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皮千得, 1910년~ 2007년. 시인, 수필가. 대학교수.
호는 금아(琴兒).
중국 상하이의 호강대학교 영문학 전공.
1946년~1975 서울대학교 영문학 교수.
1930년 《신동아》에 〈서정별곡〉, 〈파이프〉 등으로 등단.
시집 《서정시집》, 《금아시문선》, 수필 〈인연〉, 〈은전 한 닢〉 등.
피천득 시 모음
◈ 인연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 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우정
등덩굴 트레이스 밑에 있는 세사발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있는 세사위를 바른 손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대고
불어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 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 이 순간
이 순간 내가
별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 저녁때
긴 치맛자락을 끌고
해가 산을 넘어갈 때
바람은 쉬고
호수는 잠들고
나무들 나란히 서서
가는 해를 전송할 때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이런 때가 저녁때랍니다
◈ 축복
나무가 강가에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나무가 되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일까요
새들이 하늘을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새들이 되어 나란히 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 꽃씨와 도둑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가야지
◈ 후회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 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 기다림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 잊으시구려
잊으시구려
꽃이 잊혀지는 것 같이
한때 금빛으로 노래하던
불길이 잊혀지듯이
영원히 영원히 잊으시구려
시간은 친절한 친구
그는 우리를 늙게 합니다.
누가 묻거든 잊었다고
예전에 예전에 잊었다고.
꽃과 같이 불과 같이
오래 전에 잊혀진
눈 위의 고요한 발자국 같이
◈ 가을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 고백
정열
투쟁
클라이맥스
그런 말들이
멀어져 가고
풍경화
아베마리아
스피노자
이런 말들이 가까이 오다
해탈 기다려지는
어느 날 오후
걸어가는 젊은 몸매를
바라다본다
◈ 기억만이
아침 이슬 같은
무지개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비바람 같은
파도 같은
그 순간 있었느니
구름 비치는
호수 같은
그런 순간도 있었느니
기억만이
아련한 기억만이
내리는 눈 같은
안개 같은
◈ 너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 너는 아니다
너같이 영민하고
너같이 순수하고
너보다 가여운
너보다 좀 가여운
그런 여인이 있어
어덴가에 있어
네가 나를 만나게 되듯이
그를 내가 만난다 해도
그 여인은
너는 아니다
◈ 너는 이제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 노 젓는 소리
달밤에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
만나러 가는 배인가
만나고 오는 배인가
느린 노 젓는 소리
만나고 오는 배겠지
◈ 눈물
간다 간다 하기에
가라 하고는
가나 아니가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아라
◈ 단풍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핏빛 저 산을 보고 살으렸더니
석양에 불붙는 나뭇잎같이 살으렸더니
단풍이 지오
단풍이 지오
바람에 불려서 떨어지오
흐르는 물 위에 떨어지오
◈ 부활절에 드리는 기도
이 성스러운 부활절에
저희들의 믿음이
부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그 마음이 살아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권력과 부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그 힘을 저희에게 주시옵소서.
◈ 새해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 시월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 어떤 유화
오래 된 유화가 갈라져
깔렸던 색채가 솟아오른다
지워 버린
지워 버린 그 그림의
◈ 연가
훗날 잊혀지면
생각하지 아니 하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잊으리도 아니하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잘 사노라 하리라
훗날 잊혀지면
잊은 대로 살리라
이따금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살리라
어느 날 문득 만나면
웃으면 지나치리라
◈ 연정
따스한 차 한잔에
토스트 한 조각만 못한 것
포근하고 아늑한 장갑 한 짝만 못한 것
잠깐 들렀던 도시와 같이 어쩌다 생각나는 것
◈ 양(羊)
羊아 羊아
네 마음은 네 몸가티 희고나
羊아 羊아
네 마음은 네 털가티 보드럽구나
羊아 羊아
네 마음은 네 음성가티 정다웁고나
◈ 무악재
긴 벽돌담을 끼고
어린 학생들이 걸어갑니다.
당신이 지금도 생각하고 계실
그 어린아이들이
바로 지금 담 밖을 지나갑니다
작년 오월 소풍 가던 날
그날같이 맑게 개인 이른 아침에
당신이 가르치던 어린아이들이 걸어갑니다
당신을 잃은 지 벌써 일 년
과거는 없고 희망만 있는 어린아이들이
나란히 열을 지어 무악재를 넘어갑니다
◈ 선물
너는 나에게 바다를 선물하였구나
네가 준 소라 껍질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너는 나에게 산을 선사하였구나
네가 준 단풍잎 속에서
붉게 타는 산을 본다.
너는 나에게 저 하늘을 선사하였구나
눈물 어린 네 눈은
물기 있는 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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