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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할 말은 한다

세상을 속이는 교회

by 石右 尹明相 2013. 5. 4.

 

세상을 속이는 교회

    목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요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복'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세속적인 복이든 영적인 복이든

아마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이 빠진 설교가 드물고, 복이 빠진 기도가 드뭅니다.

어느 목사님은 아예 복을 입에 달고 삽니다. 입만 여시면 복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는 것이 복인지,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인지

주객이 바뀌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오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된 그 자체가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인데,

그것을 경시하고 더 큰 복을 받겠다고 엉뚱한 일에 분주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진리의 우물가에 앉아서 목이 마르다고 엉뚱한 포도주를 찾는 격입니다.

마치 우물가의 그 여인처럼 영원한 생수를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보고

계속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 신도들의 이런 기복적 욕구를 이용하여

거룩한 교회를 마치 복채를 나누어 주는 저급한 종교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 때문입니다.

그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오도하여 무속적인 성황당 신도로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세속적인 복이 그리 중요했다면

왜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을까요.

이왕이면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셔서 요즘 일부 귀족 목사님들이 애용하시는

표현 그대로 '더 크고, 더 멋지게, 더 많이' 사역을 하실 것이지

겨우 보잘것없는 어부들 몇 명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셨을까요.

차라리 왕자로 오셨으면 병이 든 사람들을 일일이 손수 치료할 필요 없이

전문 의원들을 대량으로 동원하여 더 많이 고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라면 막강한 재물을 동원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큰 권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회당들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진리에 접근하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지만 실제로는 말구유로 오셔서 유대인의 종처럼 섬기며

살다가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고 세속적 복을 많이 받으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 어디에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어디에 헌금을 잘하면 무병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자손이 잘된다는 말이 있습니까.

요즘 만연하는 소위 성공주의나 성장주의는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해도 못 살고 병들고 파산하신 분들은 어찌 해석해야 하나요.

십일조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도 쫄딱 망한 이야기들은 왜 거론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신앙 좋은 목사님들은 절대로 중병에 걸리면 안 되겠지요.

아울러 일본 같은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왜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이제 정직해져야 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가장 왜곡하고 오도하는 곳이 바로 공교회라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단은 권력과 명예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 교회들은 이런 사단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며,

오직 부흥과 성장만이 있는 것처럼 큰소리칩니다.

교회에 돈을 바치면 큰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왜 그런 목회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전부 다 교회에 바치지 않습니까.

열심히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면 아예 전부 바쳐서

복을 곱빼기로 받으셔야지요.

왜 자신들은 뒤로 부동산을 사고 법인을 만들고 돈을 은닉합니까.

구약 십일조의 참된 정신은 '십분의 일'이란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건만, 일부 약삭빠른 목회자들은 더도 덜도 아닌

딱 십분의 일만 바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괜히 그 이상을 더 강조했다가는 자신도 모두 다 바쳐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이들 중 상당수는 밤중에 몰래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고약한 도적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가 주는 생생한 교훈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의 권력이 비대해져 세속을 향하자 로마의 황제도 감히 대항하지 못 했습니다.

신의 이름을 빌어 호령하니 감히 가로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신도들은 무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장식된 미사에 참여하거나

경문을 반복하여 외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성경은 오직 사제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신도들이 성경을 직접 읽거나 해석하면 바로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대적 교권을 구축한 후 성직자들은

거의 집단적으로 부와 권력에 탐닉했습니다.

교황이 세속화하여 타락하고 추기경, 신부, 수도사,

그리고 수녀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무자격한 자들이 거룩한 직분을 사유화하거나 돈으로 매매한 결과입니다.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영아들이 버려지고, 대부분의 신도들이

가난한 농노로 신음할 때 사제들은 화려한 저택에서 호의호식했습니다.

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주 교회당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그들 중에 과연 몇이나 천국에 도착했을까요.

이것이 과거 중세 교회의 비극적 실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똑같은 성경을 들고서 어찌 교회가 저 모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기 중에 가장 쉬운 것이 '종교적 사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왜곡되면 흉기가 됩니다.

신앙이라는 미명으로 무장된 종교적 신념은 매우 위험한 무기입니다.

중동 지역을 한번 보십시오.

종교 지도자들의 '성전(거룩한 전쟁)'이라는 한마디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슴지 않고 폭탄을 매고 자살 공격을 감행합니다.

중세 교회는 세상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속인 교회입니다.

세상에 복음의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따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처럼 지금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또 다시 세상을 속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간판만 달면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와 신도가 있다고 모두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어찌된 일인지 '병 고친다, 은사 준다, 또한 복 준다'고 하면

수천수만이 환호하며 모입니다.

반면에 바른 교회를 위한 개혁 모임에는 고작 칠팔십 명이 모입니다.

강단에서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면 강 건너 불 보듯이 무심하고,

오히려 요란한 종교 쇼를 하면 쉽게 통하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직한 목회를 하는 교회는 십년 동안 100명이 되기도 힘든데,

같은 지역 사기꾼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는 수천 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차 바른 교회들이 소수가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기처럼 참으로 슬픈 시대입니다.

신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이젠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목사의 삶을 들어야 합니다.

'공금 횡령 안 했다, 성추행 안 했다, 세습 안 했다, 그리고 표절 안 했다'

이런 거짓말을 믿지 말고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수천수만 모아 놓고 설교는 청산유수인데, 뒤로는 교회 돈을 곶감처럼 빼먹으며

사치를 누리거나 간통하고 세습하는 목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그들의 그런 위선과 거짓이 진정으로 복 된 삶의 모습입니까.

이들은 교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두려워하지 않음은 물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들의 간덩이를 그리 겁 없이 키워 주었습니까.

바로 그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들이 아닌가요.

그래서 그런 답답한 공동체에서는 귀한 복음의 진리가

돼지우리에 던져진 진주가 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속이 사악했던 중세 교회가

시대를 넘어 부활하여 오늘날 한국 땅에서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부패한 인생들의 무지와 탐욕은

별로 크게 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속이지 말고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것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실 정도로 불편하게 사셨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이 신도의 삶에 우선적 목적이 되거나 교회의 상습적 가르침이 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세속적 복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은총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부자로 장수하며 살기 위해 굳이 교회를 열심히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보다 더욱 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야말로 바로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한 바른 복음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복지이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몸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이유는 부나 권력 따위가

감히 신앙의 중요한 표준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장 큰 복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샬롬!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신성남 (2013년 05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