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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같은 삶을 위하여
☞ 문학의 뜨락

박두진 시 모음

by 石右 尹明相 2016. 1. 19.

 

 

 

 박두진 시인(1916~ 1998)

데뷔 1939년 문예지 '문장'

학력 우석대학대학원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하늘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당신의 사랑 앞에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바닥과 심장에 생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다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묘지송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수가 빛나리

향그런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 배 뱃종 뱃종 멧새들고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저 고독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읍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읍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읍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잔내비

 

잔내비 칼 휘두른다.

꽃밭이고 소년이고 양의 떼고 없다.

피 보면 미친다는

이리 넋에 취하여

어쩌나 둘러서서 침묵하며 지켜보는

대낮 여기 잔내비떼

칼 휘두른다.

심장을 마구 찔러 목숨 다치고

은 장식 조상이 내린 거울 깨뜨리고

꽃밭 함부로 낭자하게

개발 짓밟어

남녘에서 들뜬 바람

독 어린 발정

죽을 줄 제 모르고

칼 휘두른다.

 

 

 

결투

 

죽어서 평등한 빈 벌의 뼈의 달빛

피에 취한 맹수들이 으릉으릉 온다.

깃발도 하나 없이

너도 이미 가버린

 

혼자로다 신나는 무인광야 결투,

다만

별 하나 훌쩍 따서 손아금에 쥐고,

맨발로 창 하나로 치고 치고 친다.

밤의 광야 달빛 활활 불을 지른다.

 

 

 

푸른 하늘 아래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불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

어서 오너라.

 

 

 

천유산 상호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 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하도 홀로 어느 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 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별 밭에 누워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 지름이어

 

 

 

칠월(七月)의 편지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하늘 펄펄 꽃사태

 

어떻게 당신은 내게

믿음을 주셨을까.

당신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셨을까.

 

그때 내 영혼 홀로 방황하고

칠흑 벌판 끝도 없는 무인 광야 사막

소낙비 천둥 번개 우릉대고 깨지고

우박 폭풍 폭설 펑펑 퍼붓다가도.

 

갑자기.

햇덩어리 폭양 펄펄 용광으로 끓어

 

동남서북 어딜 가나

절망뿐인 천지,

진실로 나는

광야에서 나고 자란 어린 들짐승

스스로를 저주하고 스스로를 연민해 온

외롭고도 완강한 탕자였나니.

말을 하는 짐승

날 수 없는 영혼

피로 이은 향수와 날고 싶은 꿈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모르고

목숨도 혼도 영도 그냥 그대로,

 

너머지며 일어서며

상처뿐인 영혼에

놀라워라

무지갤지 섬광일지 하늘 사다릴지

할렐루야 그 십자가 길

피로 사서 이기신

부활이신 당신 앞에 황홀하나니.

 

진실로,

바라는 것의 그 실상이며 영생이신 당신.

믿음의 그 증거이신

사랑이신 당신,

하늘 펄펄 꽃사태의 영광 우러러

탕자 하나 무릎 꿇고 울음 울어라.

 

 

 

팔월(八月)의 강()

 

팔월(八月)의 강()이 손뼉친다.

팔월(八月)의 강()이 몸부림친다.

팔월(八月)의 강()이 고민한다.

팔월(八月)의 강()이 침잠(沈潛)한다.

 

()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배암과 이리의

갈라진 혓바닥과 피묻은 이빨들을 기억한다.

 

()은 저 은하계(銀河系) 찬란한 태양계(太陽系)

아득한 이데아를

황금빛 승화(昇華)를 기억한다.

 

그 승리를, 도달을, 모두의 성취를 위하여

어제를 오늘에게, 오늘을 내일에게 위탁한다.

 

()은 팔월(八月)의 강()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늠름하게 의지한다.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

 

 

 

하나씩의 별

 

하나씩의 별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픔의 피로 지는

침묵(沈默)들의 낙엽(落葉),

아무도 오늘을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더러는 서서 울고

더러는 이미 백골(白骨)

헛되이 희디 하얀 백일(百日)

벌에 쬐는

하나씩의 순수(純粹)의 영겁(永劫)

넋의 분노(憤怒)

 

벌판을 치달리던

맹수(猛獸)들의 살륙(殺戮),

그 턱의 뼈도 흐트러져

하얗게 울고 있다.

 

 

 

흙과 바람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넣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 사이

햇살 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 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생전

살의 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고

 

 

 

장 미 1

 

디디고 올라가면

무너지는 층계

바다가 그 하늘 밑에

아찔하게 설레는

아침이여, 너의 背叛

안의 넋의

피흐름.

알았네. 나도 이젠

하나씩의 그 戰慄

떨어지는 宇宙의 진한 아픔을.

네가 지면 이 햇살 아래

목놓아 울리.

그 하늘 층계 다 무너뜨려

꽃불 지르리.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 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빛이 싫여 달빛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빛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휠훨휠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버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위어이 위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에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항아리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갈대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智慧)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沈默)하고,

언어(言語)는 이슬방울,

사상(思想)은 계절풍(季節風),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흘림,

영원(永遠).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가 갈긴 칼에

선혈(鮮血)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絶叫).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沈默)하면

갈대는

고독(孤獨).

 

 

 

절벽가(絶壁歌)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겨울나무 너

 

카랑카랑 강추위

 

빈 들에 혼자 서서

혼자서 너는 떨고 있다.

 

몸뚱어리 가지 온통, 오들오들 떨고 있다.

 

파아랗게 얼은 하늘

서리 엉긴 이마,

 

마지막 한 잎까지 훌훌 떨린 채

알몸으로 발돋움해

손을 젓고 있다.

 

영에 얼사 부둥켰던

우리들의 영원,

활활 달턴 뜨거움,

 

해의 나라 달의 나라 별의 나라 모두

불러보는 이름들의

듣고 싶은 음성,

 

벌에 혼자 너만 서서

울음 울고 있다.

 

 

 

사랑이 나무로 자라

 

바다로 돌담을 넘어

장미가 절망한다

이대로 밤이 열리면

떠내려가야 할 끝

그 먼 마지막 언덕에 닿으면

꽃등을 하나 켜마.

 

밤별이 총총히 내려

쉬다 날아간

풀 향기 짙게 서린

바닷가 언덕

금빛 그 아침의 노래에

하늘로 귀 쭝기는

자유의 전설이 주렁져 열린 나무 아래

앉아 쉬거라.

 

사랑이 죽음을

죽음이 사랑을 잠재우는

얼굴은 꿈, 심장은 노래

영혼은 기도록 가득 찬

또 하나 바벨탑을 우리는 쌓자.

 

파도가 절벽을 향해

깃발로 손짓하고

사랑이 나무로 자라

별마다 은빛 노래를 달 때

그 커다란 나무에 올라

비로소 장미로 지붕 덮는

다시는 우리 무너지지 않을

눈부신 집을 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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