도들이 똑같이 입고 예배를 드린다면 문제는 다르다.

 

 

 

(12)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10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께서는 믿는 모든 이가 으뜸이 되어 섬김을 받으려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하물며 그의 종 된 목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고전 12장의 말씀에는 교회의 몸된 모든 지체들에 관하여

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음을 기억하자.

 

섬김을 받는 일에 익숙해지면 그 특권에 안주하여

주님의 말씀조차도 경히 여기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들이 곧 바리새인이었고 서기관들이었다.

 

목회자들이여 제발 가운과 함께

직임에 붙어 있는 권위를 벗어 던지라!

모든 겉치레는 결국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 광야의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