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 2003년
경성사범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한국시인협회장,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
19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조병화(趙炳華) 시 모음
◈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 우리가 어쩌다가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인연이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서운해지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슬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알게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것도 어쩔수 없는 한 운명이라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 만큼 슬퍼지려니
이거 어쩔 수 없는 아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사랑하게 되어
서로 더욱 못견디게 그리워지면,
그것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뜨거운 눈물이려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흐느낌이 되려니
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이별이
그만큼 더욱 더 애절하게 되려니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만큼 이별이 더욱
더 참혹하게 되려니..
◈ 들꽃처럼
들을 걸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
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너와 내가 서로 같이
사랑하던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
작게 피어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거 지나가면 그 뿐
정들었던 사람아
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
들꽃처럼
들꽃처럼
실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삼삼히 그저 삼삼히
◈ 남남
오해로는 떠나질 마세요
오해를 남기고선 헤어지질 마세요
오해를 지닌 챈 갈라지질 마세요
내가 널 얼마큼 고마와했는지
내가 널 얼마큼 아파하고 있는지
내가 널 얼마큼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네가 날 얼마큼 고마와했는지
그리고 네가 날 얼마큼 아파하고 있는지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오해 때문에.
◈ 남남 27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 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으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숲에서 숲으로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한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둥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 사람이 한번 작별을 하면
그렇게 그렇게 되어서
작별을 한 후
문득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보니
그곳엔 이미 없었습니다
그곳엔 있으리라고 믿고 가보았지만
그곳에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몇 번 같이 가본 정다운 곳이 있어서
혹시나 그곳에, 하고 그곳을 멀리 찾아갔으나,
그곳에도 없었습니다
먼 하늘엔 도도히 흐르는 세월
아, 너도 먼지로 떠서, 나도 먼지로 떠서
◈ 곁에 없어도
길을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눈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목숨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생각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 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이 깔린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했습니다
인생이 겉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이렇게 될 줄 알면서
◈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 공존의 이유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시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 이라 던지
이건 비밀일세 라든지 같은 말들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 쯤 간다는 걸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오면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를 하며 작별를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늘, 혹은 때때로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 투명한 고독
참으로 많은 길을 걸어서
용케도 이곳까지 온 여정
잠시 쉬면서 이 밤, 잠을 청하고 있노라니
떠날 때나, 지금 이 자리
변하지 않은 것은 실로 혼자라는 생각,
맑게 살아온 그 외로움이다
변하는 세상, 변하는 세월, 변하는 자연,
변하는 인간사, 사람을 살아오면서
하나도 변함이 없는 것은
견고한 나의 고독이다
변한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허망이었던가
아, 無常한 이 세상, 맑은 탈출이여
이것도 어머님의 뜻이었던가
어머님,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어머님 뜻대로 그렇게
이 맑은 고독을 살아왔습니다
◈ 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먼 곳에 있는 사람아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아
바다가 우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흐느끼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혼자서 혼자서
스스로의 가슴을 깎아내리는
그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네게로 영 갈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을
절망으로 깨지며 깨지며
혼자서 혼자서 사그라져내리는
그 바다의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 내가 시를 쓰는 건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 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 밤의 이야기 20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거지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마냥 멍하니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마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에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대로 하얀 눈에 엎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잎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히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 나무의 철학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쉬임 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 꿈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 회상
꽃 속에서 바스라지는 웃음 소리에
볼근 가슴을 비벼대던 아 젊은 날은
나와는 제일 먼 곳에서
사연 많은 긴긴 편지만 보내고 있어
편지 안에 흐트러진 긴 이야기엔
이렇다 할 아까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건만
먼먼 호수가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낙엽을 말아 낙엽을 피워
보얀 연기 속에 누워야 한다
슬픔이 오고 가는 모퉁이에선
작별을 하여야 했다
긴 세월 속에 어린 나를 보내야 했다
아름다운 나의 목숨을 바칠 그러한 사람이 없어도
긴 세월 속에 나는 나를 묻어야 한다
오늘도 꽃 속에서 바스라지는 웃음 소리가 들려
볼근 가슴을 피어올리던
저 하늘가 가까이 또 하나
오지 못할 사연의 긴 편지가 떨어져 온다
◈ 사랑의 노숙 (露宿)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뿐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사랑의 기억이다
◈ 산책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 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 그럼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
고독이 전율처럼 지나갑니다.
무료한 시간이 무섭게 흘러갑니다.
시간의 적막 속에서
속수무책, 온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 이 공포,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
고독이 전율처럼 머물고 있습니다.
<조병화 시인님이 작고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시 구절이다.>
◈ 곁에 없어도
길을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눈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목숨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생각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 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 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 이란다
◈ 숨어서 우는 노래
내 영혼은
숨어서 우는 노래로 가득합니다.
내 사는
숨어서 우는 노래로 젖어 있습니다.
아, 그렇게
내 긴 생애는 숨어서 우는 노래입니다.
◈ 낮달
세월이 잃고 간 빚처럼
낮하늘에 달이 한 조각 떨어져있다.
◈ 고독과 그리움
쓸쓸합니다.
쓸쓸하다 한들 당신은
너무나 먼 하늘 아래 있습니다.
인생이 기쁨보다는 쓸쓸한 것이 더 많고,
즐거움보다는 외로운 것이 더 많고,
쉬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더 많고,
마음대로 되는 일 보다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고,
행복한 일보다는
적적한 일이 더 많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땐 한정없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이러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라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이 그립습니다.
참아야 하겠지요.
견디어야 하겠지요.
참고 견디는 것이 인생의 길이겠지요
◈ 나 돌아간 흔적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읍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읍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읍니다
아세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어 세상 수만리 나 찾어 왔읍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읍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읍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려 나 찾어 왔읍니다.
◈ 초상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어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묵은 사진첩을
묵은 사진첩을 들추고 있노라니
까닭 모르는 슬픔이
왈칵, 내 몸에 배어 옵니다.
기쁜 얼굴도 그렇고
웃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슬픈 얼굴은 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기억 밖에 아주 묻혀 버린 얼굴들
기억 내에 아직 머물고 있는 얼굴들
어렴풋이 그때 그 시절, 생각나는 얼굴들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핑 돕니다
◈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 별
멉니다
아련하옵니다
불가사의 합니다
신비롭습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 중에서
사람이 사느 별이 있을까
하는 순간, 한 눈물이 떠올랐습니다
반짝, 반짝.
◈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세상 어지럽게 많은 말들을 뿌렸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밀 한마디
"당신의 사랑의 은혜 무량했습니다"
보답 못 한 거 다 잊어 주십시오
아,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다 잊어 주십시오.
◈ 먼 곳에서
이젠 먼 곳들이 그리워집니다
먼 곳에 있는 것들이 그리워집니다
하늘 먼 별들이 정답듯이
먼 지구 끝에 매달려 있는 섬들이 정답듯이
먼 강가에 있는 당신이
아무런 까닭 없이 그리워집니다
철새들이 날아드는 그곳
그곳 강가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당신이 그리운 것 없이 그리워집니다
먼먼 곳이 날로 그리워집니다
먼 하늘을 도는 별처럼
◈ 9월의 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움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
◈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 내 마음에 사는 너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 하나의 꿈인 듯이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너와 나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야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 사랑
기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 황홀한 모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 주오
비가 궂이게 쏟아져야
그대에 가까이 가는 길을
나는 찾아간다오
나보다 더 큰 절망을 디디고
진정 이 지구를 디디고
나는 찾아 가리오
내가 살아가기에
알맞은 풍토는
비 많이 쏟아지는 밤
이러한 밤에 절망을
뒤적거려 보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무슨 주변에 내가
더 큰 것을 바라오리오
내 것인 것만 주오
진정 내 것인 절망만 주시고
나를 괴롭지 않은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오
비 내리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절개는
그대 것인 가는 호흡을
호흡하는 것이라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어 주오
영 멀어가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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