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주제로 한 시 모음
◈ 겨울 연가 - 이해인
함박 눈 펑 펑 내리는 날
네가 있는 곳에도눈이 오는지 궁금해
창문을 열어 본다.
너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쏟아지는 함박 눈이다.
얼어 붙은 솜 사탕이다.
와아!
하루 종일 눈 꽃 속에 묻혀 가는
나의 감탄사 !어찌 감당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다.
◈ 겨울 - 윤동주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
◈ 눈 위에 쓰는 겨울시 -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년 만의 폭설을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 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폭설 -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때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힌다.
방(房)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이나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이냐,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一年)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 겨울바다 - 김사랑
철지난 바다가엔
밀물과 썰물만 교차되었지
인연의 밧줄을 끌고 당기다가
거품만 쏟아놓은 자리
하얀 소금꽃이 피었네
수평선은 침몰되고
그 바다의 가슴에
수없이 흔적을 만들었다 지우는
돌아누운 그 섬엔
괭이 갈매기만 울었네
겨울바다는
눈물을 삼켜도
아무런 흔적이 없고
지난 추억의 그림자만
내 가슴에 묻고 말았네
◈ 겨울바다 - 오경옥
무슨 말이든 전할 수 없을 때
어떻게든 주어진 상황과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때
기다림에 가슴 먹먹하도록 그리워질 때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될 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다름과 차이 앞에서 혼란스러울 때
존재에 대한 정체성 앞에서
갈등과 번민에 휩싸일 때
그래도 견디어야 한다고 생각될 때
달려가곤 했었지
무작정
◈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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