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1927년 대구. 시인, 대학교수
서울대학교. 1950년 연합신문 시 '성숙', '잔상' 등단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정지용문학상. 구상문학상
김남조 시 모음
◈ 따뜻한 음악
바다 건너 더 먼 곳
그의 집으로 나는 가리
세월의 가룻발도 내릴 만큼은 내려
투명한 적설이 되었으리
그는 의자에 앉아 있고
어린 아이가 하듯이
내 몸을 그의 무릎 위에 얹으리
한 생의 무게를 젯상에 올리는
적멸한 예식에
온 세상 잠잠하리
그 사이 흐르는 눈물은
눈물의 끝까지 흘리리라
이윽고 작별하여
나의 지정석으로 되돌아올 때
가장 따뜻한 음악 하나가
동행하여 오고
이후
언제나 언제나 울리리라
◈ 하얀 새
누군가가 나에게
순백의 새를 보내 주었다
첫 날의 새는
편지처럼 정감 어려 노래했고
다음 날의 새는
날개에 묻혀 온 햇빛가루로
주변을 반짝이게 하더니
세 번째 새는 섧게 울어
하늘 그리워함을 일깨웠다
광활한 하늘 벌판으로
돌아가거라 돌아가거라고
새들을 날려 보내니
저들 중천에서 선회하다 사라지고
가슴 안 추억의 새들까지
희고 빛부시게 푸드득이노니
세월 너머
오래오래 이러하리니
◈ 작은 이쁜 이
전등 빛 그리도 기쁜가
날개짓 그리도 즐거운가
깨알보다 더 작은 날벌레들,
연필 끝으로 점 하나 찍은 심장
맥박 울리고
현미경에나 드러날
두 눈으로
하늘과 태양 모두 보았는가
하루뿐인 생애
유순히 지족하는가
하느님의 유전공학으로
축소된
아주 아주 예쁜 천사들인 게야
놀라운 니네는
◈ 자동차
작은 집입니다
지붕 실하여 비바람 막아주고
벽은 사방 유리입니다
구김 없이 펼쳐지는
두루마리 병풍 그림,
금단추 반짝이며
줄을 선 가로등,
우수와 고독의 안개 자욱한
대도시 한가운데
잠시 지금은
그대와 내가 이 집에 삽니다
기죽은 사람의 우수도
손잡고 함께 있습니다
후일 이 주소로
편지 쓰고 싶을 겝니다
◈ 성냥
성냥갑 속에서
너무 오래 불붙기를 기다리다
늙어버린 성냥개비들,
유황 바른 머리를
화약지에 확 그어
일순간의 맞불 한 번
그 환희로
화형도 겁 없이 환하게 환하게
몸 사루고 싶었음을
◈ 따뜻한 음악
바다 건너 더 먼 곳
그의 집으로 나는 가리
세월의 가룻발도 내릴 만큼은 내려
투명한 적설이 되었으리
그는 의자에 앉아 있고
어린 아이가 하듯이
내 몸을 그의 무릎 위에 얹으리
한 생의 무게를 젯상에 올리는
적멸한 예식에
온 세상 잠잠하리
그 사이 흐르는 눈물은
눈물의 끝까지 흘리리라
이윽고 작별하여
나의 지정석으로 되돌아올 때
가장 따뜻한 음악 하나가
동행하여 오고
이후
언제나 언제나 울리리라
◈ 고백
기어이 저질러 버렸구나
사랑의 고백 하나
산탄 되어 흩어졌느니
꽃 피어서 꽃 지듯이
후련히 절로 그리 되었느니
생의 이력서에
기록될
내 마지막 짝사랑이
이로서 완성되었다
◈ 노래 있기에
줄기 자라니 잎새 무성하리
가지 우거지면 새들 날아들리라
찰나에 사위는 반딧불이의 촉광도
빛이여 빛이여라 이름하느니
더디게 자라는 희망
손 끝에서 한참 먼 위안마저도
내게 노래 있기에
진실로 노래 있기에
나의 한 생을
과분한 분배로 받드노니
암암히 깊은 샘물
일렁이는 물무늬로
주야 사철 허리 아픈
나의 노래여
◈ 봄노래
1
좋은 옛친구 하나
땅 끝에서 살다가
서로의 백발 무렵에 돌아왔다
이 서름하고 신선한 감격
감추어두고
몹시 외로운 날
파도치게 하리
2
무쇠못 아니면서
언 땅 어이 뚫었나
신기루에 이슬 반짝임을 더한
연두빛 새순밭이네
갑자기 겁먹노니
혹여 불날까
마음의 산불 될까
3
말하려다 말고
웃으려다 말고
눈 감아
습습한 물안개에 적시우느니
천길 벼랑 밑에서
오랜 세월 디밀어 오른
마침내의 분수이어니
4
어느 명의가 나를 고치리요
그대 아니고선
그 누가 명의리요
◈ 평화
누구라도 그를 부르려면
속삭임으론 안 된다
자장가처럼 노래해도 안 된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평화여, 아니 더 크게
평화여, 천둥 울려야 한다
그 인격과 품위
그 아름다움
그가 만인의 연인인 점에서도
새 천년 이쪽저쪽의 최고인물인
평화여 평화여
부디 오십시오, 라고
사춘기의 순정으로
피멍 무릅쓰고 혼신으로 연호하며
그 이름 불러야 한다
◈ 십자로
「누굴 기다립니까 」「아닙니다 」
「길을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
「그럼 어디로든 걸어가세요 」
「네. 글쎄요 」
새하얀 종이새 날아와
내 손에 닿은 종이살결에
햇솔잎으로 그은
연두빛 사연 몇 줄 …
나는 답신을 써서 청명한 하늘 저편으로
익명의 편지를 날려보낸다
「기다림은 끝났습니다
길을 찾는 일도 마쳤습니다
이제 봄볕 속에 도착하여
가만히 서 있는 겁니다 」
◈ 시지프스 4
새천년 첫눈 오는 날도
그는 산에 오른다
솔기도 없는 거대한 눈덮개가
설산설원을 다독이고
천지가 승엄무량하다
그의 바위 안전하게 닿은 후
그가 산정에 올라선다
발자욱 하나 없는 천지개벽에
그의 바위만 옆에 있다
그에게
산행의 업고가 선고되던 날
그의 갈비뼈 하나
돌 속에 심어졌기에
그의 인기척 한번에도
바위는 귀하게 불을 밝히고
그가 원하면 언제라도
그의 산행을 따라 나선다
새천년 첫눈 오는 날
산상의 시지프스는
젊고 용맹하며 외롭지 않다
아내여 나의 아내여라고
감미롭게 고백하며
시린 돌 위의 눈을 쓸어준다
◈ 새 천년의 식탁
새천년에도
기도는 전날과 같으나이다
사랑의 누룩으로 부풀고
거룩한 불에 구워진 빵을
저희의 식탁에 허락하시되
저희 마음도 맛있는 빵이 되어
서로 나누게 하옵소서
새벽에 솟은 샘물에
이슬 한 켜 얹은 잔을
저희의 식탁에 허락하시되
저희 마음도 정갈한 식수되어
서로 대접하게 하옵소서
삼라만상, 보이는 것과
흐르는 시간, 안 보이는 것까지
피 순환하며 맥박 울리나이다
온누리 어른이시며
빵과 포도주의 주인께서
상머리에 함께 계심을
꿈처럼 어렴풋이 뵙게 하옵소서
◈ 사막
1
이리 심각한 사나이는
처음 본다
천지개벽 이래
하느님처럼 혼자 살아온
옹고집 독신남자
그 뻑신 남자의 기를
모랫바람에
스륵스륵 칼날 벼르며
스스로도 전율하다니
2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고요를
이에 뵈옵느니
초월과 영원성
그 상류층 혈통의 맏형님을
이에 뵈옵느니
순교 후에 또 순교하는
단두대와 이슬 내음의 기다림을
이에 뵈옵느니
◈ 베틀에 앉아
대문 밖에서
애들끼리 어울려 잘 놀다가
슬며시 혼자 집에 들어
엄마 얼굴 한 번 보곤
공연히 물마시고
웃으며 다시 나가 노는
옛 시절의 한국 아이 같은
얄궂은 도령 있어
늙으막 내 얼굴을
더러 꼭 보자 하네
봄 한철 베틀에 앉아
햇살에서 잣은 실로 비단을 짜서
내 몰골은 가려두고
옷 한 벌 지어 내밀까나
◈ 먼 전화
지도에서 못 찾을
서름한 먼 나라에서
걸려온 전화,
어서 돌아오세요라고 했더니
햇살 반 소낙비 반 같은
모순의 웃음소리가
전화 목소리 걸어오는 길가에
좌르르 깔린다
왜 웃느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라는 그 말이
행복해서라나 뭐라나
반 년만에 일 년만에
잊을만하면 걸려오는 전화
어서 돌아오세요라고 하면
그 말 한 번 듣는
천금 같은 재미 탓에
못 온다나 어쩐다나
◈ 허망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주마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두 깃발
하나의 깃발보다
둘의 깃발이 더 외롭고 심각하다
공중에 소슬히 당겨져
따뢰 묶였으면서
온몸으로 마주 펄럭이다니
옥양목 한 폭의 모세혈관이
올올이 거문고 울리는 게 분명해
노을을 가로지른 새떼가
진홍깃털 그림자 흘린 걸로
온 가슴 문신 그은 게 분명해
하나의 깃발보다
둘의 깃발이 더 아프고 숙연하다
저들이 사람을 닮았거나
사람이 저들을 닮은 게 분명해
◈ 그 여자
햇볕 쪼이는 푸성귀의 기쁨이
제일로 부러운 여자.
문고리 덜컹대지 않아도
한밤의 바람손님을 아는 여자.
마음에도 날개를 달아
고달파라 고달파라 날갯짓 쉬지 못하고
옛사람 옛산수와도 길을 터
저들에게 찻상 내미는 여자.
나막신 짚신 갈아 신으며
궂은 날 개인 날에 길 걷는 여자.
잉태와 해산이 제일의 장기라
그러자니 어느땐 광야에서
혼자 애 낳는 여자.
◈ 너를 위하여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것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내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사랑을 건넨 일도
잘못이 아닙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진정으로 사랑하여
가장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 보통 사람
성당 문 들어설 때
마음의 매무새 가다듬는 사람,
동트는 하늘 보며
잠잠히 인사하는 사람,
축구장 매표소 앞에서 온화하게
여러 시간 줄서는 사람,
단순한 호의에 감격하고
스쳐가는 희망에 가슴 설레며
행운은 의례히 자기 몫이 아닌 줄
여기는 사람,
울적한 신문기사엔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안경의 어룽을 닦는 사람,
한밤에 잠 깨면
심해 같은 어둠을 지켜보며
불우한 이웃들을 골똘히
근심하는 사람
◈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 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줌 뿌리면
솜털 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 겨울 꽃
1
눈길에 안고 온 꽃
눈을 털고 내밀어 주는 꽃
반은 얼음이면서
이거 뜨거워라
생명이여
언 살 갈피갈피
불씨 감추고
아프고 아리게
꽃빛 눈부시느니
2
겨우 안심이다
네 앞에 울게 됨으로
나 다시 사람이 되었어
줄기 잘리고
잎은 얼어 서걱 이면서
얼굴 가득 웃고 있는
겨울 꽃 앞에
오랫동안 잊었던
눈물 샘솟아
이제 나
또다시 사람되었어
◈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었던 새들이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오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그대 있음에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맘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사람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 물망초
기억해 주어요
부디 날 기억해 주어요
나야 이대로 못잊는 연보라의 물망초지만
혹시는 날 잊으려 바라시면은
유순히 편안스레 잊어라도 주어요
나야 언제나 못잊는 꽃 이름의 물망초지만
깜깜한 밤에 속 잎파리 피어나는
나무들의 기쁨
당신 그늘에 등불 없이 서 있어도
달밤 같은 위로
사람과 꽃이
영혼의 길을 트고 살았을 적엔
미소와 도취만이
큰배 같던 걸
당신이 간 후
바람결에 내버린 꽃 빛 연보라는
못잊어 넋을 우는
물망초지만
기억해 주어요
지금은 눈도 먼
물망초지만.
◈ 사랑
오래 잊히음과도 같은 병이었습니다
저녁 갈매기 바닷물 휘어적신 날개처럼
피로한 날들이 비늘처럼 돋아나는
북녘 창가에 내 알지 못할
이름의 아픔이던 것을
하루아침 하늘 떠받고 날아가는
한 쌍의 떼 기러기를 보았을 때
어쩌면 그렇게도 한없는 눈물이 흐르고
화살을 맞은 듯 갑자기 나는
나의 병 이름의 그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 사랑의 말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사랑한 이야기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 없는 물 위에
차갑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되리까만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 없는 누벌에
한 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여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 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다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 상사(想思)
언젠가 물어보리
기쁘거나 슬프거나
성한 날 병든 날에
꿈에도 생시에도
영혼의 철사 줄 윙윙 울리는
그대 생각,
천번만번 이상하여라
다른 이는 모르는
이 메아리
사시사철
내 한평생
骨髓에 電話오는
그대 음성,
언젠가 물어보리
죽기 전에 단 한번 물어보리
그대 혹시
나와 같았는지를
◈ 아가(雅歌) 2
나
네게로 가리
한사코 가리라
이슬에 씻은 빈손이어도 가리라
눈 멀어도 가리라
세월이 겹칠수록
푸르청청 물빛
이 한(恨)으로 가리라
네게로 가리
저승의 지아비를
내 살의 반을 찾으러
검은머리 올올이
혼령이 있어
그 혼의 하나하나 부르며 가리
나
네게로 가리
◈ 연하장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 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 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드린다.
◈ 허망(虛妄)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 놔두기도 한다
이런 이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검은 벽의 검은 꽂그림자 같은
어두운 香料(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에 특별하기로 역시 고독 때문에
어딘 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 때문에
때론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란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 울면서 눈감고 입술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 가을 햇볕에
보고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찟고 나오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되고
바람속에 몸을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만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겨울나무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리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 나의 시에게
이래도 괜찮은가
나의 시여
거뭇한 벽의 船窓(선창) 같은
벽거울의 이름
암청의 쓸쓸함, 괜찮은가
사물과 사람들
차례로 모습 비추고
거울 밑바닥에
혼령 데리고 가라앉으니
천만 근의 무게
아픈 거울 근육
견뎌내겠는가
남루한 여자 하나
그 명징의 살결 감히
어루만지며
부끄러워라 통회와 그리움
아리고 떫은 갖가지를
피와 呪言(주언)으로
제상 바쳐도
나의 시여
날마다 내 앞에 계시고
어느 훗날 최후의 그 한 사람
되어 주겠는가
◈ 너에게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 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 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 다시 봄에게
올해의 봄이여
너의 무대에서
배역이 없는 나는
내려가련다
더하여 올해의 봄이여
너에게 다른 연인이 생긴 일도
나는 알아 버렸어
애달픔 지고
순정 그 하나로
눈흘길 줄도 모르는
짝사랑의 습관이
옛 노예의 채찍자국처럼 남아
올해의 봄이여
너의 새순에
소금가루 뿌리러 오는
꽃샘눈 꽃샘추위를
중도에서 나는 만나
등에 업고
떠나고 지노니
◈ 雪日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지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산에 와서
우중 설악이
이마엔 구름의 띠를
가슴 아래론 안개를 둘렀네
할말을 마친 이들이
아렴풋 꿈속처럼
살결 맞대었구나
일찍이
이름을 버린
무명용사나
무명성인들 같은
나무들,
바위들,
청산에 살아
이름도 잊은 이들이
빗속에 벗은 몸 그대로
편안하여라
따뜻하여라
사람이 죽으면
산에 와 안기는 까닭을
오늘에 알겠네
◈ 산에 이르러
누가 여기 함께 왔는가
누가 나를 목메이게 하는가
솔바람에 목욕하는
숲과 들판
앞가슴 못다 여민 연봉들을
운무雲霧 옷자락에 설풋 안으신
한 어른을
대죄待罪하듯 황공히 뵈옵느니
지하地下의 돌들과 뿌리들이
이 분으로 하여 강녕康寧하고
땅 속에 잠든 이들
이 분으로 하여 안식하느니라고
아아 누가 나에게
오늘 새삼
이런 광명한 말씀 들려주는가
산의 안 보이는 그 밑의 산을
두 팔에 안고 계신
절대의 한 어른을
누가 처음으로
묵상하게 해주시는가
◈ 산에게 나무에게
산은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산을 찾아갔네
나무도 내게 올 수 없어
내가 나무 곁에 섰었네
산과 나무들과 내가
친해진 이야기
산은 거기에 두고
내가 산을 내려왔네
내가 나무를 떠나왔네
그들은 주인자리에
나는 바람 같은 몸
산과 나무들과 내가
이별한 이야기
◈ 상심수첩
1
먼 바다로
떠나는 마음 알겠다
깊은 산 깊은 고을
홀로 찾아드는 이의 마음 알겠다
사람세상 소식 들으려
그 먼길 되짚어
다시 오는 그 마음도 알겠다
2
울며 난타하며
종을 치는 사람아
종소리 맑디맑게
아홉 하늘 울리려면
몇 천 몇 만 번을
사람이 울고
종도 소리 질러야 하는가
3
층계를 올라간다
한없이 올라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층계를 내겨간다
한없이 내려와 끝에 이르면
구름 같은 어둠.
이로써 깨닫노니
층계의 위아래는
같은 것이구나
4
병이 손님인양 왔다
오랜만이라며 들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커다란 책을 펴들고 그 안에 쓰인 글시,
세상의 물정들을 보여준다
한 모금씩 마시는 얼음냉수처럼
천천히 추위를 되뇌이며 구경한다
눈물 흐르는 일이 묘하게 감미롭다
5
굶주린 자 밥의 참뜻을 알듯이
잃은 자 잃은 것의 존귀함을 안다
신산에서 뽑아내는
꿀의 음미를.
이별이여
남은 진실 그 모두를
바다 깊이 가라앉히는 일이여
6
기도란
사람의 진실 하늘에 바침이요
저희의 진실 오늘은 어둠이니
이 어둠 바치나이다
은총은
하늘의 것을 사람에게 주심이니
하늘나라 넘치는 것
오늘 혹시 어둠이시면
어둠 더욱 내려주소서
7
전신이 감전대인 여자
바람에서도 공기에서도
전류 흘러 못견디는 여자
겨울벌판에서도 허공에서도
와아와아 몸서리치며 다가오는
포옹의 팔들. 팔들
8
그를 잃게 된다
누구도 못바꿀 순서란다
다른 일은 붙박이로 서 있고
이 일만 바람갈기 날리며 온다
저만치에,
바로 눈 앞에.
지금,
아아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9
제 기도를 진흙에 버리신 일
용서해 드립니다
그간에 주신 모든 용서를 감사드리며
황송하오나 오늘은 제가
신이신 당신을 용서해 드립니다
아아 잘못하실 수가 없는 분의 잘못
죄의 반란 같은 것이여
전심전령이 기도 헛되어
하늘은 닫히고
사람은 이런 때 울지 않는다
10
아슴한 옛날부터
줄곧 걸어와
마침내 오늘 여기 닿았습니다
더는 갈 곳이 없는
더는 아무 일도 생기잖을
마지막 땅에
즉 온전한 목마름에
◈ 새 달력 첫 날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그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 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니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 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 못낼
사랑과 인내
먼 소망과
인동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날에 바친다
◈ 새
새는 가련함 아니여도
새는 찬란한 깃털 어니여도
새는 노래 아니여도
무수히 시로 읊어짐 아니여도
심지어
신의 신비한 촛불
따스한 맥박 아니여도
탱크만치 육중하거나
흉물이거나
무개성하거나
적개심을 유발하거나 하여간에
절대의 한 순간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 오른다면
이로써 완벽한 새요
여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새로운 공부
마술을 배울까나
거미줄 사이로
하얗게 늙은 호롱불,
욕탕만한 가마솥에
먹물 한 솥을 설설 끓이며
뭔가 아직도 모자라서
이상한 약초 몇 가지 더 넣으며
혼 내줄 사람과
도와줄 이를
따로이 가슴서랍에 챙겨 잠그고
빗소리보다 습습하게
주문을 외는
동화속의 마술할머니
마술을 배울까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먹물 가마솥에
좋은 풀도 많이 넣는
마술 할머니
내가 그녀의 제자 되어
새로운 공부에 열중해 볼까나
유년의 날
써커스의 말 탄 소녀를 본후
온세상 노을뿐이던
흥분과 부러움을
적막한 이 세월에
되돌려 올까나
마술을 배울까나
◈ 새벽 외출
영원에서 영원까지
누리의 나그네신 분
간밤 추운 잠을
십자가 형틀에서 채우시고
희부연 여명엔
못과 가시관을 풀어
새날의 나그네길 떠나가시네
이천 년 하루같이
새벽 외출
외톨이 과객으로 다니시며
세상의 황량함
품어 뎁히시고
울음과 사랑으로
가슴 거듭 찢기시며
깊은 밤
십자가 위에 돌아오시어
엷은 잠 청하시느니
아아 송구한 내 사랑은
어이 풀까나
이 새벽에도
빙설의 지평 위를
청솔바람 소리로 넘어가시는
주의 발소리
뇌수에 울려 들리네
◈ 새벽에
나의 고통은
성숙하기도 전에
풍화부터 하는가
간밤엔
눈물 없이 잠들어
평온한 새벽을 이에 맞노니
연민할지어다
나의 몰골이여
다른 사람들은
고난으로
새 삶의 효모와 바꾸고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맨몸 으깨어
피와 땀으로 참회하고
준열히 진실에 순절하되
목숨 질겨서
그 몇 번 살아남는 것을
나의 고통은
절상 순간에
이미 얼얼하게 졸면서
죄와 가책에도
아프면서 졸면서
결국엔
지난밤도 백치처럼 잠들어
청명한 이 새벽에
죽고 싶도록
남루할 뿐이노니
◈ 새벽전등
간밤에 잠자지 못한 이와
아주 조금 잠을 잔 이들이
새소리보다 먼저 부스럭거리며
새벽전등을 켠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
불면의 도랑은 비릿하게
더 깊은 골로 패이고
이제 집집마다
눈물겨운 광명이 비추일 것이나
미소 짓는 자, 많지 못하리라
여명黎明에 피어나는 태극기들,
독립 반세기라 한 달 간
태극기를 내걸자는 약속에
백오십 만 실직 가정도
이리했으려니와
희망과의 악수인 건 아니다
참으로 누구의 생명이
이 많은 이를 살게 할 것이며
누구의 영혼이
이들을 의연毅然하게 할 것이며
그 누가 십자가에 못박히겠는가
심각한 시절이여
잠을 설친 이들이 새벽전등을 켠다
◈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먼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이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은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소녀를 위하여
그가 네 영혼을 부른다면
음성 그 아니,
손짓 그 아니어도
들을 수 있으리
그가 네 이름의 글씨 쓴다면
생시 그 아니,
꿈속 그 아니어도
온 마음으로 읽으리
그가 너를 찾을 땐
태어나기 전
다른 별에서
항시 함께 있던 습관
예까지 묻어온 메아리려니
그가 너를 부른다
지금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라
◈ 송(頌)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枕上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걸
그저
온 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 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 오늘
1
눈 오늘 강물을 바라본다
어렴풋한 꿈속이듯 오랫동안
내 이렇게 있었다
오늘은 당신에게 줄 말이 없다
다만 당신의 침묵과 한 가지 뜻의 묵언(默言)이
내게 머물도록 빌 뿐이다
2
오늘 내 영혼을 당신에게 연다
마지막인 허락은
이래야만 함인 줄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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