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시인. 1945년 함남 흥원
연세대학원 국문과
1968년 <사상계> 신인 문학상에 ‘순례자의 잠’ 당선
시집으로는 <허무집>, <풀잎> 등
강은교 시 모음
◈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 봄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 가을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 물방울의 시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서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 붉은 강 1
가서는 안 옵니다.
그대는 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림자가 되었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뵈지 않는 하늘에다 목매달아
빼곡히 골목골목 어둠이 되어
그래 여긴 사철
눈물이 모래알들을 눕히는지요?
나무란 나무 가지마다
터럭이란 터럭 끝마다
피묻은 그림자 주렁주렁 열리는지요?
그대는 깊디깊은 강
슬픔들은 저녁 되어
그 누더기 옷을 벗으니
그대의 온몸은 빨갛게 물듭니다.
끝에서 다 쓰러진 꿈 하나
비틀거립니다
몰래 춤춥니다.
◈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 내 만일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 없이 빛 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 겨자씨의 노래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 그
그래, 너무 많이 걸어왔네
이제 돌아갈 수도 없어, 지나온 길이 너무 깊어
그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입을 본다.
그는 사진 속에서 모자를 비뚜로 쓰고 단추를 덜 채운 자신의 키를 본다.
인생은 비극이었으나 그리 슬플 것은 없다고
사진에 대고 항변하면서
희끗희끗한 머리
군살이 낀 어깨
겉보기에는 안 그렇지만 너무 살이 찐 배
주말에는 골프를 치고
주말에는 동창생을 만나고.,
(…………)
잠속에서는 시간을,
영혼을 꺼내든다.
아, 인생은 별 게 없어, 입술을 흩날리면서
그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바람 속에 눕는다.
◈ 그날 오후
드넓은 홀 안에는 비에 젖은 구두들이 예의바르게 앉아있었다,
후드득후드득 빗방울들이 떨어져 눕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사이로 추억들이 살그머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장 낡은 구두에게 상패가 수여되었다,
(언제나 깊고 험했으며…) 추억들이 힘없이 박수를 쳤다…
벽들이 참지 못하고 허리들을 꼬았다.
그때였다,
문이 쓰윽 열리고,
젊은 남자들이 벽들마다 발돋움하고 서 있는 양초에
일회용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면서 불을 붙였다.
비스듬히- 지평선에 서서 지구에 불을 붙이듯이.
아직도 밖에서는 비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숨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니.
◈ 너를 사랑한다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별
새벽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 서시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 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 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 수평선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 순례자(巡禮者)의 잠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 숲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말하면서
올 대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이유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 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 자전(自轉)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 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 23층의 햇빛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 가는 곳
달이 뜬다,
산 너머 칡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 가을의 書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 감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 거리 시(詩)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 고독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 그 여자 1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 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 그대의 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 꽃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 낙동강의 바람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 눈발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 돌아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 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 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 등불과 바람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 모래가 바위에게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 무엇이라고 쓸까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 물방울의 시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 물에 뜨는 법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 배추들에게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 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 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 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 눈이 내려
흰 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 붉은 해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 비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 연애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 아주 오래된 이야기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 금오산
어디서 모르는 이의 울음이 자꾸 들려오고 있다.
그대와 그대가 부르고 있다.
그대와 그대가 그리로 들어간다.
흔들리며, 흔들며
추억과 욕망 뒤섞어 흔들며
따뜻한 뿌리 그림자
젖어서 누운
그곳!
오늘도.
◈ 너무 멀리
- 비리데기, 가장 일찍 버려진 자이여 가장 깊이 잊혀진 자의 노래
그리움을 놓치고 집으로 돌아오네
열려있는 창은
지나가는 늙은 바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는데
오, 그림자 없는 가슴이여, 기억의 창고여
누구인가 지난 밤 꿈의 사슬을 풀어
저기 창밖에 걸고 있구나
꿈속에서 만나 이와
꿈속에서 만난 거리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크고 깊던 언덕들과
깊고 넓던 어둠의 바다를,
어디선가 몰려오는 먹구름 사이로.
너무 멀리 왔는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리움이 저 길 밖에 서 있는 한.
◈ 등불과 바람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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