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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 한국교회 대형화의 그늘

by 石右 尹明相 2013. 2. 9.

    

       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한국교회 대형화의 그늘

                                                                                          2013년 02월 07일

 

 

중학생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 출석한 교회는 서울 변두리 주택가의 한 허름한 상가 건물 꼭대기에 세 들어 있던 작은 개척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겨우 두 명이 동시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비좁고 높은 계단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고 교육관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예배실 하나만 달랑 있던 교회입니다.

십자가만 세우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던 70년대 초였건만 그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다른 교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실하고 충성된 목회자와 제직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 작고 불편한 예배당에서는 근 10년 동안 장년 교인 수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일 년에 평균 8명도 못 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개척 교회'라는 명판을 떼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건물이 목회하나

그런데 이런 상황을 순식간에 바꾼 것은 '교회 건축'이었습니다. 온 교우들이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하여 교육관과 식당까지 갖춘 약 350명이 예배할 수 있는 3층짜리 예쁜 교회당을 신축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교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직들은 '믿음대로 채워 주신다'고 좋아하셨지만, 필자는 너무 허탈했습니다. 신도들과 목회자가 오랜 기간 노력해도 쉽게 풀지 못한 난제를 건물 하나가 간단하게 해결한 것입니다. 전도와 관계없이 매달 새로운 가정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인근 지역의 한 젊은 목사님은 용감하게 자신의 집을 팔아 건축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건축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니 그 약발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이런 통 큰 건축 결과 교세가 급성장하여 지역에서 주도적인 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그 무명의 목사님은 꾸준히 신분 상승을 얻으셨고 나중에는 언론에 뇌물 시비까지 일으키며 교단과 기독교 단체의 요직을 여러 번 차지해 거물급 인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평소 행적으로 볼 때 이분이 아들 목사에게 담임직을 세습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교단이나 신학교 그리고 기독교 단체 등 이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부정 논란과 말썽이 없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본래 집을 팔아 한 건축 헌금이 진정 교회에 바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가업에 장기 투자를 한 것인지 혼동을 줄 정도입니다.

대전 지역의 어느 교회 또한 교인 수에 비해 너무 거대한 교회당을 지어 처음에 많이 염려했는데 후일 오히려 큰 득을 보았습니다. 서울 구로구의 한 개척 교회는 아예 목회자가 자비로 자금을 조달하여 아담한 교회당을 짓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교인이 빠르게 증가하였습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은 멋진 건물만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화려한 목회 성공을 꿈꿀 수 있는 모험적 토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교회당 건물의 힘은 정말 막강합니다. 정통인지 이단인지도 별로 관계없습니다. 수완이 좋든 믿음이 좋든 하여튼 건물만 잘 세우면 이단은 물론 사이비도 쉽게 번창합니다. 담임목사가 누구인지도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건물이 번듯하고 적당히 설교를 잘하면 순진한 신도들이 알아서 자리를 채워 줍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보다 우선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 민초들에게는 무당처럼 무조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노래하는 목사가 최고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입학 경쟁이 없는 군소 신학교나 무인가 신학교 그런 것도 별로 문제가 아닙니다. 돈으로 적당히 학력과 경력을 새로 세탁하면 박사 학위까지 가능하여 나중에 보면 외견상 거의 다 엘리트 목사로 둔갑합니다. 그러다 보니 개천의 미꾸라지가 용으로 변신하고, 동네 촌닭이 봉황 행세를 하는 놀라운 이적이 그치지 않는 곳이 바로 작금의 한국교회입니다.

교회 건축 자체가 딱히 나쁜 일도 아니고 또한 현실이 이렇다 보니 보통 목회자들은 교회 건축이나 증축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무리해서 빚을 지더라도 일단 짓고 보자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거액의 교회 재정이 선교나 구제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은행 대출금과 이자에 소모되는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과도한 비용 부담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거나 교회당을 파는 일마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경매로 나온 종교 건물만 해도 거의 300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매자가 별로 없어 낙찰률은 겨우 15%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금융권에서 대출한 금액만 따져도 9조 원이 넘고 매달 약 450억 원의 헌금이 이자로 지급되었습니다.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이 고작 이런 소모적인 땜질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이자를 받지 말라"는 말씀을 엉뚱하게 거꾸로 적용해서 열심히 이자를 내고 있습니다. 그 돈이면 해마다 수천 명의 선교사를 지원할 수 있고 또는 미자립 교회 수천 개를 즉시 자립시킬 수 있습니다.

지난해 왕성교회 부채는 217억 원이었으며 각종 대출 이자와 수수료 지불이 18억 원에 달했습니다. 2000억 원이 넘는 신축으로 천문학적인 빚을 진 사랑의교회는 이보다 더욱 심각하여 건축에 들어가는 돈이 모자라 사역에 써야 할 헌금까지 공사 대금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은행 이자는 날로 불어 가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새문안교회 208억, 지구촌교회 188억, 주안장로교회 130억, 그리고 인천숭의교회는 107억의 근저당 설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 분립을 통하여 목회 본연에 충실하려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충무제일교회, 안산동산교회, 영동교회, 향린교회, 두레교회, 잠실중앙교회, 향상교회, 샘물교회, 산울교회, 만나교회, 소양교회, 호천장로교회, 소양제일교회, 일산은혜교회, 그리고 예음교회 등 이외에도 더 많습니다. 이들 중에는 교회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도 교회 대형화에 반대하며 분립 개척을 결정한 강직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이야말로 건물이 아니라 신도들이 목회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건물 신앙의 그늘

물론 교인들과 목회자의 뜨거운 헌신이 없이 교회가 건물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장의 이면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수많은 신도와 직분자의 희생적 사역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적 환경 변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조건이라면, 교회당 건물이 교인을 모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건축 능력으로 목회 능력을 평가할 정도로 건물이 교세 성장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가 잦은 한국 사회에서 대부분의 새로 이주하는 신도들은 피곤한 개척 교회나 평범한 중소형 교회를 기피하고 이왕이면 시설이 좋고 프로그램이 다양한 대형 교회를 선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제는 그런 편향성이 너무 지나쳐서 현재 한국 기독교인의 무려 과반 수 이상이 불과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집 앞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외면하고 굳이 멀리 있는 중대형 교회를 찾아갑니다.

이처럼 종합적인 경쟁력에 있어서 작은 교회는 큰 교회를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들이 암세포 같은 무한 증식을 스스로 자제하지 않으면, 원하든 원치 않든 저절로 구조적인 양 도둑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현실적인 여건입니다. 그러나 교권의 단맛에 깊이 중독된 귀족 목회자들은 이를 규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 대부분은 한번 잡은 권력은 절대로 놓지 않고 더욱 확장하려 합니다.

아울러 많은 교회에서 교회당 건축을 독려하기 위해 흔히 애용하는 '성전'이라는 말도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무식해서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면 동정심이라도 들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기본 상식을 알거나 신학교 문턱만 넘어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소위 제법 배웠다는 중견 목회자들이 이런 사이비 수준의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며 억지를 부립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신도들 자신이 성전입니다. 예배는 제사가 아니고,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고, 설교 강단은 제단이 아니고,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은 돈이나 부귀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신도들의 신앙적 열정을 자극하고 또한 교회당을 '복 받는 장소'로 각인시키기 위해 단순한 벽돌 덩어리를 성전이라고 미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 이방 출신의 극히 불신앙적인 왕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화려한 성전을 지었던 것처럼 한국의 많은 교회 역시 같은 수법으로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단이나 사이비가 기승을 부리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위 정통이라는 교회들의 변질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왜곡하여 교회를 기복화, 종교화, 그리고 상업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단 하나의 건물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단 하나의 종교 기관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따르는 양들에게 돈을 요구하신 적은 더욱 없습니다. 그냥 그분의 삶 자체가 진리이고 사랑이고 또한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관습적인 종교의 틀에 가두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요즘 일부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입만 경건하지 실제 신도들에게 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도리어 만날 뭘 달라고 요구합니다. 세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종교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도대체 돈을 안 챙기는 곳이 몇 군데나 있는지요. 소위 성직자라는 이들 상당수는 별난 잔 수를 다 동원하여 무속적이며 기복적인 명분을 만들고 신도들에게 집요하게 돈을 요구하거나 바침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성스러운 간판을 걸고 있든 신도들을 '앵벌이'시키는 종교는 모두 예외 없이 사이비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일부 개혁 교회들마저 그런 망령된 줄에 서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이 함께 눈이 멀어 서로 복을 받겠다고 지지고 볶고 분주하지만 정작 이들은 '참된 복'인 십자가의 도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운영에 돈이 필요 없다거나 건물이 필요 없다는 식의 무지한 말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헌금을 걷는 목적과 수단, 그리고 헌금을 쓰는 용도와 방법이 정도에서 벗어나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내의 돈 흐름이 심하게 왜곡되다 보니 작은 교회는 사람과 돈이 너무 없어서 울고 있는데, 대형 교회들은 사람이 넘쳐 장소가 협소하다고 불평하며 증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갈수록 양극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부 목회자들은 부와 권력을 사랑하고 신도들은 편리와 안락에 타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부른 목사들은 기복으로 선창하고 복장이 교인들은 바침으로 복창합니다. 한국교회의 흥행은 국민들의 오랜 무속적 기복 전통에 힘 입은 바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마치 성황당에서 복을 구하 듯 예배당에서 복을 구합니다. 복채를 바치듯 헌금을 바칩니다. 무당을 의지하듯 목사를 의지합니다. 건물에 십자가를 세운 것 외에는 이교도들이 하는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질된 목회자들은 그런 기복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교회에 유치하고 속박합니다.

하여튼 이처럼 목사와 신도가 서로 그 밥에 그 나물이니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무리해서라도 큰 건물을 지어 신도들을 유혹하고, 교인들은 좋은 조건을 찾아 큰 교회로 수평 이동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더 모이면 목사는 사이비 교주 같은 '긴 옷'을 입고 모자라는 권위를 보충하며 순종 잘하고 헌금 잘하는 신도들을 양산하기 위해 일 년 내내 쉴 틈을 주지 않고 현란한 프로그램들을 분주하게 돌립니다. 그리하여 교세가 더욱 증가하면, 다시 비좁다고 불평하며 증축을 되풀이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알량한 수법이 의외로 잘 먹혀 한국의 많은 중대형 교회들은 흥행에 큰 재미를 보고 세계 교회사에 드문 고속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교인들이 비정규직에 있거나 셋방살이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는데 교회당만 아방궁처럼 세우고 우쭐하며 흥청거리면 그게 바른 성장이고 부흥일까요. 유럽의 교회들이 큰 건물이 부족해서 몰락했을까요. 아무리 교회당 간판에 금칠을 하고 요란하게 앰프 틀고 기타 쳐도 흥행은 결코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사라질 거품입니다. 단지 이런 교회들은 초대형 건물 짓겠다고 최소한의 신앙 양심마저 봉인한 채 면죄부 팔아먹다 망한 중세 교회의 무허가 짝퉁 불법 복제판일 뿐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한국의 귀족 교회에서 거들먹거리는 소위 '주의 종'이라는 분들 삶 속에서 정말 십자가를 따르는 모습을 보십니까. 고액 연봉, 터무니없는 강사비, 각종 부수 지원비, 과도한 판공비, 고급 승용차, 잦은 해외 나들이, 자녀 유학, 공금 횡령, 뇌물 수수, 부정 선거, 성추행, 재단 비리, 성직 매매, 패거리 작당, 그리고 교회 세습 등 이런 것이 진정 종의 모습입니까.

최근 어느 목회자가 강남의 한 대형 교회 예배에서 다른 순서 없이 그저 몇 초 동안 축도만 한 번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교단 총회장급 목사들은 기도, 축도, 그리고 설교 등 예배 순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100~1000만 원 정도의 황당한 사례비를 받는다고 합니다. 상당 경우는 담임목사들의 인맥 관리나 교단 정치에 관련하여 교회 돈을 서로 나누어 먹는 뇌물성 사례입니다. 이번에 내가 주었으니 다음엔 너도 나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정식 집회를 하고 나면 도대체 얼마나 큰돈을 주고받을까요.

목회직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액의 서비스업이 되었습니까. 심지어 한 해 접대비로만 3억 7000만 원을 사용한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 공금을 가지고 목사들 돈 잔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당연합니다. 과연 이게 종들이 할 일입니까. 틈만 나면 신도들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설레발치더니 정작 자신들은 뒤에서 썩은 호박씨를 까고 있습니다.

더구나 무슨 종이 감투가 그리 많고 재산이 그렇게 많습니까. 무슨 종이 사업과 업무가 그리 많습니까. 사도들이 이들처럼 비서실까지 거느리고 위세 부리며 목회를 했던가요. 세상 어느 나라에서 장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아먹는 이상한 '종놈'들을 보셨습니까. 심지어 어떤 '종님'은 대통령 연봉보다 더 많이 교회의 돈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를 대형화하는 의도가 결국은 돈과 권력임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우민화한 일부 신도들은 이런 위선적 종교 상인들을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추종하는 맹신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광야로 가야

한국교회 대형화와 외적 성장의 그늘에는 기복과 편리 추구 그리고 부끄러운 양 도둑질이 있습니다. 아울러 성공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성직주의가 이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개 교회 이기주의는 마치 자기 교회만이 홀로 진리인 양 교회 버스까지 동원하며 타 지역 교인들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화, 귀족화, 그리고 사유화는 모든 부패한 종교의 공통적인 몰락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대한 궁전을 세우고 안 망한 제국이 없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타락하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의 흥행은 없습니다. 미국 수정교회의 파산은 건물로 치장한 거품 신앙이 붕괴하는 첫 신호탄일 뿐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교회에는 단지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만이 남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도시에 이미 너무 많아 차고 넘치는 것이 교회당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다는 건물들은 더는 진지하게 선교를 못 합니다. 다만 이웃집 양을 서로 탐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는 자가 하루에 5000명이나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결코 건물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교회와 같은 문어발식 세력 확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겉치장이나 대형화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에 힘썼습니다. 루터나 웨슬리 또한 '성전'이라는 기만적 명분으로 그 어떤 대형 건축물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양들의 영혼뿐이었습니다.

대형화 추구는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격적인 타락은 로마 교회 대형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반면에 참목자 예수님은 먹을 제물이 넘치던 큰 건물 헤롯 성전이 아니라 마을의 소박한 회당이나 메마른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는 편리함이 아니라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주의 제자들은 묵묵히 그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거기서 양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 순간에도 삶에 지친 양들이 거친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부드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속히 광야로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고 교회는 이 땅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한국교회는 비록 약대 옷을 걸치고 메뚜기를 먹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던 그 선지자 세례요한의 귀한 사역을 기필코 다시 계승해야 합니다.

오늘날 광야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양들의 탄식 속에 있습니다. 또한 소외받고 있는 우리 이웃의 눈물 속에 있습니다.

샬롬!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식 장소라든지, 교회 건물에 어떤 비밀한 신성성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 칼뱅

 

 

신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