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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신동엽(申東曄)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6. 1. 16.

 

 

신동엽(申東曄) - 1930~ 1969

1930~1969. 충남 부여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당선

1961.~ 명성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 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너에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사람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순 돋듯

 

허구많은 자연 중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4월은 갈아엎는 달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러넣고 있을

,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山川은 껍찔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四月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祖國에도

어느 먼 心低,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東學의 함성,

光化門서 목 터진 四月勝利.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享樂不夜城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은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일어서는 달.

 

 

 

석양 대통령) -산문-

 

스칸디나비아이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을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악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씰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고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환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엘 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에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 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一生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永遠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畏敬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아니오

 

아니오

미워한 적 없어요,

산 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했을 리야.

 

아니오

괴뤄한 적 없어요,

능선 위

바람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 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차마, 옷 입은 도시계집 사랑했을 리야.

 

 

 

水雲이 말하기를

 

水雲이 말하기를

슬기로운 가슴은 노래하리라

맨발로 삼천리 누비며

감꽃 피는 마을

원추리 피는 산 길

맨주먹 맨발로

밀알을 심으리라

 

水雲이 말하기를

하눌님은 콩밭과 가난

땀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

 

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

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

쓰레기 줍는 소년

아프리카 매 맞으며

노동하는 검둥이 아이

 

오늘의 논밭 속에 심궈진

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 하눌님이어라

 

水雲이 말하기를

강아지를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개에 의해

銀行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은행에 의해

 

미움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미움에 의해 멸망하리니

총 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으리라

 

水雲이 말하기를

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

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

한반도의 미움이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

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

 

水雲이 말하기를

한반도에서는

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

 

 

 

종로 5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고향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버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그의 행복을 기도드리는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을 일일께며

 

 

 

꽃 대가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두드리면

먼 상고까장 울린다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삼한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보았으리.

 

 

 

너는 모르리라

 

너는 모르리라

그 날 내 왜

넋나간 사람처럼 고가(古家)

서 있었던가를

 

너는 모르리라

진달래 피면 내 영혼 속에

미치는 두 마리

짐승의 울음

 

너는 모르리라

산을 열 굽이 넘고도

소경처럼 너만을 구심(求心)하는

해와 동굴과 내 사랑

 

너는 모르리라

문명된 하늘 아래 손 넣고 광화문 뒷거리 걸으며

내 왜 역사 없다

벌레 삥··· 니까렸는가를

 

하여

넌 무덤 속 가서도 모를 것이다

너 안 보는 자리서

찬 돌 쓸어안으며

그 숱한 날 얼마나 통곡했는가

 

그리하여

넌 할미꽃 밑에서도 모를 것이다

그 날 왜 내

눈물먹은 네 진주에 손대지

안했는가를.

그리고 그것은 몰라야 쓴다.

 

 

 

너의 무덤에서

 

온 종일

한가한 공동묘지엔

흔건히 지쳐

해가 딩굴다

 

함부로 갈큇발이

헤비고 간

가난한 애장 우에

계절은 땀을 흘리며

거기 나물 뜯던 언덕을

아련히 기어가는 하오(下午).

 

각시풀 다듬던 연한

너의 뼈마디는

지층을 적시며

오늘도 산화(酸化)하는가...

().

 

()

밤마다 새푸랗니

놀래였나

지표가 구겨졌다.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하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 속에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풍경

바라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물결

양털 같은 세월 위서

너는 노래하고 있었다.

 

죄없는 사람

가로수 밑 걸으며

또각또각 구둣소리

눈녹아 하늘로 번질 때

 

하늘은 바람

대지 위 고요

 

노래하고 있었다.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들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로수 위

구름 위

보이지 않는 영화로운

미래로의 소리로,

 

거대한 신은

소맷깃 뿌리며

부처님 같은 얼굴로

 

내 괴로움 위서

노래하고 있었다.

 

 

 

눈 날리는 날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 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산막(山幕) 뒤꼍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 아홉 굽이 넘어

(),

한은 쫓기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트렁크 끌르며

쉐탈 갈아입던 여인

 

 

 

눈동자

 

묻지 말고 이대로 보내 주옵소서

잊어버리고만 싶은 눈동자여

 

말곳 하면, 잘못

꿈 깨어져 버릴

깨끗한 얼굴

 

눈물 감추우며

제발 이대로 돌아가게

못 본 척 해주소서

 

내 목숨 다 주고도

떠나기 싫은 눈동자여.

 

 

 

단풍아 산천

 

즐거웁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뒤집혔어도

즐거웁게 가을은 돌아오고 있었지

 

여보세요

신령님

말씀해 주세요

 

산과 난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그리고 그인

나와 인연이 있을까요

 

흐들갑스레 단풍은 피어나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둔갑 떨었어도

단풍은 내 산천 물들여 울었지

 

보세요

상천(上天)계신 한울님

만날 수 있을까요

()으로 깎을

출렁일 가슴

 

보세요

새 배타고

목성(木星)에나 가면

우린 이 지구사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피 터지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한반도 대관령 주막집에서

입 가리고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지

 

 

 

둥구나무

 

뿌리 늘인

나는 둥구나무.

 

남쪽 산 북쪽 고을

빨아들여서

좌정한

힘겨운 나는 둥구나무

다리 뻗은 밑으로

흰 길이 나고

동쪽 마을 서쪽 도시

등 갈린 전지(戰地)

 

바위도 무쇠고

투구고 증오고

빨아들여 한 솥밥

수액만드는

나는 둥구나무

 

 

 

마려운 사람들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 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 땅 살만큼의 돈만큼만

깔겨 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미쳤던

 

스카아트 밑으로

강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여인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오뇌(懊惱)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천재는 흰 구원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 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별 밭에

 

바람이 불어요

눈보라 치어요 강 건너선.

 

우리들의 마을

지금 한창

꽃다운 합창연습 숨 높아가고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요.

안개가 흘러요 우리의 발 밑.

 

양달진 마당에선

지금 한창 새날의 신화 화창히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요.

 

노래가 흘러요

입술이 빛나요 우리의 강기슭.

 

별 밭에선 지금 한창

영겁으로 문 열린 치렁 사랑이

빛나는 등불 마냥

오손도손 이야기되며 있는데요.

 

 

 

보리 밭

 

,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버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쩍 사냥 다니던

태백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있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 몸 채, 뙤약볕 아래

서해바다로 들어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

 

 

 

봄은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봄의 소식(消息)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불바다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신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으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안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 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 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 인간정신 미()

지고(至高)한 빛.

 

 

 

사랑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북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처럼 깡똥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 오너라

 

()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으로

 

 

 

사랑의 고정

 

사랑의 고정(苦情)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답니까?

말슴 마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도

겉으로 웃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거랍니다.

 

천지신명이 대자연에 밝으니

나는 아무델 가나

알머리처럼 따가워라.

 

너의 방에선 너의 보금자리 남새가 난다.

 

자신(自信)이 흔들리는 지라

자꾸

역확인(逆確認)을 얻으려고

 

<자신 있느니라고>

강조해 보는 것이리라.

 

()을 두고의 순수한 상모(想慕)가 아니다.

어느 누구의 것과 비교하기 위한

빌미로써의 석().

또는 그것에 반동적으로 대립하기 위한

방패로써의 석().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살덩이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 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감았지만

 

너를 움직이는 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 알몸

 

물건 없는 산

소나무 곁을

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

 

, 작별한 냄새여

살덩이가

지금 저 산을

내려가고 있고야

 

 

 

삼월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들이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歷史)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高層)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兄弟)들은

광화문(光化門) 창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公園)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大使館)

걸어가는 행렬(行列)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東學)이여, 동학(東學)이여

금강(錦江)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야산(野山)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새로 열리는 땅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 못 미쳐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처럼

역사는 철 철 흘러가 버린다.

 

피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넘으면

정전지구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 거니노라면

초연 걷힌 밭 두덕 가

새벽 열려라.

 

 

 

새해 새 아침은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하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序詩(서시)

 

아담한 산들 드믓 드믓

맥을 끊지 않고 오간

서해안 들녘에 봄이 온다는 것

것은 생각만 해도, 그대로

가슴 울렁여 오는 일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또 가을

가을이 가면 겨울을 맞아 오고

겨울이 풀리면 다시 또

.

 

농삿군의 아들로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고웁게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딀 때 걷워딀 듯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 짤랑

꽃가마 타 보고

환갑 잔치엔 아들딸 큰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조용히 묻혀가도록 내 버려나

주었던들

 

, 가욋말일찌나, 그러한 세월

복 많은 歌人(가인)이 있어

(蜂蝶風月(봉접풍월)을 노래하고

장미에 찔린 애타는 연심을 읊조리며

수사학이 어떠니 표현주의가 어떠니

한단들 나 역 모르는 분수대로

그 장단에 맞추어 어깨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탄에 맞은 사람

태백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 제비 돌아와 흙 묻어 나르면

솟아오는 슬픔이란 묘지에 가 있는

누나의 생각일까.....?

 

산이랑 들이랑 강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머지 않아 나는 아주

죽히우러 가야만 할 사람이라는

것이라.

 

잘 있으라.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구름이 끼던

두번 다시 상기하기 싫은

人種(인종)의 늦장마철이여

 

이러한 노래 나로 하여

처음이며 마즈막이게 하라

진창을 노래하여 그 진창과 함께

멸망해 버려야 할 사람이

앞과 뒤를 헤쳐 세상에

꼭 하나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두고 두고, 착한 인간의 후손들이여

 

이 자리에 가는 길

서낭당 돌을 던져

 

구데기.

그런 역사와 함께 멸망한 나의

무덤, 침 한번 더 뱉고

다시 보지 말아져라.

 

 

 

어느 해의 유언

 

그리 대단한 거

못되더군요

 

꽃이 핀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맑은 바람을

마셨어요

 

모여 온 모습들이 곱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군요

 

없어져

도리하며

살아보겠어요

 

맑은 바람은 얼마나 편안할까요.

 

 

 

여름 이야기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달린

황토 언덕

젯트편대가

강을 울리면

배꼽 내논 아해들은

풀뿌리 씹으며

구경을 하고.

 

(), ()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 넌출 고을엔

수평 멀리

함성소리만

불 질려 오른다.

 

꽃신 놓인 토방

놋거울은 닳고,

콩밭 매는 뒷곁

황진이 숲속선

땅 즐겁게

멍석 딸기가

익고 있었다.

 

 

 

여자의 삶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섣달그믐

그리고 석양

발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 너머

날리는데

 

해안선

모래밭 따라

여인 하나 콧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지

 

고개는 숙이고

사각 사각, 모래밭 밟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콧노래.

조용히 날리는

옷고름.

 

파도소리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고

 

겨울도

도시도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고

 

다수운 피만

흰 볼기따라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고루고루

흐르고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며

그녀의 귀밑머린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무엇을 노래하며

그녀의 두 젖무덤은

저고리 안섶에서

물결치고 있었을까.

 

무엇을 기원하며

그녀의 눈동잔

겨울 하늘 아래 수밀도처럼

드리워져 있었을까.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려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 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좀더 가까이, 이리 좀 와 보세요

안 되겠어요, 당신 눈은 살기.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은 우둔, 당신 입은 모략,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또 당신은,

피가 화폐냄새로 가득 차 있군요.

 

안 되겠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긴 목덜미

비가 내리고 있어지, 그녀의 가는 허리 아래

비가 내리고 있었지

구렁이처럼 흐느적치던 긴 네 다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그 깊은 정상 위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지리산 산정 꽃밭 위에도

너는 서 있었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경부선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미국으로 서독으로 품팔이 떠나던

내 소녀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얼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

 

여자는

.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나리는 물.

 

여자는

.

갈대가 아니라, .

있을 것이 없는 자리에 자기를 적응시켜

있을 것으로 충만시켜 주는,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은

.

 

겁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의 알몸은

평화.

 

껍질이여

여인을 질식시키고 있는

껍질이여,

네가 하나의 사내를 사유하고 싶어 할 때

불행은 네 발 밑에 허당을 판다.

네가,

네가

자연 속 보물들을 자기 코걸이 귀걸이로 사유하려 할 때

세상의 발 밑은 구더기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흐려지면

사내들은, 전쟁을 장사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맑으면

사내들은, 구도하는

성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러 낸 토양이여

, 여자.

석가모니를 길러 낸 우주여

, 여자

모든 신의 뿌리 늘임을

너그러이 기다리는 대지여

, 여성

 

마을마다

빠알간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

그 도시로 가는 길가에서

나는 보았지

고개마다

옥바라지 봇짐, 그 옷보자기 속에서

나는 보았지.

 

남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것이었을까

누럭누럭 기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

못쓰게 된 꼬마들 옷조각으로 기운

다스운 속 내의.

 

그리고 나는 보았지

그녀가 쉬었다 일어서면서

허리띠 조르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지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쉐타 안섶에

꽂혀있던

한 권의 문화사개론 책.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화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그리고 나는 보았지

진달래는 피는데

벌거벗은 산과 들

가마니 속에

솔방울 고지배기 따 이고

한 손으론 흐르는 젖 싸안으며

맨발 길 삼십리

울렁이며 뛰던

아낙네의 종아리.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함박눈은 산과 도시

여인의 호수 위 펑펑

쏟아져 오는데

 

고궁 담 모퉁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두 손을 깍지 싸

높은 가슴 위에 얹고

눈은 수밀도처럼 내리깐 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 부르며

 

고궁 길 돌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

 

버스에 오르면 흔들리는 재미에

하루를 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먹먹한 가슴 굳어만 갈 뿐

나타나줄 것같은

비가 내리는

어둔 저녁에도

너는 없었다.

대폿집 앞에 서면

부서지고 싶은 대가리

대가리를 흔들면서

전찻길을 건넌다.

 

댕그랑 땡

미친 가슴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지는

통쾌한 중량의 동전잎

버스에 오르면 울고 싶은 재미에

하루를 산다.

너는 말할 것이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그러면서도

너는 내 눈을 지켜보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비는 내리는데

숙명처럼

나는 널 생각하고

고뇌의 심연에

빠져 버둥이는

내 눈을 너는

연민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떠나라,

아니면 함께 빠져주든가.

가로수에 잎이 트면

그리고 보리 이랑이

강과 마을을 물들이면

나는 떠나갈 것이다.

 

 

 

완충지대(緩衝地帶)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이켠서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 건지다 보면

밑둥 긴 목포처럼

역사는 철철 흘러가 버린다.

 

피 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 넘으면

완충지대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硝煙) 걷힌 밭두덕가

풍장 울려라.

 

 

 

이곳은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대양 중 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 치고 깃발은 돌아간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콩나물 역사.

아침 햇살 속 오간 수만 화살. 날아간 물체들의

흐느낌은 정()한 문, 지평(地平)의 밖이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바닷가선 비묻은 구름 용을 싣고 찬란하게

찌들어오리니

급기야 홍수는 오고,

구렝이, 모자, 톱니 쏠린 공장 헤엄쳐 나가면

 

조상도 없이 옛 마을터엔 훵훵 오갈 헛바람.

쓸쓸하여도 이곳은 점령하라. 바위 그늘 밑, 맨 마음채

여문 코스모스씨 한톨. 억만년 퍼붓는 허공밭에서

턱 가래 안창엔 심그라.

사람은 비어 있다.

대지는

한가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이리 와 보세요

 

이리 와 보세요

당신 눈에 살색(殺色)이 도는군요.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엔 우둔이

당신 입엔 시의(猜疑)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 와 보세요

당신은 교만한 종자야요

, 당신은

피가 병균으로 차 있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눈이 순정과 지혜로

맑게 빛나고

너그럽고 슬기로운

토양에서 자란

맘과 몸이 착실한

사내의 씨.

 

그리고, 마음과 힘을 쏟아

정성껏

나의 몸에 씨를 심거줄 사내.

 

 

조국(祖國)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굿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 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좋은 언어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 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진달래 산천(山川)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꾳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의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아 튀는 산 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초가을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궤상(机上)

초가을 금풍(金風)

살며시

선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맥인

광목 날

앉아 있었다.

 

,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 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의 지붕 밑,

오는 것인가

 

 

 

풍경(風景)

 

쉬고 있을 것이다.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쉬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화창한

도오꾜 교외 논둑길을

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

이국 병사는

걷고.

 

히말라야 산록

토막가 서성거리는 초병은

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

하루삔 땅 두고 온 눈동자를

회상코 있을 것이다.

 

순이가 빨아 준 와이사쓰를 입고

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

오늘 밤, 사해(死海)가의

이스라엘 선술집서,

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

팁을 주고.

 

아시아와 유우럽

이곳저곳에서

탱크 부대는 지금

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 핀,

지중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엔,

온 종일, 상륙용 보오트가

나자빠져 딩굴고.

 

흰 구름, 하늘

젯트 수송편대가

해협을 건느면,

빨래 널린 마을

맨발 벗은 아해들은

쏟아져 나와 구경을 하고.

 

동방으로 가는

부우연 수송로 가엔,

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

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

팔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오늘,

동방대륙에서

서방대륙에로

산과 사막을 뚫어

굵은 송유관은

달리고 있다.

 

노오란 무꽃 핀

지리산 마을.

무너진 헛간엔

할멈이 쓰러져 조을고

 

평야의 가슴 너머로.

고원의 하늘 바다로.

원생의 유전지대로.

모여 간 탱크 부대는

지금, 궁리하며

 

고비 사막,

빠알간 꽃 핀 흑인촌

해 저문 순이네 대륙

부우연 수송로 가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촌 아가씨들이

빨래하며,

아심 아심 살고

있을 것이다.

 

 

 

한마음

 

한 마음 가엽서라

돛도

삳도 없이

 

오날은 어델 흘러가나뇨

 

온 길을 돌아갈 수 없음이여.

유리창 넘어로 보히는

만지기 영 틀린

없어진 탑이여.

 

한 마음

가엽서라

나약한 사람 우에서

살아가는 

 

가다가 슬어질

가난한 마음이여.

 

 

 

五月(오월)의 눈동자

 

지금 난 너를 보고 있지 않노라.

훈풍 나부끼던 머리칼

오월의 푸라타나스 가로(街路) 저 멀리

두고 온 보리밭 어덕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바람이 기어드는 가슴

나뭇잎 피는 산등성에 서서

술익는 마당

두고 온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남해바다 멀리

한번도 나의 울 안에

춤춰본 적 없는

푸른 빛 희열에 찬 생의 향기를

그윽한 새 잎에 받들어

나는 지금 마셔 주고 있노라,

온 마음 밭으로 깊이깊이 들여마셔 주고 있는 것이노라.

 

지금 난 너의 눈동자를 보고 있지 않노라.

지나온 하늘

草綠庭園(초록정원)에 딩굴던

태양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학창시절의 호밀밭 전쟁이 뭉개고 간 꽃잎의 촉촉한 밤하늘을

회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훈풍에 날리던 머리칼

山頂(산정)을 돌아 오르면

온 세계의 아름다웠던

천만가지 머언 오월의 향기를

나의 피알 속에

상기 살아있는 피 한 방울 감격 속에서

이렇게 새 잎 타고 불어오는 바람 언덕에 서서

오늘도 내일도 그제도

머리다발 날리며

마셔보고만 싶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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