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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도종환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6. 1. 14.

 

 

도종환 시 모음

 

 

가을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겨울 골짜기에서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 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사랑의 길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 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 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 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벚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벗 하나 있었으면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 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흙 속에서도 다시 먼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 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 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다시 떠나는 날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갯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당신과 가는 길

 

별빛이 쓸고 가는 먼 길을 걸어 당신께 갑니다.

모든 것을 다 거두어간 벌판이 되어

길의 끝에서 몇 번이고 빈 몸으로 넘어질 때

풀뿌리 하나로 내 안을 뚫고 오는

당신께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 땅의 일로 가슴을 아파할 때

별빛으로 또렷이 내 위에 떠서 눈을 깜빡이는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동짓달 개울물 소리가 또랑또랑 살얼음 녹이며 들려오고

구름 사이로 당신은 보입니다.

바람도 없이 구름은 흐르고

떠나간 것들 다시 오지 않아도

내 가는 길 앞에 이렇게 당신은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가는 길은 얼마나 좋습니까

 

 

 

이별

 

당신이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별은 떠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떠난 뒤의 길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일구다 만 텃밭을

오늘도 홀로 갈다 돌아옵니다

저물어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돌아오면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비록 내 곁을 떠나 있어도

떠나가던 때의 뒷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가다가 가끔은 들풀 사이에서 뒤돌아보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가도

이 세상이 다 저물기 전의 어느 저녁

그 길던 시간은 당신으로 인해

한 순간에 메꾸어 질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접시꽃 당신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꽃잎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내가 외로워서가 아니다.

피었다 저 혼자 지는 오늘 흙에 누운 저 꽃잎 때문도 아니다.

형언할 수 없는 형언 할 수 없는

시작도 아지 못할 곳에서 와서

끝 모르게 흘러가는 존재의 저 외로운 나부낌

아득하고 아득하여

 

 

 

비 내리는 밤

 

빗방울은 장에 와 흐득이고 마음은 찬 허공에 흐득인다

바위 벼랑에 숨어서 젖은 몸으로 홀로 앓는 물새마냥

이레가 멀다하고 잔병으로 눕는 날이 잦아진다.

 

별마다 모조리 씻겨 내려가고 없는 밤 천리 만길 먼 길에 있다가

한 뼘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는 저승을 빗발이 가득 메운다.

 

 

 

깊은 물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기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든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것을 안다.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 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를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잘라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나는 그저 가죽나무일 뿐이기 때문이다.

 

 

 

먼발치서 당신을

 

처음엔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 뒤편에서

당신 모습 바라보다 돌아왔습니다

사람들 틈에 쌓여 있는 당신 모습이

전보다 더 야위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가서

내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내 보이기 부끄러운 것일까요

혼자 맘으론 당신이 내 목소리를 잊지 않고

계시리라 생각하곤 하면서

이렇게

다시 천천히 되돌아 걸어오곤 하는 것인지요

돌아오는 길에 먼 어둠 속에서

불빛 두어 개 반짝이는 걸 보았습니다.

별 몇 개 그 위에 희미하게 떠서

내가 생각하는

당신 마음처럼 반짝이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왜 당신 앞에

가까이 나서기가 부끄러운 것인지요

처음엔 당신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자꾸만

당신 앞에 떳떳하지 못하여

나 혼자만 생각하는 당신 향한

이 마음을 그리움이라 말하고

당신이 기쁘게 나를 알아보실 때까지

내가 몰래 보내는

나의 이 작은 목소리를

다만 기다림이라고 달래보면서

살고 있는 걸까요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 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먼 길

 

하늘엔 별도 없고

대추나무 잎마다 달빛만 흩어지는데

끝도 없이 먼 어둠을 건너는 구름

밤을 새워 풀그늘에 벌레는 울고

이 땅의 길들도 모두 저물어

저마다 쓰러져 깊게 누운 날

걸어온 길도 걸어갈 길도

어쩌면 어쩌면 이리 아득해

몇 번이고 홀로 불을 켜고 앉아서

꺼지고 넘어지는 불씨를 안고

고요히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함께 먼 길 가자던 그리운 사람.

 

 

 

눈 내리는 길

 

당신이 없다면 별도 흐린 이 밤을

내 어이 홀로 갑니까

눈보라가 지나가다 멈추고 다시 달려드는 이 길을

당신이 없다면 내 어찌 홀로 갑니까

가야 할 아득히 먼 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번져오는 기진한 육신을 끌고

유리알처럼 미끄러운 이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져도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한

이 길을 함께 가지 않으면 어이 갑니까

스쳐지나가는 많은 사람중에

당신이 함께 있어서 내가 갑니다

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당신이 그 눈발을 벗겨주어

눈물이 소금이 되어 다시는 얼어붙지 않는 이 길

당신과 함께라면 바람과도 가는 길

당신돠 함께라면 빗줄기와도 가는 길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혼미하여 뒹굴다가도

머리칼에 붙은 눈싸락만도 못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이 항상 함께 있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도 갑니다

눈보라가 치다가 그치고 다시 퍼붓는 이 길을

당신이 있어서 지금은 홀로도 갑니다

 

 

 

나무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 난 나무들은 아름답다

밤새 제 눈물로 제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람처럼

슬픔 속에 고요하다

바람과 눈보라를 안고 서 있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고통으로 제 살에 다가오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꿀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잔가지만큼 넓게 넓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답다

허욕과 먼지 많은 세상을

견결히 지키고 서 있어 더욱 빛난다

무성한 이파리와 어여쁜 꽃을 가졌던

겨울나무는 아름답다

모든 것을 버리고나도

결코 가난하지 않은 자세를 그는 안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은 아름답다

오랜 세월 인간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해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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