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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未堂 서정주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6. 1. 12.

 

 

未堂 서정주 시 모음



▒ 동천(冬天) ▒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황혼길 ▒

새우마냥 허리 오구리고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 잠이나 들까

구비구비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넘어
골골이 뻗히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역구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또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옛비슥히 비기어 누어
나도 인제는 잠이나 잘까



▒ 귀촉도(歸蜀途) ▒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어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銀粧刀)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국화 옆에서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학(鶴) ▒

천 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鶴)이 나른다.

천 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닥 거리던 날개가
또 한 번 천애(天涯)에 맞부딪노나

山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忿怒)가
초목(草木)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서니
보라  옥빛 꼭두서니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을 보자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틀 속에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울음은 해일(海溢) 아니면
크나큰 제사(祭祀)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 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쭉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땐들 골라 못 추랴
긴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나른다.



▒ 푸르른 날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입맞춤 ▒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석류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산 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리씩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러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달드라....



▒ 내 늙은 아내 ▒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 견우의 노래 ▒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 갔다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엇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모란 그늘의 돌 ▒

저녁 술참
모란 그늘
돗자리에 선잠 깨니
바다에 밀물
어느새 턱 아래 밀려와서
가고 말자고
그 떫은 꼬투리를 흔들고,
내가 들다가
놓아 둔 돌
들다가 무거워 놓아 둔 돌
마저 들어 올리고
가겠다고
나는 머리를 가로 젓고 있나니,



▒ 질마재의 노래 ▒

세상 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 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위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도라지꽃 모양으로 가서 살리요?
칡넌출 뻗어가듯 가서 살리요?
솔바람에 이 숨결도 포개어 살다
질마재 그 하늘에 푸르를리요?



▒ 쑥국새 타령 ▒

애초부터 천국의 사랑으로서
사랑하여 사랑한 건 아니었었다
그냥 그냥 네 속에 담기어 있는
그냥 그냥 네몸에 실리어 있는
네 천국이 그리워 절도했던 건
아는사람 누구나 다 아는일이다
아내야 아내야 내 달아난 아내
쑥국보단 천국이 더 좋은줄도
젖먹이가 나보단 널 더 닮은줄도
어째서 모르겠나 두루 잘 안다
그러니 딸꾹 울음하고 있다가
딸꾹질로 바스라져 가루가 되어
날다가 또 네 근방 달라붙거든
예살던 정분으로 너무 털지말고서
하팔담상팔담서 옛날하던 그대로
또 한 번 그 어디만큼 묻어있게 해다오



▒ 신부(新婦)

신부(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新郞)하고 첫날밤은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내 아내 ▒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삼천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襤褸)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 신록 ▒

어이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다시 돋아나
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고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사향 방초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배암!



▒ 사랑한다는 말은 ▒

사랑한다는 말은
기다란다는 말인 줄 알았다.

가장 절망적일 때 떠오른 얼굴
그 기다림으로 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었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그대 곁에 있는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았다.

그래도 세월을 살아가는 한 방황자인 걸
내 슬픔 속에서 알았다.

스스로 와 부딪치는 삶의 무게에
그렇게 고통스러워 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대를 무지개로 그려두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갈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나로 인한 그대 고통들이 아프다.
더 이상 깨어질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돌아설 수 있었다.


[未堂/서정주 님]
생애 :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 - 2000년 12월 24일
데뷔 : '동아일보' 신춘문예 '벽' 당선, 문단 등단 (1936년)
저서 : 국화 옆에서 외 온가족 애송시집, 화사집, 미당 서정주 시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