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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때문에 교회 못 간다 - '사업'을 넘어 '산업'이 된 종교

by 石右 尹明相 2016. 9. 17.

 

"돈 때문에 교회 못 간다"

 

'사업'을 넘어 '산업'이 된 종교

 

 

근자에 어느 목사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주일을 소중히 여기거나

헌금하는 일에 신실한 사람들이 별로 없더군요"라고 지적하는 글을 읽었다.

아울러 그는 "그 이면에는 하기 싫은 마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내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고 말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자신의 느낌을 주장하는 거야 자유겠지만, 그 글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만일 내가 거꾸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옹호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교권주의자들이고

신실한 사람들이 별로 없더군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선뜻 동의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편협한 언사는 논리도 크게 부족한데다가

견해가 다른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없기 때문이다.

 

 

신실한 헌금이란 뭔가

 

오히려 나는 과연 어떻게 헌금해야 그게 신실한 건지 묻고 싶다.

헌금을 아주 많이 해야 신실하다는 건지, 또는 봉투에 이름 크게 써서 내야 신실한 건지,

아니면 모이는 모든 예배마다 꼬박꼬박 헌금해야 신실한 건지

그걸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그게 더 신기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가난한 성도가 헌금을 적게 하거나

자주 못 하면 그게 신실하지 않다는 말인가.

사실 가난한 성도들은 헌금을 하기 싫어 못 하는 게 아니라, 돈이 너무 없어서 못 한다.

도리어 빚을 안 지고 살면 기적일 정도다.

부모에게 용돈을 충분히 못 드리고, 형제들이 고생해도 못 도와주고,

자식에게도 원하는 거 다 못 해주고,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맘대로 못 사고,

그리고 친척과 이웃에게도 제대로 베풀지 못 하고 산다. 그래서 늘 마음이 아리다.

그래도 그들 대부분은 교회에 갈 때면 빈손으로 안 가고 반드시 헌금을 챙겨서 간다.

교회의 바른 운영과 교역자의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해

적절한 재정이 필요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수입 '십분의 일'을 안 바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거라고 협박하거나, 그도 아니면

마치 믿음이 부족해서 덜 바치는 것처럼 폄하하는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묻고 싶다.

목회자들은 정말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8:3)"

구제하며 헌금하고 있나. 말로만 "헌금이 복되고 귀하다"고 설교하지 말고,

아무도 안 말리니 이제라도 교인들에 대한 '헌금 사찰'을 그만 멈추고

자신들부터 먼저 헌금통이 터지도록 실컷 해서 복을 곱배기로 더 받으라는 거다.

아울러 애초에 교회에 헌금 제도가 아예 없었고

또한 목사에게 생활비를 주는 제도가 원천적으로 없었다면,

그래도 2-3세기의 초기 교회들처럼 자비량으로 힘들게 일하며

돈을 벌어 목회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지도 궁금하다.

한국의 가톨릭 사제는 급성장하는 교세에 비해 절대수가 부족해서 난리인데

왜 기독교 목사는 이토록 많을까. 이게 과연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럴까.

 

 

 

헌금 강요는 인간의 잡술

 

나는 유급 목회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역으로 지금처럼 대다수 목회자가 유급 사역인 관행에는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사도바울의 말씀을 그리도 잘 설교하면서

유독 그의 자비량 사역만은 열심히 안 따르는지 그 깊은 사유를 정녕 모르겠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돈을 걷으신 적이 없다.

그런데 도대체 기독교의 목사라는 직분이 뭐길래

만날 교인들을 보기만 하면 "돈 바치라"고 하냐는 거다.

본래 교회의 헌금이란 성경책을 들이대며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게 아니다.

헌금 강요는 결단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 잡술일 뿐이다.

헌금은 성도들 각자 스스로 자원해서 내야 정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헌금이 아니라,

차라리 의무적 세금이나 요금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예배당이 무슨 돈이나 제물을 바쳐 제사드리는 이방 신당인가.

교회들이 하도 돈 타령을 해대니 "돈 때문에 교회 못 간다"는 교인들이 계속 늘고 있다.

돈이 예배당 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먹고 살기 힘든 젊은 세대들은 구태여 그 얼어죽을 '십일조 강요' 때문에

은근하고도 집요한 차별과 눈총까지 받으며 교회에 출석할 만큼 그리 우둔하지 않다.

그들은 나이깨나 먹은 어른들이 주보에 헌금자 명단 빽빽히 올려놓고

서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뻑하는 꼴을 차마 유치해서 못 본다.

요즘 교회에 젊은 층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더구나 어느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심방 한번 갈 때마다 천만 원씩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전세계에서 교인 집을 심방하면서

개인적으로 심방사례비를 태연히 받는 나라는 한국교회가 유일할 것이다.

심지어 수도권의 한 귀족 목사는 "교인으로부터 개인적으로 10억 원을 받아 봤다"고

부흥회에 돌아다니며 자랑하기도 한다.

이제는 종교가 사업을 넘어 산업이 되었다.

담임목사, 협동목사, 부목사, 교육목사, 강도사,

그리고 전도사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직분을 수직화하고 계급화하여

여기에 유급으로 고용된 사람만 해도 적어도 수십 만에 이른다.

그리고 교회 돈을 방만하게 투자하여 만든 각종 사업도 만만치 않다.

선교, 교육, 의료, 구제, 복지 등을 명분으로 만든 재단과 그 고용원들 또한 거대한 산업이다.

그러니 목회가 엄청난 이권이 된 게 당연하다.

부패한 인간의 특성상 돈과 권력이 있는 곳이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기독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타종교들도 마찬가지로 도토리 키재기다.

근자에 현각 스님이 괜히 일갈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결코 잊지 말자.

교회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라"는 사람이고,

교회에서 제일 의심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다"는 사람이다.

 

 

종교 산업 끝장내야 

 

일찍이 장로교 창시자인 칼뱅은

"교회 수입의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요즘 난 그런 신선한 교회를 눈 씻고 찾아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기독교가 변질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상당수 교회는 우선 헌금을 걷는 방법에서 옳지 않고,

또한 그렇게 부당하게 걷은 헌금을 사용하는 방법에서도 크게 잘못되어 있다.

교회 재정이 선교니 구제니 교육이니 하는 것에는 고작 생색만 낼 뿐이고

많은 부분이 외적 거품과 내적 비만에 낭비되며 귀족 목사들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그럼에도 진솔한 변화는 아직도 난감하다.

주일마다 구름같이 모여 온갖 매끄러운 헛소리에 아멘 연발하고,

심방비니 접견비니 기도비니 하며 수백만 원씩 뜯어도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돈을 갖다 바치는 맹신도들이 도처에 넘치는데

삯꾼 목사들이 뭐가 답답해서 스스로 달라질까.

목사교 신도들은 담임목사가 헌금을 유용하고, 장부 숨기고,

성추행하고, 표절하고, 고소하고, 세습하고, 거짓말하고, 황제 식사하고,

그리고 무슨 사치를 떨어도 전혀 꿈쩍 안 한다.

자칭 주의 종이란 위인들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 없고

오로지 개인적 복만 기원하며 돈을 갖다 바친다.

그리고 이런 무속적 맹신에는

그 어떤 고상한 신학도 무효하고 그 무슨 신성한 교리도 무력하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사이비 저질 목사라도 정통이라는 탈을 쓰고

기복 장사만 제대로 잘하면 곧잘 흥행해서 순식간에 번듯한 대형 교회의 교주가 된다.

마치 신흥 종교나 이단 집단들이 부흥하는 과정과 지극히 닮은꼴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적극 동참해서 망국적 목사왕국 건설에 앞장서고 있는 맹꽁이들은

정말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족속들이다.

결국 진정한 교회 회복은 이런 가짜들이 장악한 종교 산업을

완전히 끝짱낸 후에야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성도들이 더욱 각성해야 하는 이유다.

 

"나이 30이 되고 40이 됐는데도 자기 밥벌이 못하는 사람,

땅이라도 개간해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설교하지 마라.

성서를 말하지도 말고 교회에 관해 말하지도 마라.

그게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 김교신

 

 

신성남 /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