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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업자의 해외선교, 영혼 사들이기

by 石右 尹明相 2016. 6. 18.

 

한국 종교업자의 해외선교, 영혼 사들이기

 

      박노자 교수 -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

 

저는 방금 영국에서 활동하시는 한 스리랑카 스님이,

최근 10년 동안 스리랑카에서 이루어진 ‘비도덕적 개종 문제’에 대한 사회적 토론,

그리고 그 문제의 정치화에 대해서 발표한 아주 재미있는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발표 요지를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특히 미국과 한국 등의 기독교 단체와 통일교, 그리고 일본의 영우회와 창가학회 등

‘신흥 불교’ 조직들이 자녀의 학교 입학과 취직 보장, 의료서비스나 음식 제공 등을 무기로 삼아

힌두교나 불교 신자들을 상대로 한 ‘비도덕적 개종’이 2002년부터 2003년 사이 문제가 되어

외국 종교인들의 ‘매혼 (買魂) 활동’에 대해 “스리랑카와 같이 불교 등의 전통이 깊은 곳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전국적 분노와 자기비판적 성찰이 일어났으며,

이를 기회로 이용하여 보수적인 불교 단체들이 비도덕적 개종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했는데 좌절했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일면으로 보수적 불교 단체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또 일면으로는 외국 기독교 단체들이 ‘종교 자유 억압’을 문제로 삼아 원조를 받는 게

어려워지지 않을까 두려웠고, 결국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외국 종교 법인들의 등록 절차는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법안의 내용을 보면 물질적 시혜에 의한 비도덕적 개종을 금지시키려 했던 것이지

설교 내지 설법에 대한 ‘정상적 개종’에 대해서는 하등의 문제도 만들지 않는 등

불교의 전통적인 관용의 태도를 그대로 이어나갔다는 것입니다.

 

소련 해체직후 공세적 선교활동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종교 단체들의 ‘종교적 제국주의 침략(강사가 쓰던 표현)’과

이에 대한 스리랑카 불교 측의 민족주의적 대응…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눈앞에

1992년 가을의 레닌그라드가 떠올랐습니다.

망국 직후의 혼란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의한 상상 이상의 민생고,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시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낮에도 길거리 다니기가

무서워질 정도로 악화된 치안상황….

소련 체제와 함께 정의로운, 형제애에 기반을 두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민중들의 수백년간의 꿈까지 일시적으로 무너져 세상만사가 그저 병리적인

이기주의와 무조건적 생존, 치부의 논리로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죽은 코끼리의 시체 앞으로 하이에나들이 운집하듯이,

죽은 소련의 시체를 밟으면서 약간의 이득을 취해보려고 온갖 부자나라에서 온

‘종교단체’들이 이 죽음의 땅에서 비상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물론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가장 가시적이었지만, 의외로 한국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현재 구소련에서 공식적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들은 577명이나 되지만

(등록하지 않고 활동하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천여명이 될 것입니다)

20년 전 레닌그라드만 해도 적어도 30~40명이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들의 언행 중에서 지금도 잘 기억나는 것은, 무엇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심’이었습니다.

“너희가 70여년동안 공산주의를 했기에 지금 이처럼 가난하게 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장사를 잘한 덕에 이처럼 부유하게 되고

복을 받았다”는 대조법 정도는 거의 공인된 레토릭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러시아 같으면 종교인 사이에서 거의 보기 드물었던

‘물질적 시혜’에 대한 맹신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음식 등을 제공해주고 돈 벌 기회도 가끔 주고

나중에 한국 단기 유학 기회 정도 마련해주면 ‘성령의 내림’을

받지 않을 젊은이가 없다는 것 역시 대다수의 확신이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라는 ‘대한민국의 우방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진

구(舊) 적대국에서 저들은 위풍당당한 정복자들이었습니다.

이제 항복한 옛 적들의 과거를 심판하고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돈이라는 무적의 무기를 가진 정복군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도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해서 사회적 분노를 산 것인가요?

 

타협으로 돌아선 저항파

 

이 정복군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무너진 나라의 ‘원주민들’은

크게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스리랑카의 경우처럼 민족주의적 신념이 강하거나 공산주의적 이상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저항파’는 모든 유혹들을 뿌리치고 정복자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경향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접근이었겠지만, 불행하게도 완전히

무너진 나라에서는 한국 종교 제국주의에 끝내 맞설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의 유리 왕인 교수같이 철저한 공산주의적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스탈린주의적) 세계관의 소유자마저도

‘3·1문화센터’ 등 선교단체들과의 협력을 거부하지 못할 정도이었습니다.

단, 유리 왕인 교수의 경우에는 북-러 친선단체에서 계속 활동하고

대북교류를 계속하는 등 북조선과의 전통적 친교를 포기하지 않고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역시 지조를 지켰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돌아가시는 마지막 해까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셨던

제 스승 미하일 박교수까지 일부 선교사와의 협력을 받아들이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랫사람들까지 먹여주려면 선택이 없었던 셈입니다.  

 

성매매가 나쁜가 혼매매가 더 나쁜가

 

보다 흔한 두번째 그룹은 저 자신처럼

‘면종복배(面從腹背)’로 일관하는 ‘내키지 않는 협력자’들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정복군 안내자 노릇을 해도 가면 갈수록

‘부역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파도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도 캐나다 출신의 한 한국 목사의 통역 노릇을 몇개월 동안 했는데,

낮에는 통역을 하고 저녁에는 ‘성금을 많이 내는 것은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과 같은 이야기를 통역해야 했던 제 자신에 대해 ‘과연 나는 어떤 인간인가?’하는

자기혐오적 명상에 잠기곤 했습니다.

 

돈이 많았던 그 목사님은 아예 호화호텔의 식당을 통째로 빌려 거기에서 먼저 설교하고

그 다음에 식사를 제공하곤 했는데 (반대로 하면 ‘양’들은 밥 먹고 다 도망가니까요)

그 호텔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내국인 부류는 몸이라도 팔아서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하려 했던 ‘인터걸’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복군들에게 ‘성매매하는 게 더 나쁜가,

아니면 혼(魂)매매하는 게 더 나쁜가?’라는 화두에 대해 꾸준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후자가 더 치사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개월 혼매매 업소(?)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주로 관광가이드 등의

아르바이트로 전환했지만, 혼매매 업소에서 보낸 그 몇개월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입니다.

 

끝으로는, 세번째 그룹은 정복군에게 아예 항복을 하여 정복군이 강요하려 했던

‘영적인 변발변복’, 즉 “신앙고백하고 열심히 하나님에게 빌어야 돈도 들어오고

복도 온다”는 정복자들의 사상에 동화됐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호구지책을 도모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종교업자들의 영혼 상품화


제국주의가 지나가면 남는 것은 부역자로 구성된 무(無)명분의 지배층과

기형적인 대외 지향 일변도의 경제, 그리고 지식인 계층의 매판화와

그 쌍둥이로서의 병리적으로 과장된 일각의 민족주의 등입니다.

사회는 그 트라우마를 반세기가 지나도 다 치유하지 못합니다.

한국의 2만여명의 해외파송 선교사들이 상징하는

종교적 제국주의가 지나가면 무엇이 남을까요?

 

‘선진문명’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돈 좀 주면 ‘현지인의 내면’의 풍경도

바뀔 수 있다는 데에 대한 현지 사회의 마음 아픈 각성과 자기 자신의 끝없는

취약함에 대한 자기혐오의 감정, 종교적 심성이 거래되는 현상에 따르는

허무감 정도일 것입니다.

성매매가 몸의 병을 가져다주듯이, 혼매매는 엄청난 마음의 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기대가 있다면, 종교적 정복군과의 ‘만남’은 소극적인 자기 혐오나

반성 등으로 끝나지 않고 돈이 인간의 내면까지도 바꿀 수 있는,

영혼도 상품화되는 이 저주받을 제도, 즉 자본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증오와

거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지인 피해자들이 자본가로서 접근한 ‘외국 종교 업자’들의

실체를 파악해야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저항해야 할 것인지,

나아가서 그 파송국의 피해대중과 같이 손잡고

이 기형적인 세계적 제도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 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