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소설가, 시인
출생 1913년, 경북 경주
데뷔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김동리 시 모음
◈ 어머니
가을 들녘에 내리는 황혼은
내 어머니의 그림자.
까마득한 옛날 이미 먼 나라로 가신,
그러나 잠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는
따스한 햇볕처럼
설운 노래처럼
언제나 내 곁을 맴도는
어머니의 그림자.
◈ 고향
십년 지나 고향에 돌아오니
내 나서 자라던 마을 그대로 있네
흙담장 돌각담 찌그러진 오막 속에
해솟병 할머니가 그저 살아 계시고
시꺼멓게 구멍 뚫린 마을 앞의
늙은 회나무도 아직 그냥 서 있네
돌멩이 지푸라기 엉크러진 채
물메인 개천도 그냥 다 있네
이렇게 옛날도 있은 것처럼
백년이 또 지나도 이대로 있을까
십년 지나 고향에 돌아오니
골목의 저녁노을 그대로 있네.
◈ 五月
5월의 나무들 날 보고
멀리서부터 우쭐대며 다가온다.
언덕 위 키 큰 소나무 몇 그루
흰 구름 한두 오락씩 목에 걸은 채
신나게 신나게 달려온다.
학들은 하늘 높이 구름 위를 날고
햇살은 강물 위에 금가루를 뿌리고.
땅 위에 가득 찬 5월은 내 것
부귀도 仙鄕도 부럽지 않으이.
◈ 가을바람
내 어린 날에
가을바람이
나를 다쳤네.
파란 하늘 아래
고추쨍이를 쫓아
수수 잎 서걱이는
밭이랑을 탔을 때,
바람이
아아 가을바람이
내 소매를 치고 갔네.
고추쨍이는 사라지고
가을바람이
나를 다쳤네.
◈ 갈 대 밭
가슴속에 언제나
벌레 우는 鄕愁
그 꿈속의 고향은 얼마나 먼 곳일까?
내 고장 서쪽 산 玉 女 峯 비탈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속에
작고 붉은 묏새들 날고 있었지.
갈대밭 위로 떠오르던
둥근 달은 어머니 얼굴.
갈대밭 속의 깊이 모를 늪가엔
늙은 개구리 한 마리
두 눈을 굴리며 나를 바라보았었지.
옥녀봉 한쪽 비탈 끝없는 갈대밭
그 늪가의 늙은 개구린
지금도 그 큰 눈 굴리고 있을까?
◈ 개구리 우는 밤
마을 앞뒤 질펀한 개울물에
해 지면 개구리는 태고(太古)대로 운다.
풀 냄새에 바람은 멍들어 자고
별더미를 헤치며 개구리는 운다.
물에서 남녀가 생겨나던 옛날, 개구리 알은
은하처럼 하늘에 둥둥 흘러갔거니.
은하가 기울고 개울이 넘쳐
너와 나의 이름이 물살에 갈렸거니.
갈리어 서러운가 해마다 나리는 비
별더미를 뿜어내는 너의 넋두리.
이따금 뚝 그치고 귀 기울임은
들림인가 아련한 마을의 개 닭소리.
너와 나 하늘 밖의 먼 고향
울자꾸나 태고대로 울어서 예자꾸나.
◈ 고개 마루에 서서
남산을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서서
저쪽 서남으로 트인 데를 바라보노라면
노량진과 마포 사이 묘망한 공간에
무수한 인가와 공장 지대와, 가로 세로
그어진 행길과 시가지와, 여기 저기
검푸른 수풀은 먹물처럼 번졌는데
유월의 한강은
황금빛 햇볕 속에 백사장을 휘감아
멀리 구름 밖에 엎드린 산줄기와 얼렸도다.
내 오늘은 묵은 책들을 덮어 두고
맑은 바람 벗하여 고개 위에 올랐거니
저 개미 같이 길 위에 기고 있는 사람들
그 곁의 선로 위에 조는 듯한 전차들
지나간 만년의 까마득한 세월이, 지금 여기
펼쳐진 이 조망과 더불어 다를 바 없도다.
지금은 내 있어 고개 위에 섰거니
고개 위에 내 없고 바람만이 지나되
인생은 다시 만년도
여기 이 풍경처럼 졸고 있을지니라.
◈ 공규사(空閨詞)
여름 밤 검은 비는
호박잎에 내리는데
임 계신 곳 어디맬까
어느 첩첩 산 너멀까
여름 밤 궂은비는
바라지를 적시는데
빈 방에 하나 가득
모기 소리 차 있네
◈ 화문 지하도(光化門 地下道)
종각 앞에서 합승을 내려
광화문 지하도를 내려설 때
나는 조금 어지러움을 느낀다.
내 머리 속을 스치는 가벼운 현깃증
이는 나의 노쇠와 허약의 탓만 아니리라.
서울 한복판에 실려 있는 문명의 무게
가로 세로 질주하는 차량들의 소음이
순간 새까만 망각으로 바뀌이는 탓일까?
그리고 또 같은 순간, 먼 하늘가에
아스라히 둘려 있는 눈 쌓인 삼각의
메뿌리들이 눈썹 끝에 와 닿은 탓일까?
지하도를 지나 다시 층계를 오를 때
나의 등 뒤에서 내 몸의 무게를
떠받쳐 주는 것도 또한 새까만 망각뿐.
오오 새까만 얼굴이여!
너는 내가 층계를 오를 때도
그리고 또 내가 층계를 내릴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내 마음 속의 그림자
그렇다, 언제 어디서고 내가 가장 생각한 것은
너의 이름 오직 죽음뿐이었구나.
◈ 귀뚜라미
하늘에 하나 가득
별 박힌 가을 밤
땅 위는 온통 귀뚜라미
소리로 차 있다.
하늘과 땅은
어둠을 사이 한 가까운 이웃인데
귀뚜라미 소리로 별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 그림자11
책 펴고 앉아서나 자리에 누워서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를 모르겠다.
어이한 설움이기에 고희 넘어 오는가.
좋던 일 궂던 일 다 물과 함께 흘러가고
남은 건 벽에 비낀 그림자뿐이로다.
한평생 함께 갈 친구 그뿐인가 하노라.
◈ 기차 여행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향 같은
마을이 내다뵌다.
집집마다 감나무 대추나무
잎새들 몹시 반짝거려
동네가 환히 들여다보인다.
툇마루마다 반들반들 닦아져 있고
방안엔 머리 감아 빗은
달덩이 같은 처녀 꽃수틀 안고 있네
그 앞집 부엌에선
떡시루 김 오르는 거 보이고, 또
그 옆집 말끔히 쓸어진 뜰의
뽀얀 흙 위엔 암탉 한 마리 졸고
그 곁으로 어린애기 아장 걸어가고 있네.
“아, 저기는 내 고향,
내가 자라던 동네
저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애기는
바로 내가 아닐까”, 하는 순간
기차는 새된 기적 소리를 지르며
시커먼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 꽃
우리의 한숨 하나 하나
눈물 방울 하나 하나
노래 하나 하나
그것은 모두 가서 맺어지리라.
가파른 언덕 위에 꽃이 핀다.
우리의 목숨은 갈 데가 있다.
게으른 나비처럼 봄볕에 졸고 있을지라도
시위 떠난 화살은 과녁을 향해 가는 것을.
우리의 목숨 하나 하나
노래 하나 하나
눈물 방울 하나 하나
그것은 모두 가서 맺어지리라.
극락과 지옥이 신선한 과일 함께
식탁 위에 놓인 정오.
아아 까마득하게 쳐다보이는, 저 멀리
절벽 위에 핀 꽃이여.
◈ 눈보라
연기 낀 오막도
때묻은 베개도
어머니의 주름살마저
잊어야 가리.
돌아서면 허허벌판
눈보라 땅 끝까지 휩쓰는 속에
나는 혼자 가야 한다.
어디라도 가야 한다.
있는 것은 다 버리자.
버리고 가야 한다.
사랑 앓는 지구여 너는
눈보라 싣고 지금 어디로 굴러가나.
◈ 달밤
달 밝은 하늘엔
나도 새가 되고 싶다
저 멀리 강물 위의
뿌연 안개 속으로 날아가고 싶다
슬픔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골짝에 흐르고
꿈은 차라리 설운 가락
노래나 되어 돌아오는가
세상과 소란은
장바닥 먼지 함께
달빛에 젖어 잠들면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 위로
울음 삼키며, 새 한 마리
가만히 날아간다
◈ 들국화
고향의 들 끝
가을 풀더미 속에
잊었던 얼굴처럼
들국화 피어 있네.
날이 날마다
이슬 받아먹고
피어난 들국화
서슬진 향기.
내 어린 날은
이 들 끝에서
아침저녁 휘파람
눈물이었네.
이제 눈물 가시고
싸늘한 미소
옛 고장 풀더미 속에
들국화 피어 있네.
◈ 뚝새풀
뚝새풀 무논에
개구리 운다.
나루 건너 재 너머
장터는 五十里.
막걸리 젖은 옷깃의
장꾼 돌아오지 않는데,
으스름달밤을
뻐꾸기 운다.
◈ 무제(無題)
아, 나 없었으면,
나 죽었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맘속으로 외지만
내 오늘도 아직(여기)
살아 있네.
뜰 앞에 백일홍이
피었다.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간다.
그런 거 바라보노라면
어느덧 또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 무지개
내 어려서부터 술 많이 마시고
까닭 없이 자꾸 잘 울던 아이
울다 지쳐 어디서고 쓰러져 잠들면
꿈속은 언제나 무지개였네.
어느 산 너머선지 아련히 들려오는
그 어느 오랜 절의 먼 먼 종소리
그 소리 타고 오는 수풀 위 하늘엔
지금도 옛날의 그 무지개 보이리.
◈ 무지개
숲 속에 물 솟는 소리
물 괴는 소리
靑山에 물 솟는 소리
물괴는 소리
내 사랑은 사철
가슴속 피는 꽃
가슴속에 무지개 솟는 소리
무지개 괴는 소리
하늘과 땅 사이엔
사랑의 무지개
이승과 저승 사이
다리 놓는 무지개
◈ 바위
사막이 바다에 다다라 목마른 길가
내 여기 하나 이름 모를 바위로 누웠나니
가고 싶은 고향은 푸른 하늘
아아, 일어나지 못할 바위로다.
일어났으면 일어났으면
천만년도 누워 앓는 가슴 속 거울이로다.
곁에는 보리수, 차고 맑은 샘
나그네는 목축이고 피리 불기를
<굳은 껍질 열면은 가슴은 거울
소리 없는 가락도 어리이나니
못 들으랴 못 가랴, 어느 하늘 위라도>
아아, 일어났으면 일어났으면
일어나 훨훨 날아갔으면
날으다 차라리 숨이 다하면
눈 감고 바다 위로 떨어졌으면…
가슴 속 거울에사 별빛도 어리이고
차디찬 은하도 굽이쳐 흐르지만
누가 알리, 천만년도 누워 앓는 이 가슴
일어 못날 마련의 바위로다.
누가 부나 피리를, 소리 없는 저 가락,
내 귀는 가없는 허궁에 차고
아아, 일어났으면 일어났으면
차라리 강물 되어 흘러갔으면…
◈ 밤 1
부엉이 올빼미 두견새들이
나무 가지가지 깊은 덩굴 속에 싸여 앉아
어둠을 울어, 어둠으로 황홀하게
달고 향기로운 술을 빚어내는가.
밤은 깊어질수록 어둠을 뿜고
어둠은 짙어 갈수록 달고 향기로운 술이어라
오랜 옛날부터 뇌수(腦髓)(눈먼 새들의)로 먹은
하늘의 별 땅에 찬 꽃들이
어둠으로 빚어져 향기로운 술이어라.
술아 모든 잔에서 넘쳐
온갖 목숨 있는 것들을 축복하라.
나무 가지가지 깊은 덩굴 속에 싸여 앉아
어둠을 빚는 새여.
하늘과 땅, 그 속의 모든 울음 있는 것을
취케 하라, 흐르게 하라.
◈ 백로(白鷺)
숲 사이 언덕 사이 푸른 물 우에
님을 기려 벗기려 너푸는 나래
고민과 추억이 한숨을 몰우니
오오 조촐한 이 강산의 넋이여.
해돋는 아침에는 金물을 반기고
바람 부는 저녁때엔
나블에 딸으고
노래와 춤이 사철 눈물을 잊어여.
고민과 추억이 한숨을 몰우니
오오 점잖은 이 나라의 넋이여.
청성스리 파랑새 눈물로 새우지만
하늘과 물 사이에 감출 바 없는
사랑과 벗님이 누구라 없다더냐.
허나 보라 수리와 매의 모질게 싸움과
야심에 불이 붙는 우울한 가마귀를
고민과 추억이 한숨을 몰우나.
오오 어질고 순한 평화의 나래여.
◈ 백일홍 時調
뜰가 백일홍나무
뜰에 가득 백일홍꽃
무더운 여름날을
너로 하여 즐기나다.
꽃으란 다 예쁘다지만
너의 자태 같으리.
감나무 그늘 아래
자리하고 앉았으니
세상은 다 남의 것.
있는 것은 백일홍뿐
전생의 무슨 인연이
너나 되어 왔을꼬.
◈ 법이 따로 없어라
─`三論法報新聞 創刊을 祝賀
밥 먹고 잠자고
밭 갈고 씨 뿌리고
아기 낳아 기르며(네)
그 속에 길 있으니
길을 쓸고 닦으세.
해 뜨고 물 흐르고
꽃 피고 새 울고
이웃 함께 듣고 보며
그 속에 내 있으니
내가 따로 없어라.
봄 오면 겨울 가고
여름 가면 가을 오고
밤에는 별이 돋고
그 속에 법 있으니
법이 따로 없어라.
◈ 별리부(別離賦)
만나서 보던 이
헤어져 잊는단 말
이별이 서러워라.
버들개지 내리는 강물 위에
어저 임아 울지 마소
석자 흰 수건 다 젖것네, 저 임아.
이 나루 건너면
수풀이 가리이오.
수풀을 지나면
황토 재 사십 리.
붉은 패랭이꽃
종다리 울음소리
모두 낯선 곳.
어이 가리 먼 먼 따
아손 님 여의기 설우워라
살면서 보고 보던 이
헤어져 있는단 말 이별이라네.
◈ 비 젖는 언덕에서
이슬비에 젖고 있는 언덕 위의 꽃
나도 젖으며 그 앞에 섰다.
내 비록 농구화에 바바리 차림으로
수풀과 더불어 젖고 있지만
나는 왠지 저들만큼 이쁘지 않으이.
내 입성 아무리 갈아 본다 해도
저들에 어울리겐 이쁘지 않으리.
비에 젖은 언덕의
꽃과 나무들처럼
사람은 그렇게 이쁠 수 없을까.
내 어쩌면 저들에 어울릴 만큼
저들과 하나 되어 살 수 있을까.
◈ 비가 나리네
세상이 온통 퍼렁으로 덮인
五月
산과 들에는 꽃과 잎새가
한창 피어나는데
비가 나리네.
이렇게 크게 차려진 잔치는
누가 치르라고
비 오는 길 위의
봉고차 화물차 그리고 택시들
모두 바쁜 듯이 달아나네.
◈ 설날 아침
새해라고 뭐 다른 거 있나
아침마다 돋는 해 동쪽에 뜨고
한강은 어제처럼 서쪽으로 흐르고
상 위에 떡국 그릇 전여 접시 얹혀 있어도
된장찌개 김치보다 조금 떫스름 할 뿐
이것저것 다 그저 그렇고 그런 거지
그저 그렇고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한 해 한 번씩 이 아침에 나는
한복으로 옷이나 갈아입는다.
◈ 소녀행(少女行)
황혼이 될 때까지 소녀들은
마을 어구에 서 있었다.
꿈과 그리움은
피곤한 날개를 접고
하늘 높이 우는 생명
노을을 쓰는 종소리여.
소녀들은 어디서나 다 듣는다
얼마나 꼭 같은 저희들의 목소리뇨.
한 줄[絃]에 우는 가냘픈 선율
어디서나 들리는 저희들의 목소리
황혼이 될 때까지 소녀들은
눈보라 속에 서 있었다.
◈ 송추(松湫)에서
교외선 타고 돌다가
송추에 내려서 논다.
유원지 있단 말 듣고
산협길 타고 드는데
늦가을 쨍한 햇빛만
골짜기에 넘치네.
도봉(道峰) 뒷산 이래선지
사람들은 많기도 하다.
무어 볼 게 있다고
이리 모두 쏠렸는고
고작이 소주나 마시고
소리소리 지르네.
◈ 시인(詩人)
온갖 것 생각하고 느낌에 겨운 이
시인 아닌 사람 있을까.
죽음에 눈물짓고
삶을 다시 가다듬는, 그리고
아아 부드러운 눈길 스칠 때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이 있을까.
파초잎을 두들기는 한밤의 빗소리
사랑은 멀리 두고 저녁녘의 함박눈
이를 모두 그 누가 시 아니라 하느뇨.
말을 꼬부려 얽어내는 마음의 무늬
이는 더욱 다듬어진 시
그러나 이 보다 우주(宇宙)를 고아 내는
그러한 참된 시는 흔치 않으리.
◈ 아카시아꽃
앞산의 뿌연 꽃
5월의 아카시아는
솔숲에 엉기어
안개처럼 피어난다.
뒷산의 뿌연 꽃
5월의 아카시아는
찔레에 엉기어
구름처럼 피어난다.
아카시아꽃으로
메워진 골짜기마다
벌과 나비들이
잔치를 벌인다.
◈ 안개
이른 아침 浦口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행길
한 쪽은 개울이고 또 한 쪽은 산자락이다.
바다 낀 산이어서인지
골짝이고 등성이고 온통 안개로 덮였다.
산자락이 낮은 언덕을 이루고
그것이 뒤로 뻗쳐 누우며 수풀로 덮이고, 안개는
그 수풀에서 뒷산 허리께까지를 아주 뿌옇게 감싸고 있다.
나는 지난밤 바닷가 술집에서
술 자꾸 마시고
술 치는 여자아이 여기저기 주무르다 쓰러져 잤는데
아침에 그 손 그 눈 채 씻지도 않은 채
지금 이 길 해서 시내로 들어가는 거다.
내 젊은 날 出家를 생각하며 절간에 머물 때
이른 아침마다
안개 덮인 산속으로 곧잘 들어갔었는데
안개 속 아무리 자꾸 들어가도
신선 도인 만나 보지 못한 채
시누대 억새풀 딸기나무 가시 위에
몇 번이고 쓰러지며
손이고 얼굴이고 피나게 찔리고 했어도
까닭 모를 마음속 울음은
흐르는 피보다 더 따갑고 아팠었네.
이제 도시 한가운데 직장 두고
때로는 청국장 구수한 시골 여관으로, 또는
생선 배 많이 닿는 포구 같은 데 나와
생선회 불고기 따위 해서 술 잔뜩 마시고
커피 마시고
생수 냉수 들이키고
목청 돋궈 주장하고
전화로 부탁하고
아랫배 도두룩한 세상사람 다 됐건만
지금도 안개 보면,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맘 어이 가셔지지 않았을까.
비가 온통 안개로 둔갑한 浦口의 아침
시누대 잎새 뾰죽뾰죽 내민 산자락 돌아
나는 지금 어디로 무얼 찾아 가는 걸까.
오오, 안개여 안개여.
나도 모르게 나의 한평생 짓뭉개고
날 여기까지 휘몰아 온
내 마음속 눈물이
이제 모두 안개 되어
지금 여기 내 앞에 와 있단 말인가.
◈ 어떤 대화(對`話)
산 밑 동네에서도 젤 안 집은
동네에서 젤 할아버지네 집.
뜰에는 감나무 소나무 백일홍나무
집 뒤는 대숲이 산으로 이어졌다.
사철 온갖 꽃과 잎새로 에워진
묵은 기와집 할아버지는
방에서 뜰로 뜰에서 다시 방으로
언제나 왔다 갔다 그것뿐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뭘 하고 계세요.
뭘 하긴 뭘 해, 이러고 있지.
비 오실 때 할아버진 뭘 하세요.
비 오실 때 비 오는 거 보고 있지.
눈 오는 날엔요.
눈 오는 날엔 눈 오시는 거 보고 있지.
또 다른 날엔요,
늬네들 와서 절하면 절이나 받아 먹지.
또, 또 그 밖의 다른 날엔요.
에끼 녀석 말이 많다.
하긴 뭘 자꾸 하느냐.
그냥 제사나 지내고 살지.
◈ 연(蓮)
나무그늘 얼룩진
가파른 길 위로
그대는 올라오고
나는 내려가고 있네.
이승 저승 어느 승에고
내 밭갈고 살 제
밀씨 보리씨
뿌리는 대로
총총한 별.
그대 내 밭에
밀씨를 뿌리면
내 그대 밭에
별을 흩고.
아아, 그대와 나는
누군고.
이제 여기서
그대 나를 찾으면
내사 차라리 외로운
연꽃일세.
나무그늘 얼룩진
가파른 길 위로
그대는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고 있네.
◈ 연꽃 웃고 있네
귀뚜리 소리, 귀뚜리 소리 난다.
돌 속에 귀뚜리 소리 난다.
여치 소리, 여치 소리 난다.
벽 속에 여치 소리 난다.
寂滅은 차라리
宇宙를 채우는 꽃송이.
十`一`面 관음 다 돌아보고, 다시
大佛 앞에 서니.
귀뚜리 소리 여치 소리
모두 간 곳 없고.
涅槃은 그대로
無를 채우는 햇빛인데.
화강암덩이, 희멀건 화강암덩이
한 송이 연꽃 웃고 있네.
◈ 오늘도 해는
따뜻해지고
나뭇잎새는 해마다 더
반짝거리기만 하는데
그런대로
강물은 흐르기만 하고
오늘도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네.
◈ 오동나무꽃
오래 앓던 늙은이의
임종이 다가왔다.
아버님 생각나시는 거 없으세요?
며느리가 물었다.
오냐, 저기
늙은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 생각나시는 거 없으세요.
손주가 물었다.
오냐, 저기,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 오동꽃
식구들은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저기, 오동꽃
할아버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재실 앞 오동나무꽃 보인다.
늙은이의 얼굴은 환히 밝아졌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 이무기
앞내 소에
앞내 소 이무기 산다.
소낙비에도
다시 나는 햇빛에도
하늘 내음 어림인가.
쉰 길 물속에서
이무기는
몸을 뒤친다.
◈ 자화상(自畵像)
나는 오랜 옛 서울의
한 이름 없는 마을에 태어나
부모형제와 이웃 사람의 얼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볼 적부터
죽음을 밥 먹듯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에 피는 꽃의 빛갈과
황혼에 지는 동산의 가을소리도
이별이 곁들어져
언제나 그처럼 슬프고 황홀했다.
술과 친구와 노래는 입성인 양 몸에 붙고
돈과 명예와 그리고 여자에도
한결같이 젖어들어
모든 것을 알려다
어느 것도 익히지 못한 채
오직 한 가지 참된 마음은
자기가 눈감고 이미 없을 세상에
비치어질 햇빛과
피어나는 꽃송이와
개구리 우는 밤의 어스름달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살아 있을 모습을 그려 보는 일이다.
◈ 장미
화병에 심어진 나의 장미는
비 오는 밤 창턱에서
어둠을 타고 피어난다.
오직 저 검은 비 소리만이
나의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돋구어 준다.
여름 한철 숲속에 핀 꽃들은
차라리 고독한 사람의 사상(思想)
비 속에 흠뿍 젖고자 한다.
젖은 꽃잎 첩첩히 땅에 쌓아
쌓은 향기, 가을의 붉은
열매 속에 익어 돌아오나니.
장미여
창턱에서 시들다 차라리 비에 젖은
너의 경련하는 입술로 어둠을 입맞추라.
오오, 어둠을 흔드는 너의 입김
스미라 이 가슴에, 고독할수록
오만한 나의 열매를 익혀 다오.
비여 주룩주룩 어둠 속을 나리며
나의 장미의
싸늘하고 창백한 이마를 적셔 다오.
◈ 제야(除夜)
검은 하늘에 수탉 울기 전
은반의 촛불을 보며
멀리 초인(超人)을 기다린다.
수묵(水墨) 조으는 옛 병풍 속에
신부의 숨결인 양 밤은 잦아들어
제기(祭器)는 조촐히 닦아 두고
마음은 멀리 초인을 기다린다.
하늘엔 별들의 기도 소리 소란하고
거리엔 고목이 꿈을 모으고.
표박이여 이 밤엔 쉬라.
들 끝에서 돌아오는 카인을 맞아
경건히 눈물짓는 촛불을 바라보며
마음은 멀리 초인을 기다린다.
◈ 조령별곡(鳥嶺別曲)
일흔 넘은 이제 여기
지팡이 의지하고 새재를 오른다.
문경새재
이곳에 내 사랑 살겄다.
새재 새재
이곳에 내 노래 들리겄다.
산은 구름보다 높고
가락은 산보다 높은데
지팡이 의지하여
오르고 또 오른다.
문경새재
이곳에 내 노래 들리겄다.
새재 새재
이곳에 내 사랑 살겄다.
'☞ 문학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킨슨 (Emily Elizabeth Dickinson) 시 모음 (0) | 2016.03.14 |
---|---|
정호승 시 모음 (0) | 2016.03.04 |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시 모음 (2) | 2016.02.18 |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시 모음 (0) | 2016.02.06 |
푸쉬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시 모음 (0) | 2016.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