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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고은(髙銀)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6. 1. 21.

 

 

고은(髙銀) 시 모음

 

 

 

작은 배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 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 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 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없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홑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 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커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눈물 1

 

숲 가까이 혼자 가서 우는 소녀여

네 눈물은 강하다

네 눈물은 지금 악을 죽이고 있다

네 눈물 때문에 조국이 있다

세계 도처의 양심이

비에 젖으며

새로운 풍경으로 태어나고 있다

네 눈물 때문에

 

 

 

눈물 2

 

아 그렇게도 따라가며 눈물 나니

한 줄기의 냇가를 더러는 디려다 보면

나와 거슬러 오르는 잔 고깃떼도 만나보리오

그저 뜨는 마름풀 잎새도 우연히도 되리오

내 늙으면 냇가에서 지난날도 다시 거슬러 오르며

눈물 난 마음 만나보리

그러면 나는 눈물나리

 

 

 

깽매기 소리

 

가을걷이 끝나고도

삼동네 풍장 칠 일 없어요

반장 고갑룡이는

제 집 뒷방에 둔

깽매기 징 장고 들이 궁금해서

그것들 꺼내다 늘어놓고

먼지도 털어주고

잿물 찍어 쇠 닦아주기도 하다가

어디 한 번 소리 내봐라 하고

오래오래 소리 못낸 깽매기 냅다 쳐보니

그 소리 동네에 다 들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깽매기 소린가

도깨비 양반 장난인가

죽은 칠성이 혼백 돌아와 신명나는가

그렇지 젊어서 죽은 칠성이

깽매기 자진모리 한 번 눈 지그시 감고 신들렸지

얼쑤 어깨죽지 뛰놀았지

무논갈이 소 모가지 고단하듯 고단한 세월 신들렸지

 

 

 

곡비(哭婢)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것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둥마는둥

하루 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걸레

 

바람 부는 날

바람에 빨래 펄럭이는 날

나는 걸레가 되고 싶다

비굴하지 않게 걸레가 되고 싶구나

 

우리나라 오욕과 오염

그 얼마냐고 묻지 않겠다

오로지 걸레가 되어

단 한 군데라도 겸허하게 닦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감방 닦던 시절

그 시절 잊어버리지 말자

나는 걸레가 되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더러운 한평생 닦고 싶구나

 

닦은 뒤 더러운 걸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못견디도록 헹구어지고 싶구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걸레로 태어나고 싶구나

 

 

 

가사메댁

 

새터 두희봉이 마누라 가사메댁은

울음소리 청승맞기로 으뜸이어요

남원 운봉 지리산 물소리 받아왔다지요

그 울음소리 옆에서는

절구통도 절구공이도 따라 울게 되어요

한규 할아버지의 꼬부랑 자당께서

그 좁쌀여우 뒷호강하더니

여든여섯에 세상 떠났는데

고씨네 사촌 육촌 팔촌 아낙 가운데

울음소리 하나 변변한 것 없어서

한규 할아버지 끌끌 혀를 찼지요

할 수 살 수 없이

가사메댁 보리 한 말 주고 사다가 울었어요

그 울음소리

그 사설 풀어나가는 울음소리 판소리

꼬부랑 자당 한평생을

산등성이 기어 오르다가 내려 오다가

갖은 양념 청승고개 다 떨어 엮어내려가는데

그 울음소리 판소리

큰 초상 난 집 마당 한번 오젓 짭짤하구나

 

 

 

남대문 폐허를 ()곡함

 

머리 풀고 울어에야 하리

옷 찢어 던지며 분해야 하리

오허 통재

이 하루아침 남대문 폐허를

어찌 내 몸서리쳐 울부짖지 안으랴

 

돌아보라

6백년 연월 내내 한결이었다

이 도성 남녀노소들 우마들

이 나라

이 겨레붙이 머진 삶과 함께였다

 

혹은 청운의 꿈 안고 설레어 여기 이르면

어서 오게 어서 오시게

두 팔 벌려 맞이해 온 가슴인

나의 남대문이었다

 

혹은 산전수전의 나날 떠돌이 하다

여기 이르면

어디 갔다 이제 오느뇨

활짝 연 가슴 밑창으로 안아줄

너의 남대문이었다

단 하루도 마다하지 않고

단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지켜서서

숙연히

감연히

의연히

나라의 기품이던

저 조선 5백년

저 한민족1백년의 얼굴이었다

온 세계 누구라도 다 오는 문 없는 문

온 세계 그 누구라도 다 아는

만방 개항의 문

정녕 코리아나의 숨결

서울 사람의 눈빛 아니었던가

 

이 무슨 천정벽력의 재앙이냐

이 무슨 역적의 악행이냐

왜란에도 호란에도

어제런듯 그 동란에도

끄떡없다가

이 무슨 허망의 잿더미냐

 

여기 폐허 땅바닥에 엎드려 곡하노니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멈추지 말고

떨쳐 일어나

다시 바람 찬 천년의 남대문 일으켜낼지어다

여봐란듯이

저봐란듯이

만년의 내일 내 조국의 긍지 우뚝 세워낼지어다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가을편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2.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3.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랑잎

 

우리가 감히 가랑잎 하나에도

아무런 가책 없겠는가

분단 권세야

야 이놈아

이제 그만 멎어버려라

산등성이 바람 친다

누이야

네가 있구나

몇천 년의 누이야

 

 

 

가을 병상(病床)

 

세월은 가는 것인가 가는 것인가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먼 산도 세월인가

누워 있는 나 또한 세월이란 말인가

한 모금 담배 연기에도 부끄러운

나의 병도

차라리 세월이건만

 

오늘 같은 날 나는 이렇게 누워 있을지라도

이 세상 저 세상은 다 충실하고

창 밖의 저 과실도 여물다 툭 떨어지겠다

그렇지만 여남은 나무 잎새 내 메마른 살 쓸듯이

빈 가지에 남아서 가을은 풍덩 깊구나

 

만일 내가 어린 아이라면 어이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면

아내여 그대 젖 고동소리 얼마나 그리워하다 잠들었을까

가을 수수밭 머리엔 아내만 갔다

지금 아내의 마음 동서남북 속에서 얼마나 추울까

아내를 내 곁에 태우고 밭에서 돌아오고 싶은데

내가 누워서 세월 농사니 달구지도 외롭겠구나

벌써 가을 땅거미 든다 나는 아내도 내 병도 사랑한다

 

오직 어서 돌아왔으면 돌아와 주었다면

그것 하나 내 귀 언저리 소원이며

어디다 머나먼 켈트족의 말로라도 말하는 추운 곳에

나 혼자 사는 마음으로 세월이 내 아내인가

아아 아내조차도 세월인가

그렇겠구나 사랑도 세월인가

 

 

 

가을 상업(商業)

 

가을은 가면서

노인을 남긴다

그리고 노인의 죽음을

그 뒤에 남긴다

하나씩 둘씩

 

저문 참나무 숲에서

지는 잎들을 팔고 있다

그러나 사는 자 없다

어리석은 고독이로다

 

노인 한 개는 열까지 헤인다

지난날에 버린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리고 죽어간다 어리석도다

 

 

 

간디 손자

 

나보다 한 살 아래였던가 위였던가

마하트마 간디의 손자

아룬 간디가

어린 시절

남아연방에 살 때였습니다

 

새 연필 사달라고 졸라댔는데

할아버지는

버린 몽당연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가라사대

 

이 연필은 나무를 잘라 만들었다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다

이 연필심은 땅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귀중한 것이니

쓸 때까지 다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조용조용 해주며

새 연필은 한동안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 아룬 간디가

뉴잉글랜드 콩고드에 와서

한국에는 가난한지라 여비 없어 가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허리에 핸드폰을 달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물레를 돌렸고

손자의 시절은 여행 중에도

급한 일로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옛날과 오늘이 좀 다르게 되었습니다

 

 

 

갈매기

 

우리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육지다

육지다라고

네가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소리쳤다 살아났다

우리는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보았다

너의 비상을

너의 아름다움을

난파선 널조각에 매달려서

 

 

 

강설(降雪)

 

廢墟에 눈 내린다.

同志

함께 모이자.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껴안고 울자.

廢墟에 눈 내린다.

우리가 1950年代에 깨달은 것은

人山人海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모든 죽은 사람들까지도 살아나서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울자.

우리는 분명 族屬이다.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사랑하자.

 

 

 

강은 흘러도

 

가을 볕 한 줌 쥔 시린 손속으로

어린 것을 재울까

 

자장 자장이라는 무한한 위안이여

너를 재울 때

내 몸도 함께 재운다

 

내 딸이라 하여

강가 나룻배로

실어가고 싶은 맑은 날의 도둑

 

아무리 강은 흘러도

나는 그냥 강과 남남으로 있을 뿐이다

 

강가에서

어린 것처럼 어린 게 어디 있을까

 

 

 

 

객혈(喀血)

 

1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괴로움을

또한 첫눈을 노래하자

 

한 마리의 밤새가 되어

대낮 가득히 노래하자

 

2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제의 하늘일 뿐

저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내 가슴에서는 눈 쌓인다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혼자도 괴로우면 여럿이구나

 

3

아아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저물기 전에 노래하자

나는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수 없고

오직 눈먼 산보며 사랑하였다

아아 첫눈이 내리므로 노래하고 쓰러지자

 

 

 

거름 내는 날

 

내 앞에서 자란 자식

벌써 코밑에 잔털 난 자식

쇳내 나는 이놈 데리고

경운기 함께 탄다

아랫뜸 지나

꽤나 먼 길 거름을 낸다

갓난이 때 잘도 보채던 놈이

이제는 입이 굼떠

별반 성난 듯이 말도 없다

이놈하고 가다가

상묵이네 논 둔치에서

까딱 엎어질 뻔했다가도

용케 경운기 손잡이 잘 휘어잡았다

추운 날도 느린 새는 느리게 난다

사뭇 점잖다

우리 짚뭇은 다 들여가고

다른 집 짚벼눌이 더러 논에 있다

올해는 객토 못하는 대신

여름내 만든 퇴비거름

맛있는 거름

논에 내니

논 좀 보아라

논이 헤헤 입 벌리고 좋아한다

남의 논들이야

너무 일직 방정떤다 할지 모르나

우리 논이 좋아하니

나도 내 자식도 함께 좋구나

하늘이야 높아서 소 닭 보듯 하고

다섯 번 거름 실어내면

한나절이 넘어서

거름냄새 퀴퀴 쩐 몸으로

비로소 내 자식 입을 연다

아버지

내년 절충못자리는 내가 할께요

어느덧 덧없구나 내 자식이 자식 아니다

나와 내 자식 이 들판에서 비로소 나란히 형제다

어서 가자 가서 술 한잔 주고받자

 

 

 

고아

 

파미르 고원을 아는가

무위의 산소 60프로

숨차

어디에도 나라가 없이

이제야 나는 고아가 되었다

불쌍한 희로애락 따위 너희들도 잘 가거라

 

 

 

고향에 대하여

 

이미 우리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니다

자란 곳이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산과 들 온통 달려오는

우리 역사가 고향이다

 

그리하여 바람 찬 날

몸조차 휘나리는 날

우리가 쓰러질 곳

그곳이 고향이다

내 고향이다

 

아 창연한 날의 나의 노스탈쟈

모두 다 그 고향으로 가자

어머니가 기다린다

어머니인 역사가 기다린다

역사의 어떤 깃발이 손짓한다

그곳이 고향이다 가자

 

 

 

1

 

길을 보면

나에게 부랴부랴 갈 데가 있다

신영리나 내리 마음을 보면

나에게 저 마을을 지나서 갈 데가 있다

그렇도다 마정리 에움길 하나에도

장호원 이백리 길도

나에게 그냥 잠들지 못하게 한다

길을 보면

나는 불가피하게 힘이 솟는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말아라

저 끝에서 길이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 가야 한다

한평생의 추가령지구대

그 험한 길 오가는 겨레 속에

내가 살아 있다

남북 삼천리 모든 길

나는 가야 한다

기필코 하나인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있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공 던지기

 

방학 중의 딸과 함께 공 던지기를 했다

좀 세게 던져주면

튀는 공이

딸의 키를 넘어간다

딸의 공이 와서 튀면

내 키도 월떡 넘어 저만치 떨어졌다

깔깔깔 딸의 웃음이 물소리로 터져나왔다

 

나도 세게 던진 뒤 땀을 훑어내며

하늘을 보았다

 

웬일인지

비행운 하나도 없다

하늘이 누구누구의 소유가 아닌 것이

얼마나 아슬아슬히 다행인가

 

 

 

교상기도(橋上祈禱)

 

오래, 새벽을 거닐어 간다.

안개 속에 나오는

다리 위를.

 

잠든 한강(漢江)이 안개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안개처럼 여의도(汝矣島)로 사라져간다.

안개에는 많은 그림자가 들어 있나니,

내가 돌 하나로 던진다.

 

한 점의 물소리가 나면

이어서 모여드는 고요,

환도(還都)

누이가 이곳에서 빠진 소리였다.

세월이 씻기어 적어진 그 소리로야 아

 

더 흐르면

안남을 그 소리로야

비로소 이곳이었나 보다

졸음을 깨우는 누이의 울음이듯이,

새벽은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와,

누이는 와서 내 앞에 비 맞은 빛 같이야

빛나게 그치어 있다.

옛 시절의 약속에 못 견디우 듯

우는 입술.

 

그러나 새벽이어

더 뚜렷이도 다가드는

내 누이의 낯선 모습을 아느냐.

 

오래, 안개에 새인

새벽 등불이 이제 보이면

누이는 또 가버리나,

안개 속에 눈감기는 어둠이 되나.

이제는 어느때인가

 

다리위에서야

다리 아래의 강위에

솟아 오는 깊음을 보는

내 소름으로

자는 바람은 일어나,

누이는 멀어져 간다.

 

잠든 한강(漢江)의 안개 속에서

떠는 나의 눈은

얼마나 졸음을 새어왔느냐.

다리위에서 나는 이제 쓰러지며

나를 사로잡는 누이여

나의 기도를 너는 다 앗아간다.

새벽은 말하지 않느냐.

 

 

 

국도

 

지나 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이따금 형석(螢石)빛 습기(濕氣) 속으로

젖은 개똥벌레를 만나고

먼 바다에서 십이음(十二音)의 배들이 죽어서 불빛이 된다.

기다리는 것은 미지(未知)의 친척(親戚),

그러나 그들을 만난 일이 없다.

차라리 잠든 세상에서 잠들지 않은 절도가 된다.

이 밤 세 시()와 네 시() 사이를

마시던 술잔은 그대로 놓여 있는 주택(住宅)을 찾는다.

그리고 임자가 바뀔 개량종자(改良種子)의 밭들을 찾는다.

이제 나는 찾았다. 온갖 절교(絶交)의 정적(靜寂)

 

그리고 지나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밤 네 시()의 국도(國道)에는

여름철의 말끝들이 남아 있다.

'' '' '' ''……

어둠 속에서 의문부(疑問符)가 없어지고

전해진 뜻이 없어진 채 남아서 빛나고 있다.

지나왔다. 수레가 지나간 뒤,

말 오줌 자국이 적셔진 곳을.

그리하여 가장 취할 진정제(鎭靜劑)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주어서 던졌다.

어떤 뜻밖의 언덕에 가까스로 명중(命中)했느냐,

바다가 내 흉터를 모조리 빼앗아 갈 때,

아직 새벽은 멀고 말끝들이 남아 있다.

 

이윽고 바다가 죽은 어부(漁夫)들을 부른다.

새벽이다. '' '' '' ''

나는 지친 모자를 벗어 간조(干潮)의 머리카락을 뿌린다.

새벽 배는 비어 있을 뿐,

지나왔다. 배들이 죽었다. 나는 말끝처럼 하얗게 죽으리라.

 

 

 

귀성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누가 그냥 끌러둔 말없는 광목띠와도 같지요

산천초목을 마구 뚫고 난 사차선 저쪽으로

요샛 사람 지방도로 느린 버스로 가며 철들고

고속도로 달리며 저마다 급한 사람 되지요

고향길이야 이곳저곳 지나는 데마다 정들어

또 더러는 빈 논 한 배미에 밀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파릇파릇 겨울 배추 밭두렁을 비껴서

서로 오손도손 나눠 먹고 사양하기도 하며 굽이치지요

삼천리강산 고생보다는 너무 작은 땅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거두는 대대의 겸허함이여

자투리 땅 한 조각이라도 크나큰 나라로 삼아

겨우 내 몸 하나 경운기길로 털털 감돌아 날 저물지요

어느새 땅거미는 어둑어둑 널리는데

이 나라에서 왜 내 고향만이 고향인가요

재 넘어가는 길에는 실바람 어느 설움에도

불현듯 어버이 계셔야 해요 그리운 내 동생들 달려오지요

 

 

 

그 할머니

 

몇 해 전 겨울이었지요 앞산 골짜기에서

울음소리 훌쩍훌쩍 들렸습니다

다가가서 우는 할머니 달래었습니다

남의 집 식모살이라 울 데도 없어

여기 나와서 혼자 우는 것이었지요

바로 어제가 세상 떠난 그 양반 제삿날이라

메 한 사발 올리지 못하고 밤을 새워서

오늘 아침 울음으로나 잠깐 제사 지내는 것이지요

나야 별소리로 더 달랠 수 있다지만

우는 할머니 따라 내 설움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금강산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금강산 12천봉을

나도 모르게

너도 모르게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저 봉우리마다

수려한 얼굴들

저 골짜기마다

그윽이 마음 담겨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아흐

헛디디어

저 아래 구름속으로

빠져버려도

차라리 좋아라

얼씨구 좋아라

그토록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그동안

갈라졌던 것

흩어졌던 것

모조리 작파하고

그동안 무지무지하게

아까운 나날들

허사로 보낸 세월들

훨훨 날려버리고

이제는

하늘의 선녀로 내려와

실한 나무꾼 만나

서로 익어가는

사랑의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금강산 아니어도 좋아라

삼천리강산

어느 산이어도 좋아라

그 아침 산들을

그 저녁 산들을

이윽히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

아 금강산 12천봉.

 

 

 

대보름 날

 

정월 대보름날 단단히 추운 날

식전부터 바쁜 아낙네

밥손님 올 줄 알고

미리 오곡밥

질경이나물 한 가지

사립짝 언저리 확 위에 내다 놓는다

이윽고 환갑 거지 회오리처럼 나타나

한바탕 타령 늘어놓으려 하다가

오곡밥 넣어가지고 그냥 간다

삼백예순 날 오늘만 하여라 동냥자루 불룩하구나

한바퀴 썩 돌고 동구 밖 나가는 판에

다른 거지 만나니

그네들끼리 무던히도 반갑구나

이 동네 갈 것 없네 다 돌았네

자 우리도 개보름 쇠세 하더니

마른 삭정이 꺾어다 불 놓고

그 불에 몸 녹이며

이 집 저 집 밥덩어리 꺼내 먹으며

두 거지 밥 한 입 가득히 웃다가 목메인다

어느새 까치 동무들 알고 와서 그 부근 얼쩡댄다

 

 

 

대보름 뒤

 

고향에는 밤이 있다

한없이 환한 대보름 뒤의 달밤이 있다

잠 깨어 뒷간에 간다

벌써 요강 넘쳐서

바깥으로 나가 뒷간에 간다

자지러지게 환한 밤

건너마을 수동이네 헛간 위

지붕 못 걷히게 얹어둔 헌 쟁기까지 보이는 밤

참수리가 공중에서 먼 데까지 보듯이

병아리 보듯이

멀리 멀리 바위배기 상여집까지 보이는 밤

보름 쇠고 치던 징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

가슴 설레어 천리길 나서고 싶다

과부 자식 아니랄까

소문난 건달 창섭이 오줌 싸고 진저리치며

그 길로 휘영청 나서고 싶다

곰아 곰아 너 숨었거든

발바닥만 핥지 말고 너도 나와 성큼 나서 보아라

환한 달밤 아쉬워 어찌 잠자누 잠만 처자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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