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盧天命,1911년~1957년), 황해도 장연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930년 진명여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입학.
1932년 「밤의 찬미」(『신동아(新東亞)』를 발표하며 등단.
1938년 『산호림(珊瑚林)』 출간
노천명 시 모음
▶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어버이날
온 땅 위의 어머니들이 꽃다발을 받는 날
생전의 불효를 뉘우쳐
어머니 무덤에 눈물로 드린
안나 자아비드의 한 송이 카네이션이
오늘 천 송이 만 송이 몇 억 송이로 피었어라.
어머니를 가진 이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
어머니날을 찬양하자
앞산의 진달래도 뒷산의 녹음도
눈 주어볼 겨를 없이
한국의 어머니는 흑인노예 모양 일을 하고
아무 찬양도 즐거움도 받은 적이 없어라
이 땅의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싹을 내거니
청춘도 행복도 자녀 위해 용감히 희생하는
이땅의 어머니는 장하신 어머니
미친 비바람 속에서도 어머니는 굳세었다.
5월의 비취빛 하늘 아래
오늘 우리들의 꽃다발을 받으시라.
대지와 함께 오래 사시어
이 강산에 우리가 피우는 꽃을 보시라.
▶ 고향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본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鶴林寺(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山(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 홋잎나물을
뜯는 少女(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少女(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간
도깨비 얘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斑馬(반마)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ㅡ얗게 피는 곳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 가을날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예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드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 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 내 가슴에 장미를
더불어 누구와 얘기할 것인가
거리에서 나는 사슴모양 어색하다
나더러 어떻게 노래를 하라느냐
시인은 카나리아가 아니다
제멋대로 내버려두어 다오
노래를 잊어버렸다고 할 것이냐
밤이면 우는 나는 두견!
내 가슴속에도 들장미를 피워다오
▶ 당신을 위해
장미모양
으스러지게 곱게 되는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속삭이기에는 좋은 나이에 열없고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얘기는 우정 딴 데로 빗나가고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행여 이런 마음 알지 않을까 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가 모르기를 바라며 말없이
지나가려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죠.
▶ 별을 쳐다보며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본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 새해맞이
구름장을 찢고 화살처럼 퍼지는
새 날빛의 눈부심이여
'설'상을 차리는 다경(多慶)한 집 뜰 안에도
나무판자에 불을 지르고 둘러앉은
걸인들의 남루 위에도
자비로운 빛이여
새해 늬는
숱한 기막힌 역사를 삼켰고
위대한 역사를 복중(腹中)에 뱄다
이제
우리 늬게
푸른 희망을 건다
아름다운 꿈을 건다
▶ 언덕
창으로 하늘이 들어온다
눈만 뜨면 내다보는 언덕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없다.
오늘도 소나무가 서너 개 아무것도 안 뵌다.
방 안 풍경이 보기 싫어
온 종일 언덕을 바라본다.
사람이 지나가면 눈이 다 밝아진다.
전봇대모양 우뚝 선 사람이 둘
혹시 나 아는 이 아닐까
가슴이 답답하면 언덕을 본다.
눈물이 나면 언덕을 본다.
이방인 같아 쓸쓸하면 언덕을 본다.
언니랑 조카가 보고프면 언덕을 본다.
▶ 유월의 언덕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 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한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기 지나가 버리는 마음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삶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저녁별
그 누가 하늘에 보석을 뿌렸나
작은 보석 큰 보석 곱기도 하다
모닥불 놓고 옥수수 먹으며
하늘의 별을 세던 밤도 있었다
별하나 나하나 별두울 나두울
논뜰엔 당옥새 구슬피 울고
강낭수숫대 바람에 설렐 제
은하수 바라보면 잠도 멀어져
물방아소리- 들은지 오래
고향하늘 별 뜬 밤 그리운 밤
호박꽃 초롱에 반딧불 넣고
이즈음 아이들도 별을 세는지
▶ 푸른 오월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위그에 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 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 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미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 할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 메선 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 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 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라도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
▶ 구름같이
큰 바다의 한 방울 물만도 못한
내 영혼의 지극히 적음을 깨닫고
모래언덕에서 하염없이
갈매기처럼 오래오래 울어보았소.
어느 날 아침이슬에 젖은
푸른밤을 거니는 내 존재가
하도 귀여운 것 같아 들국화 꺾어들고
아침다운 아침을 종다리처럼 노래하였소
허나 쓴웃음 치는 마음
삶과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이 못풀 수수께끼어니
내 생의 비밀인들 어이 아오
바닷가에서 눈물짓고...
이슬언덕에서 노래불렀소
그러나 뜻 모를 이 생
구름같이 왔다가나보오
▶ 길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 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을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으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 묘지
이른 아침 황국(黃菊)을 안고
산소를 찾은 것은
가랑잎이 빨-가니 단풍드는 때였다.
이 길을 간 채 그만 돌아오지 않는 너
슬프다기보다는 아픈 가슴이여
흰 패목들이
서러운 악보처럼 널려 있고
이따금 빈 우차(牛車)가 덜덜대며 지나는 호젓한 곳
황혼이 무서운 어두움을 뿌리면
내 안에 피어오르는
산모퉁이 한 개 무덤
비애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 비연송(悲戀頌)
하늘은 곱게 타고 양귀비는 피었어도
그대일래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
사랑의 가는 길은 가시덤불 고개
그 누구 이 고개를 눈물없이 넘었던고
영웅도 호걸도 울고 넘는 이 고개
기어이 어긋나고 짓궂게 헤어지는
운명이 시기하는 야속한 이 길
아름다운 이들의 눈물의 고개
영지못엔 오늘도 탑 그림자 안비치고
아사달은 뉘를 찾아 못 속으로 드는 거며
그슬아기 아사녀의 이 한을 어찌 푸나
▶ 낙엽
간밤에 나는 나무 밑에 들어서
그들의 회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플라타너스는 사시나무 떨 듯하며
무서운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밖엘 나서니 바람 한 점 없는
자는 듯 조용한 밤하늘인 것을
어젯밤 그처럼 웅성거리더니
아침에 발등이 안 뵈게
누우런 잎사귀들을 떨구어놨습니다
시들은 잎사귀를 떨어버리는데
그렇게 엄숙한 회의를 했군요
겨울을 이겨 낼 투사는
하나도 없었나 보죠
플라타너스의 가을밤 회의는
준엄한 것이었습니다
▶ 사월의 노래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 빛 우울을 걷어 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 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푼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람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령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려 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골이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 임 오시던 날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늦으셨다 노여움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 장날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릿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장미
맘 속 붉은 장미를 우지직끈 꺾어 보내 놓고
그 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 자라다
늬 수정 같은 맘에
나,
한 점 티 되어 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
차라리 얼음같이 얼어 버리련다
하늘보다 나무모양 우뚝 서 버리련다
아니
낙엽처럼 섧게 날아가 버리련다
▶ 봄비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땋아 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람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씨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나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女心
새벽하늘에 긴 강물처럼 종소리 흐르면
으레 기도로 스스로를 잊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한 번의 눈짓, 한 번의 손짓, 한 번의 몸짓에도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는 하루를 살며
하루를 반성할 줄 아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즐거울 땐 꽃처럼 활짝 웃음으로 보낼 줄 알며
슬플 땐 가장 슬픈 표정으로 울 수 있는
그런 女性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길에 순종할 줄 알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드릴 줄 아는
그런 여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 아름다운 얘기를 하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닷돈짜리 왜떡을 사먹을 제도
살구꽃이 환한 마을에서 우리는 정답게 지냈다
성황당 고개를 넘으면서도
우리 서로 의지하면 든든했다
하필 옛날이 그리울 것이냐만
늬 안에도 내 속에도 시방은
귀신이 뿔을 돋쳤기에
병든 너는 내 그림자
미운 네 꼴은 또 하나의 나
어쩌자는 얘기냐, 너는 어쩌자는 얘기냐
별이 자꾸 우리를 보지 않느냐
아름다운 얘기를 좀 하자.
▶ 망향(望鄕)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鶴林寺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山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뻑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맹이 놓고 간 도깨비 얘길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講道상을 치며 설교하던 村
그 마을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班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모밀꽃이 하아얗게 피는 곳
조밥과 수수엿이 맛있는 마을
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 구경이 소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叢)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 봄의 서곡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 옷들을 받아 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분홍「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 自畵像(자화상)
대자 한치 오푼 키에
두치가 모자라는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 하기를 어려워 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 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자고 괴로와하는 성미는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데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가한다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 눈보라
눈보라 속에 네거리 사람들은
오직 고, 스톱을 몰라 당황해 한다
동상(銅像) 하나 못 선 로타리에도
눈이 오니 괜찮다
이런 날도 두꺼운 창 안에서
사무를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겠다
눈이 펑펑 쏟아지면
내 속에선 사과꽃이 핀다
이대로 걸음이 내 집을 향해선 안 된다
어디를 가야만 하겠다
누구와 더불어 얘기를 해야만 될 것 같다
▶ 황마차(幌馬車)
기차가 허리띠만한 강에 걸린 다리를 넘는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땅이 아니란다.
아이들의 세간 놀음보다 더 싱겁구나.
황마차에 올라 앉아 아가위나 씹자.
카츄사의 수건을 쓰고 달리고 싶구나.
나는 여기 말을 모르오.
호인(胡人)의 관이 널린 벌판을 마차는 달리오.
시가아도 피울 줄 모르고 휘파람도 못 불고
▶ 고독
변변치 못한 화를 받던 날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고독을 사랑하는 버릇을 지었습니다.
번잡이 이처럼 싱크러울 때
고독은 단하나의 친그라 할까요
그는 고요한 사색의 호숫가로
나를 달래 데리고 가
내 이지러진 얼굴을 비추어 줍니다.
고독은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
함부로 친할 수도 없는 것
아무나 가까이 하기도 어려운 것인가 봐요
▶ 고별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人士)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워졌다.
고도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나를 보내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갈 것이고
아끼던 책들은 천덕꾼이가 되어 장터로 나갈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들과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 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 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련다.
나를 어디 떨어진 섬으로 멀리 멀리 보내 다오.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村家)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있고
가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 나에게 레몬을
하루는 또 하루를 삼키고
내일로 내일로
내가 걸어가는 게 아니요 밀려가오
구정물을 먹었다 토했다 허우적댐은
익사를 하기가 억울해서요
악이 양귀비꽃 마냥 피어오르는 마음
저마다 모종을 못내서 하는 판에
자식을 나무랄 게 못되오
울타리 안에서 기를 수는 없지 않소?
말도 안 나오고
눈 감아버리고 싶은 날이 있소
꿈 대신 무서운 심판이 어른거리는데
좋은 말 해줄 친척도 안 보이고!
할머니 내게 레몬을 좀 주시지
없음 향취 있는 아무거고
곧 질식하게 생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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